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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뮤즈노트 Feb 19. 2019

오래전 설국

에치고유자와 마을

회사 연수로 일본을 다녀왔다.

소니와 후지테레비를 방문했고 남은 4-5일 정도는 조별 활동이 허락되었다.

나는 따로 떨어져 나와 신주쿠에서 기차표를 샀다.

금성 출판사 문학전집 1978년도판 책 한 권을 들고, 북쪽 니가타 현으로 떠나는 기차에 올랐다.

기차 안에는 스키 여행을 떠나는 몇 명의 젊은 연인과 벌써부터 졸기 시작한 사람들이 드문드문 앉아 있었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듯한 어린 차장이 검표를 해주는데, 소매는 검게 때가 타 있었다.

흥청거리는 후기 자본주의 일본 저너머 어딘가에 살고 있는 듯한, 근면한 인상의 친구였다.


어떤 꿈을 꾸고 있다고 느꼈는데, 웅성거리는 소리에 눈을 뜨고 말았다. 니가타가 가까워 오고 있었다. 니카타 역은 니카타 현의 수도라고 하기에는 그다지 규모가 크지 않았다. 새벽 시간에는 차도 별로 다니지 않았고, 식당들 역시 문을 닫은 상태였으므로 난감했다.

책 속의 설국 사진


책을 다시 펴니, 눈에 뒤덮인 커다란 산봉우리 세 개가 흑백 사진 속에 빛나고 있었고, 그 앞으로는 조그만 마을이 허리띠처럼 둘려 있었다. 어떻게 하면 이곳에 갈 수 있을까 하다가, 문득 기차 노선표를 다시 보니, 에치고 유자와 마을이 뜻밖에 기차 노선도에 나와 있었다. 사람들에게 물어 확인을 해보니, 그 역을 지나쳐 온 것이었고 그 책 해설란에 적혀 있는 니카타란 니가타 시가 아닌, 니가타 현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매표소에 가서 이야기를 하니 지나온 역을 다시 갈 수 있는 무료표를 끊어 주었다. 다시 플랫폼으로 나갔고, 날씨는 생각보다 추웠다. 새벽 4시 30분, 사람은 몇 명 없었다. 젊은 아가씨와 담배를 피우고 있는 아저씨가 몸을 움츠린 채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영어를 알법한 아가씨에게 기차를 어디서 타면 좋을지 물어봤다. 그 아가씨는 본인과 같은 차라는 것을 알려 주었다.


미닫이로 된 지방 국철을 열고 차에 올랐다. 열차는 천천히 미끄러져 나갔고, 깎아 놓은 얼음 같은 푸른 어둠 속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맞은편 좌석에 앉은, 좀 전에 만난 아가씨는 가끔 얼굴이 마주칠 때면 녹는 얼음처럼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미소를 어디선가 본 듯해 기억을 더듬어 보다가 이내 다시 따뜻한 잠 속으로 빠지고 말았다.


차의 규칙적인 덜컹거림은 심장박동처럼 부드럽고 듣기 좋았다. 문득 얼굴이 따갑고, 눈을 뜨지 못할 만큼 강렬한 빛이 내 몸에 내리쬐고 있었다. 창을 바라보자 하얀 설원이 지구 끝까지 펼쳐져 있었다.


낡은 책속 사진과 달라진 게 없는 설산


국철이 덜컹거리며, 지나는 곳은 2미터 높이로 쌓인 눈길이었다. 느릿느릿 움직이는 차창 밖으로는 작은 집들이 검게 눈 속에 박혀 있었고, 독수리 두 마리가 별일 없다는 듯 기차만큼 커다란 날개를 펴고 설원을 낮게 날고 있었다. 국철이 가는 길은 점점 좁아져 열차가 다닐 만큼의 공간만 남기고, 양쪽 창은 눈의 장막으로 막혀 시야가 가려져 버렸다. 에치고 유자와 마을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에치고 유자와의 설국(雪國)  


처음부터 무턱대고, 니카타현으로 발길을 돌리게 된 것은 아니다. 그 이야기는 대학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는 아직 대학생이었고, IMF로 원하던 어학연수도 가지 못한 채 하루 종일 빈집에서 잠을 자거나 책을 읽거나 어항 속 열대어들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지내고 있었다. 당시 읽은 솔 벨로우의 '허공에 뜬 사나이'처럼 그렇게 인생이 허공에 매달린 채 하늘거린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머릿속으로 구름이 몰려온다 싶으면, 산허리에 걸린 도로 위를 땀으로 흠뻑 젖을 때까지 뛰고 또 뛰었다.


그날도 여느 날처럼 방에 누워 신문을 뒤척이고 있었다. 그런데 한여름의 특집기사라기엔 어울리지 않는 사진이 실려 있었다. 가파른 산등성이 위에서 신나게 활강하는 사진이었다. 그 기사는 올 겨울 여행지로 니카타를 추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이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쓴 설국의 무대가 되는 곳이라는 설명도 빼놓지 않았다.


