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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뮤즈노트 Mar 17. 2020

앙코르와트 사원 구멍의 책임감

비밀을 털어놔도 될 것같은 사람의 입장

내 홈페이지에서 전에 써놓은 일기 같은 글을 발견했다. 때는 바야흐로 대학교 졸업식을 앞둔 사은회 날이었다. 요즘도 사은회가 있는지 모르겠다. 학교를 떠나기 전, 학과 교수님들과 졸업생들이 모여 간단히 저녁을 먹는 자리다. 나는 신입생 OT는 물론 MT도 거의 참석한 적이 없는 학생이었다. 그 때는 누군가의 요청이 있었는지, 아니면 졸업 전 교수님들께 정말로 감사를 표하고 싶었는지 자리를 잡고 앉아 저녁을 먹고 있던 모양이다. 그 때 학과에서 공부도 잘하고 예뻐서 선배들의 사랑을 듬뿍받던 후배가 내 옆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2-3년 정도 후배로, 우연한 기회에 동기가 소개해줘서 얼굴만 알고 있었다. 랩실에서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던 동기가 지나가던 내게 후배라고 소개해 준 것이다. 그런데 반응이 꽤나 극적이었달까 이상했달까. 슬금슬금 동기 어깨 뒤로 숨어서는 빼곡 얼굴을 내밀고 미지의 생명체를 관찰하듯 나를 쳐다보는 것이 아닌가. 당시에 나는 꽤나 쿨한 녀석이었거나 매사에 무관심했거나 비슷한 일을 많이 겪었던 탓이었는지, '내가 이상해보이나?'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런데 그 날 굳이 내 옆자리를 찾아 앉았다. 먼저 말을 걸어온 것도 그녀였다.


"선배님이 그 유명한 OO(이름) 선배님이죠? 이야기를 하도 많이 들어서 계속 누굴까 했었거든요."


긴장됐다. 대체 무엇으로 유명하단 걸까? 무엇보다 있는 듯 없는 듯 학교를 다니고 있는 데, 내 평판이 사람들에게 떠돌고 있다는 것도 놀라웠다.  


 "선배님은 늘 도서관도 혼자가고, 학식도 혼자 먹고, 늘 바쁘게 혼자 책을 안고 뛰어다녀서... 아~ 저 사람은 고독한 시인 같구나 생각했어요."


"실제로 보니 그렇진 않네요."


아! 뭔가 극강의 아싸나 외톨이로 유명한걸까? 생각하다가 '고독한 시인'이란 사은유에 빵 터져서 먹던 밥알이 튀어나올 뻔 했다. 여기까지는 기억이 난다.


그리고 그녀는 갑자기 비밀 이야기를 털어놓았다...'고 한다.'


"어쩐지 선배님께는 말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 말에, 나는 '그래'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저녁 식사 후에 지하철을 타고 압구정역까지 함께 갔던 기억이 난다.

친척집에 얹혀 유학생활하던 나와 달리, 부유한 집에서 곱게 커온 친구란 느낌을 받았다.


예전에 써놓은 글을 읽다보니 비밀 이야기를 들은 사실은 기억이 났다

그런데 그 비밀 이야기의 내용은 무엇이었더라... 전혀 기억이 없다.


왕가위 감독의 <화양연화>의 영화 속 옛 이야기에 따르면 비밀이 생기면 사람들은 산에 올라가 나무에 구멍을 뚫고 속삭였다고 한다. 그리고 구멍을 막으면 비밀은 영원히 간직된다고 말한다. 캄보디아 앙코르와트 사원을 찾아간 양조위는 사원의 구멍에 대고 '비밀'을 속삭인다. 잘 빗어넘긴 포마드 머리와 흐트러짐 없는 수트, 심장을 찔러오는 삶의 고통에 스타일만으로 맞서던 양조위. 그의 비밀은 당연하게도 영화 끝까지 말해지지 않는다.


그녀에게 당시의 나는 앙코르와트사원이었거나 깊은 산속 나무구멍처럼 생각되었던 것이겠지. 그곳에 와서 비밀을 속삭였다. 그런데 비밀의 기억을 잃었으니 앙코르와트가, 나무가 사라져 버린 셈이다.


당사자가 털어놓은 비밀이란 다른 누군가에게 털어놓을 수도 없는 성질의 것이다.

또 내게 비밀을 말한 사람이 돌아와, 맡겨놓은 예금을 인출하듯 이야기를 찾아갈 일도 없다.

나는 누군가의 비밀이야기를 듣겠다고 자원하지 않았고, 또 기억을 잊어버렸으니 결과적으로 비밀은 영원히 봉인된 셈이다. 심플하게 생각하면 비밀을 털어놓아도 될 것 같은 사람으로서 그 기억에 대해 책임질 일 따윈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묘한 책임감이 드는 것은 어째서일까?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앙코르와트 사원의 책임감 같은 것이 될까?


문득 비슷한 일이 생각난다. 전에 내 개인 홈페이지 게시판에 누군가 비밀이야기를 남겨놓고 관리자인 나만 보라며 비밀번호를 걸어뒀다. 세세한 대목은 기억나지 않지만 개인적인 비밀에 속할 법한 이야기였다. 이틀인가 지나서 비밀번호가 걸린 그 글을 지워달라는 메시지를 받았다. 자신은 비밀번호를 잊어버렸다고 말했다. 메시지는 그렇게 지워졌다.


세상엔 이유없이 떠도는 많은 비밀들만큼이나 비밀을 말하고 싶은 사람들이 존재하는 듯 하다.

그들은 앙코르와트 사원을 배회하고 비밀을 털어놓을 곳을 찾아 다닌다.

적당한 장소로 가서 구멍에 대고 자신의 이야기를 봉인한다.


나는 - 내 의사와는 무관하게 - 비밀을 간직하던 쪽이었으니 그들의 마음은 알 수가 없다.

별로 잘 아는 이들도 아니었으니 내 외모에서 풍기는 신뢰감따위를 은연 중에 자랑할 수도 없다.

굳이 따지자면 수백년간 캄보디아 정글 어딘가에 버려진 앙코르와트 사원이나 아무도 찾지 않을 나무처럼 보였다고 추정하는 게 옳을지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면 서글픈 일이지만, 비밀의 기억을 잃은 것에 책임감을 느끼는 걸 보면 비밀을 털어놔도 될 것 같은 사람으로서의 자질 같은 것이 느껴지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찌라시부터 SNS까지 비밀이란 비밀은 모조리 떠돌아 비밀이 남아나지 않는 요즘, 밀림속 허물어져 가는 사원을 찾아 비밀을 봉인하는 행위는 고전적인 우아함과 특유의 인간적인 정서를 지니고 있다고 느낀다.


양조위가 스타일로 삶과 맞서왔듯 비밀을 털어놓고 스쳐간 인연들의 스타일을 응원하게 되는 것이 앙코르와트 사원의 마음이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마찬가지로 앙코르와트의 책임감도 그 어디쯤 있는 것이겠지...하며 생각에 잠기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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