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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뮤즈노트 Jan 03. 2020

토정비결을 보다

아리스토텔레스, 까뮈, 부조리함에 대한 경멸 혹은 깨닫기

몸서리치게 싫은 것 까지는 아닌데 점을 치거나 토정비결을 보는 걸 싫어한다.

그런데 매년 생명보험사에서 하는 토정비결은 '재미 삼아' 보고 있으니 돈을 내고 점을 치는 걸 싫어한다고 하는 편이 맞을 듯도 싶다.


이건 좀 곁길로 빠지는 이야긴데... 전에 주인이 용하단 소문이 난 술집에 동료를 따라 간 적이 있다. 드라마 제작자들이 시청률 예측을 하러 간다나 뭐라나. 나에 대해 이것저것 이야기를 해줬는데 별로 맞은 게 없었다. 당시에 그 주인의 화술을 듣고 있자니 실은 점을 친다기보단 상담자에 가깝단 생각을 했다. 불안감에 뭐라도 믿고 싶은 제작자들에게 작은 위로와 희망을 건네준달까?


어쨌거나 내가 보는 생명보험사의 무료 토정비결은 세세한 예측보다는 굵직한 부분을 잘 맞춘다고 할 수 있다. 작년의 경우, 내겐 대운이 드는 해였다. 특히 표현이 마음에 들었다. '살다 보면 적은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대운이 찾아오는 때가 있는데 그게 바로 지금이다.' 이런 류의 문장이었다.


노력의 결실을 얻는다든가, 조금 더 견뎌보라든가... 이런 류가 아니고 별로 한 것도 없는데 대운이 찾아오는 인생의 때라니 얼마나 좋은 문장인가. 새삼 생각해보면 성공은 언제나 노력이란 단어와 짝을 이룬다. 그런데 노력이란 말처럼 모호하고 주관적인 단어가 또 있을까. 게다가 노력은 성공의 가능성을 높이는 것은 사실이지만(사실일지도 사실 의심스럽다) 성공을 결코 보장하지는 않는다.


그래서인지 21세기의 성공학 서적을 보면 확실히 유행이 바뀐 느낌이다. 인생의 경로 자체는 숙명론을 따르는 대신 심리적 안정을 추구하도록 격려하는 책들도 있고, 대놓고 가만히 누워서 성공을 꿈꾸는 것만으로 운명이 바뀔 거라 주장하는 작가들도 있다. 심지어 유사과학을 차용한 '트랜서핑'같은 책에서는 노력이 인생에 대한 가장 심각한 오해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사람들이 이야기를 좋아하는 이유가 인생을 닮았기 때문이라 분석했다. 문제와 해결이란 심플한 구조로 삶이 구성된다고 말했다. 이야기 속 주인공에겐 문제가 주어진다. 이야기는 그 문제를 풀어가는 과정으로 구성된다. 우리들 대부분은 문제가 주어지면 최선을 다한다. 성실한 소시민의 유일한 해법. 이른바 노력이다. 그런데 삶이란 호락호락하지 않다. 공주를 구하고 결혼하기 위해 용과 싸우던 기사들을 떠올려 보라. 그들이 최선을 다하지 않았을까? 용이 불을 내뿜던 순간엔 공주고 뭐고 살기 위해 노력, 아니 노오오오력했으리라.


그렇다고 노력 불용론을 말하며 빈정대고 싶은 생각은 없다. 노력은 인간에게 떠 안겨지는 불가항력적인 문제들에 대해 인간이 컨트롤할 수 있는, 혹은 컨트롤 가능하다고 믿을 수 있는 작은 심정적 안식처를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문제가 풀리면 안도한다. 나의 노력이 문제를 해결했다고 믿는다. 그런 믿음으로 또 새로운 하루를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기계장치를 타고 내려온 신)가 좋은 이야기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흔히 사람들은 재밌는 이야기에서 갑자기 절대자가 나타나 대신 문제를 해결해주는 방식이 촌스럽고 플롯을 해치기 때문에 그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따라가다 보면 그런 의미로 말한 게 아니란 의심이 든다.


이야기는 삶을 닮아 있다. 그런데 삶에서 누군가가 뿅 하고 나타나 문제나 인생의 숙제를 대신해 주는 경우는 별로 없다. 따라서 그런 이야기는 사람들의 공감을 사기 어렵다... 는 뜻이 아니었을까?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을 쓰던 시절과 마찬가지로 내가 살아가는 삶 역시 문제로 가득 차 있다. 나는 좋든 싫든 그 문제와 맞설 수밖에 없다. 노력이란 애초부터 문제의 해결을 위해 발버둥 치는 걸 의미하는 말이 아닌듯도 싶다.


까뮈 역시 시지프스의 굴러 떨어지는 돌에서 노력의 정체를 깨달았다. 언덕 밑으로 구르는 돌은 문제다. 그 돌을 산 정상에 올려놓고 해결한다 한들 또 떨어지겠지. 그런데 내일 떨어질 돌을, 문제를... 마주 보고 걱정하면서도... 오늘을 포기하지 않고 어쨌든 살아가는 태도. 열심히는 아니어도 어쨌든 돌에 손을 얹고 들숨과 날숨을 반복하는 것만으로도... 빛나는 반항, 부조리에 대한 경멸, 즉 '노력'이라 칭하기 충분하다.


하여 오늘을 살아냈다면, 이 순간 숨 쉬고 있다면 우리는 노력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힘내라!

2020을 사는

'노력'하는 우리들.



If this myth is tragic, that is because its hero is conscious. Where would his torture be, indeed, if at every step the hope of succeeding upheld him? The workman of today works every day in his life at the same tasks, and this fate is no less absurd. But it is tragic only at the rare moments when it becomes conscious. Sisyphus, proletarian of the gods, powerless and rebellious, knows the whole extent of his wretched condition: it is what he thinks of during his descent. The lucidity that was to constitute his torture at the same time crowns his victory. There is no fate that cannot be surmounted by scorn.

by Albert Camus (1913-1966)


이 신화가 비극적이라면 그것은 시지프스가 깨어있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의 걸음마다 성공의 희망으로 차있다면 삶의 고통따윈 없었을 터.

오늘날 노동자들은 같은 문제를 맞닥뜨리며 매일 일한다. 이 운명은 더할바없이 부조리하다. 이 비극은 의식적으로 깨어있는, 드문 순간에만 찾아온다. 신들의 프롤레타리아인 시지프스는 무력한 반항자지만 자신의 비참한 존재상황을 잘 이해하고 있다. 이 비참한 상태를 그는 돌을 내려놓고 하산하는 도중 줄곧 생각하고 있다. 이때 그에겐 고문과 같던 삶에 대한 통찰이 동시에 그의 승리의 조건이 된다. 깨어있는 자의 경멸로 넘어설 수 없는 운명은 없다.


If this myth is tragic, that is because its hero is conscious. Where would his torture be, indeed, if at every step the hope of succeeding upheld him? The workman of today works every day in his life at the same tasks, and this fate is no less absurd. But it is tragic only at the rare moments when it becomes conscious. Sisyphus, proletarian of the gods, powerless and rebellious, knows the whole extent of his wretched condition: it is what he thinks of during his descent. The lucidity that was to constitute his torture at the same time crowns his victory. There is no fate that cannot be surmounted by scor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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