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문안 온 선배
엉망이었다.
기획국에 파견나온 동안 스트레스가 심했다.
말도 안되는 윗 분의 아이디어를, 두 달에 걸쳐 기획안으로 정리해서 냈고, 바로 그 다음날로 축농증 수술날짜를 잡았다. 스트레스 때문인지 축농증 때문인지 모르지만 두통이 심했다.
서울에는 친구밖에 없었기에 밤에 와서 보호자란을 채워줬다. 수술 전 날, 함께 저녁을 먹으며 친구에게 유서를 전했다. 마취과 전문의인 친구가, 쉬운 수술이란 없고 전신마취는 모두 위험하다 했던 말이 퍼뜩 떠올랐기 때문이다.
사실 유서를 쓰면서 놀랐다.
이것 저것 뒷처리에 필요할 정보에 반 페이지,
나머지 내가 남기고 싶은 말에 반 페이지,
결국 A4 한장이면 정리될 인생이었다.
뭘 그리 가슴 졸이며 살았던가!
다음 날 새벽, 덜덜 거리는 수술용 침대에 누워 입김이 날 정도로 추운 수술방으로 옮겼다.
뭔가 박하느낌의 화한 용액이 몸 안으로 들어오는 걸 느낀 후, 정신을 차렸을 땐 견딜 수 없는 한기가 몰려왔다.
이상한 추위였다. 냉온 정수기처럼 몸 안에 얼음 덩어리가 덜그덕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었다.
입원실 침대로 옮기며 어지럽단 말에 친구는 자기 병원인 것처럼 간호사에게 처방을 말했고 바로 주사를 맞을 수 있었다. 다시 깊은 잠에 빠졌다.
얼마간 잠을 자고 깼을 때 친구는 늦은 출근을 했고, 곁에는 회사 선배가 앉아 있었다.
그 선배는 나를 보자, 싱긋 웃으며 물었다.
괜찮니?
선배와는 2년 전이었던가 한 부서에서 처음 일하게 된 사이였다. 키가 훤칠한 미남형의 신사였다.
그렇다. 젠틀맨.
만약 신사의 원형이 있다면 바로 그 선배이지 싶었다.
권위를 싫어하고 후배로 두기엔 공격적인 스타일인 나와도 잘 지내는 사람이니 참으로 넉넉한 사람이다.
나는 줄곧, 사실 지금까지도 선배의 됨됨이에 열등감을 느낀다. 그런 사람이 있다.
나는 수십년간 수도정진을 해야 간신히 도달할까 말까 한 영역이 누군가에겐 귀를 긁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어떤 일이란 것.
나는 선배에게 뭐라 잠깐 예의 차리는 말을 했고, 화장실을 다녀왔다. 코에 잔뜩 쑤셔넣은 솜 때문에 말을 건네기는 커녕 숨을 쉬기도 힘들었다.
침대에 다시 쓰러지며, '엄청 아프네요. 이제 돌아가세요.'라고 말했다.
간간이 찐득한 잠에서 깼을 때, 선배는 침대 옆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책을 한 손에 든 채로 '뭐 필요한 거 있어?, 많이 아프냐?' 물어왔다. 그렇게 몇 시간을 앉아 있다가 저녁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갔다.
문병이었다. 그 해 유독 고된 서울살이에 외로움병 걸린 후배를 위한 문병이었다.
이후로 선배는 고비마다 별 말 없이 몇 번씩이나 곁에 있어줬다. 괜찮냐고 물어봐 줬다.
나이를 먹으니 내가 될 수 없는 사람이 되길 갈망하기 보단, 좀 이기적이지만 그런 사람이 그저 곁에 있는 것으로 충분하단 생각을 한다. 곁에서 괜찮냐고 물어봐 주는 사람이 있다는 걸 자랑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단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