눈으로 뒤덮인 가파른 산봉우리와 눈 속에서도 푸르게 빛나는 일본 소나무. 그리고 그 속에선 조용하면서도 가늘게 코마코의 슬픈 노랫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여관 창문을 열고 몸을 반쯤 내놓은 채 창틀에 매달려 하얀 김을 뿜는 코마코의 불그레한 볼과, '아무것도 해줄 게 없어'라는 권태로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시마무라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들의 모습을 보는 순간, 스스로에게 약속했다. 내 젊은 날의 어느 날은 반드시 설국에 있겠노라고......


'현 접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니 雪國이었다' -川端康成의 '雪國' 첫 문장 中

낡은 책 뒤의 사진과 너무나도 똑같은 산세가 달려들었다. 그것은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보았고, 코마코가 보았고, 지금으로부터 40여 년 전 사진작가가 보았고 그리고 내가 보게 된 산이었다. 거짓말처럼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산이었고, 나는 차창에 쌓인 눈과 그 너머의 산과 하늘을 바라봤다.


에치고 유자와의 코마코를 닮은 아가씨


커다랗게 쓰여있는 역 이름을 두어 번 대뇌 었다. 눈은 지붕 가까이 높게 쌓여 있었지만 작은 도로 위는 깨끗이 치워져 있었다. 역을 나가려는 데 누군가를 부르는 맑은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렸는데 새벽 플랫폼에서 내게 기차 타는 곳을 알려줬던 아가씨였다. 나를 부르는 게 맞나 싶어 어정쩡하게 서 있었는데 뜻밖에도 내 앞에 와서야 걸음을 멈췄다.


그녀는 '여기는 영어를 하는 사람이 없을 거예요. 내가 도와줄게요.'라고 말했다. 아가씨는 나를 데리고 관광안내소를 찾았다. 작고, 깨끗했다. 사무실 안쪽엔 따뜻한 난로가 놓여 있었고, 벽에는 현 접경의 터널 바탕에, 흰 글씨로 설국의 첫 구절을 적어 놓은 포스터가 걸려 있었다. 카운터 옆 서고에는 일본어 문고판 설국이 나란히 꽂혀 있었다. 문고판 책과 엽서 두장을 사서 가방에 넣었다.


나를 도운 아가씨는 도쿄에서 일하는 간호사였다. 그때는 마침 친구들과 북쪽에서 스키를 타고 다시 도쿄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했다. 어깨까지 흘러내린 차분한 머리카락에, 크고 선한 눈매를 갖고 있었다. 추위에 발개진 볼이 하얀 얼굴과 대비되어 이 마을에 어울리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녀의 고향도 이 곳, 일본의 북쪽 어딘가라고 했다. 그래서 겨울이 되면 고향을 찾아 북쪽으로 올라온다고 했다. 도쿄행 기차를 갈아타려면 세 시간 정도 시간이 있으니 괜찮다면 안내를 해주겠다고 말했다.


우리는 가와바타 야스나리 박물관을 찾아갔다. 작은 3층짜리 건물이었는데 지하부터 3층까지가 모두 박물관이었다. 지하에는 소설 속 주인공들이 처음 만나게 된 여관방 모습과 사진이 걸려 있었다. 그리고 3층엔 과거 설국

에 살던 사람들의 생활상을 찍은 사진과 농기구, 겨울철 살림살이 등이 진열되어 있었다. 우리는 전시실 한편에 있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전기 영화 감상실에 들어갔다.

에치고 유자와 사람들의 옛날 생활사 전시실

박물관과 영화 감상실 모두 방문객은 우리 두 사람밖에 없었지만, 관리원 아저씨는 영화를 돌려주었다. 무슨 이야기인지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마음 한쪽이 따뜻해지는 듯했다.


그녀의 영어는 그다지 능숙하진 않아서 서로 말이 잘 통하지 않을 때가 많았다. 영어로 말을 걸면, 그녀가 무의식 중에 일본어로 대답하곤 했다. 도저히 서로의 뜻을 알아내지 못했을 때에는 수첩을 꺼내 들고,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나도 그녀도 너무도 오랜만에 그려보는 그림들이었기 때문에 서로가 그려놓은 그림을 보곤 웃곤 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겐 별로 상냥한 사람이 아니었지만, 마음을 탁 놓고 대하는 그녀의 모습은 내 안에 있던 인간을 감동시켰다.


그녀는 이번 스키여행에서 찍은 사진들을 보여 주었다. 스키복을 입고, 하얀 설원 위에서 그녀는 혼자 서있었다. 세상의 근심은 하나도 없이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겠다는 환한 표정으로... 그래서 였을까? 새삼 그녀가 이 북쪽의 눈과 너무도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여자의 인상은 이상하리만큼 청결했다... 첫여름의 산들을 보고 온 자신의 눈 탓일까 하고 의심했을 정도였다." - 川端康成의 '雪國' 中 시마무라와 코마코의 첫 만남.


왜 이 추운 곳까지 왔죠?


가파른 산 등성이에 스키장이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을 정도로 험한 산세였지만, 의외로 에치고 유자와 마을엔 밝은 햇빛이 들었다. 태양빛을 받자 눈들은 못 이기겠다는 듯 하얀 몸에서 물을 뚝뚝 떨궜고 눈 마을까지 찾아온 나도 저렇게 사그라드는가 싶어 몸과 얼굴을 매만져 보았다.


새벽부터 오늘 아침까지 아무것도 먹은 게 없다는 걸 생각한 나는 식사대접을 하기로 했다. 동네 식당 몇 군데를 돌아다녀 보았지만, 식당 문 앞엔 어김없이 '준비 중'이라는 간판이 걸려 있었다. 할 수없이 다시 역으로 돌아와 역사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나는 가쯔동을 먹었고, 그녀는 우동을 먹었다. 하얀 김이 연신 그녀의 하얀 볼을 어루만졌다.


왜 이 추운 곳까지 왔죠?


그녀가 내 눈을 바라보며 물어왔다. 그녀의 물음에 이번 여행의 의미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딱히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이런 일까지 설명하려 든다면 정말 바보가 아닐까 싶어 그만두었다. 다만 모든 일에 투명자를 대고 이리저리 재보는 나의 어떤 성격의 일부와 전혀 엇나간 일을 한다는 것... 그것은 평생을 살며 당연히 갖고 있어야 할 증표 같은 게 아닐까 싶기도 했다.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을 법했다.


나는 쑥스럽게 낡은 책을 꺼내 보여주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그녀는 내 눈을 바라보며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고는 잔잔한 물가 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주 아름답고 투명한 미소였기 때문에, 그녀가 분명 좋은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다.


열 시 반이 넘어가자, 눈이 녹아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날씨는 화창하고 따뜻했다. 도로 곳곳에 작은 수로가 만들어졌다. 눈 녹은 물은 아무런 때도 묻지 않았다. 투명하고 맑은 계곡물과도 같았다.


그녀도 길을 떠나야 했다. 역 앞에서 내게 잠깐 기다리라고 하고는 어딘가로 뛰어갔다가 잠시 후 나타났다. 그녀의 손에는 니가타 지방의 송편이 들려 있었다.


"이 지역 사람들이 많이 먹는 거예요. 선물.."그리곤 상자를 내밀었다.


난 눈이 녹아내리는 소리를 들으며, 그녀의 찰랑거리는 머리카락과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기차 개표소를 지난 그녀는 내게 손을 한 번 흔들고는 꿈처럼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어두컴컴한 역 밖을 나오니 햇빛은 더욱 환하게 내 얼굴을 비추어 왔기 때문에 선글라스를 썼다.


햇빛이 흰 눈과 반사되어 마을 전체가 온통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설국에 온 이유, 허무한 존재들이 만드는 의미 있는 만남들


오늘처럼 눈이 많이 내리는 날이면, 그녀의 질문을 곱씹어 본다.


왜 이곳에 왔는가?


설국을 쓴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피고 지는 애달픈 인생들의 모습 속에서 어쩔 수 없는 깊은 허무를 발견했다. 허무한 존재로서의 인간. 눈처럼 곧 녹아 없어지지만, 눈이 없으면 아무도 찾지 않는 설국처럼, 번번이 도시로 나가고 싶지만 나갈 수 없는 코마코와 요오코의 불안감처럼, 허무는 역설적인 존재감을 갖는다.


사라질 눈이지만 눈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는 설국은, 모두 다 죽게 되는 허무한 인생들인 우리들이 모여 다시 허무한 이 세계를 이루지만, 서로의 만남이 자체로 의미를 만들어내는 서글픈 역설을 말해준다.
모든 것이 헛수고인 인생사에 있어, 주인공이 택한 삶의 태도는, 또는 그가 택할 수밖에 없었던 삶의 태도는 따라서 '바라보기'일뿐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하나둘씩 우리 곁을 떠날 때에도, 추억과 소중한 기억이 소실되는 순간에도 더 이상 슬퍼하지 말자. 눈처럼 녹아 없어지는 허무함 속에서도 그 허무함이 이루어내는 것이 결국 존재의 아름다움이었음을 잊지 말자라고 이야기한다.

에치고 유자와를 찾은 이유가 존재하지 않듯, 그녀는 눈을 닮은 만남을 선물해줬다.

목적과 효용을 따지는 만남이 지속되는 일상에서

인생은 가끔 시혜를 베풀듯 젊은 어떤 날에 선물을 내리곤 한다.


그러면 우린 그저 창 문을 열고 입김을 뿜으며

눈 내린 풍경을 바라보며 허무함이 직조해낸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면 될 뿐이다.


발에다 힘을 주어 버티고 서서 눈을 쳐든 순간, 쏴아 하고 소리를 내면서 은하수가 시마무라의 몸속으로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 - 가와바타 야스나리 작 <설국> 마지막 페이지 마지막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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