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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뮤즈노트 Oct 09. 2017

어쩌다보니 수중세계 창조주

수중세계 창조주가 되다

아이를 키우게 되면, 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여행지를 들르거나 종종 엉뚱한 일을 함께 벌이게 된다.

최근의 내가 그런데

그중 하나가 어항 꾸미기다.


대개의 아이가 그렇듯이 언제부턴가 강아지와 고양이를 갖고 싶다고 하더니

육상동물이 아닌 수중생물을 원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아들이 협상의 기본을 터득한 것일까?


내 입장에선 강아지와 고양이라는 최초의 제안을 거절한 이후

그럼 (아쉬운 대로) 어항이라도 만들어달라는 수정 제안마저 거부하긴 힘들었다.  

게다가 아내까지 나서서는 '어항인데 뭐... 하나 만들어줘'라고 거들었다.


고작 어항인데 라고 하면 어항일 뿐이지만 내게 어항이란 고된 취미라는 생각이 박혀있었다.


고교시절 집에 낡은 어항이 하나 있었다.

언제 어떻게 들어오게 된 것인지 출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곳에는 구피와 달팽이들과 물속을 날아다니는 온갖 기괴한 생물체가 섞여 살았다.

스타워즈 에피소드 4에서 루크와 한솔로가 만난 외계인이 득실대는 술집과 같은 정경이었다.


또 아무리 신경을 안 쓴다고 해도 가끔씩은 물도 부어주고, 바닥모래와 어항도 씻어줘야 했는데

그것도 실로 고역이었다. 욕실에서 쭈그리고 앉아 모래를 씻고 일어설 때면 '아이구 허리야!'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그래서 '이사 가면 만들어 줄게~'라고 미뤘었는데 덜컥 이사를 하게 되면서 이제 출구가 없어졌다.


'그래, 뭐 어항일 뿐인데...'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사이즈가 작은 일체형 슬림 어항과 떨이로 판매하는 수초를 사 왔다.

그리고 어항을 청소해줄 새우와 가오리비파를 넣어주고,

주인공 물고기는 마트에서 파는 플래티,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두 마리를 풀어놓았다.


마트 수족관 코너의 아주머니는 '아휴... 암수를 맞추면 좋은데 암컷밖에 없네...'라며 미안한 얼굴이셨는데,

내게는 좋은 소식이었다. 여기서 물고기가 더 늘면 귀찮아진다.


그래서 탄생한 게 아래 수조다.  

  

슬림형 일체형 어항 : 플래티 2마리가 평화롭게 헤엄치고 떨이로 산 수초가 가득하다.


하지만 평화로움도 잠시, 이 글을 읽는 분들이 이미 눈치챘듯이 플래티는 사이가 무척 좋은 암수 한쌍이었다.

훨훨 나는 저 플래티 암수 서로 정답구나~


싸우지도 않고 정말로 정다운 암수 황어


곧 둘의 사랑은 생명의 잉태로 이어지고...






무려 20마리에 달하는 치어를 낳게 된다.

 




아내 : '어머! 새끼를 낳았네'

아들 : '아빠! 새끼를 낳았어'


치어들은 무럭무럭 자라기 시작하고, 저 좁은 슬림 어항으로는 곧 감당이 안되리란 결론에 도달했다.

그 뒤로 집사람이 이사 후 집안 인테리어에 몰두할 동안, 나는 멍하니 어항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어항 싫다고 하더니 아빠가 푹 빠져있네~'라고 아내는 속 편한 소리를 했지만

나는, 역시 속 편하게 헤엄치는 암수 한쌍과 치어 스무 마리를 보며 이를 어쩌면 좋을까를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이건 여담이지만, 아내는 연애시절엔 내가 멍 때리는 모습에서 우수에 젖은 눈빛이 보인다며 좋아했었는데, 결혼 이후 어느 순간부터는 그냥 멍 때리지 말고 뭐라도 하라고 채근이다. 그런데 사실을 말하자면 멍 때리는 건 맞지만, 그중 20%, 아니 30% 정도는 무언가를 치열하게 고민하며 아이디어를 찾을 때도 있는데 억울하다.


게다가 아무것에나 쉽게 공감하는 중년이 돼버린 탓에 물고기들이 좁은 공간에서 허덕이며, '헬수조'를 외치는 게 상상돼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것이다. 결국 아내의 말을 흘려들으며 어항 앞에서 며칠간을 치열하게 멍 때린 결과 새 어항을 만들기로 하고 그 조건들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1. 치어와 어미, 새우와 가오리비파가 행복하게 살 정도의 넓고 쾌적한 공간

2. 어항 관리가 쉬울 것

3. 스토리가 있는 콘셉트

4. 저렴한 비용과 집안 인테리어를 해치지 않을 것 (아내 요구사항)

5. 물고기 더 사줘요 (아들 요구사항이나 리젝트)


1번을 충족하기 위해 30센티, 60센티, 90센티 어항 중에 치열하게 고민했는데, 어항을 올려놓을 이케아 탁자가 50cm밖에 안되었기에, (새로 어항 받침을 사는 건 4번에 위배) 50cm 어항으로 결정했다.


2번을 위해서는 물고기의 노폐물을 모래틈으로 잡아당겨 여과를 시켜 자연스러운 순환구조를 만들어주는 방식을 택하기로 했다. 일단 모래 이외에 여과 역할을 해줄 돌멩이들을 여과기 통 안에 가득 넣은 뒤, 남은 돌멩이도 마저 묶어서 바닥에 깔아줬다.


이케아 테이블에 사이즈를 맞춘 가로 50cm 어항과 여과기(못 쓰게 된 모기장으로 감아 여과기가 막히는 걸 방지)



문제는 3번인데, 어떤 걸로 할까 역시 치열하게 멍 때렸다.

제일 먼저 떠오른 건, 토토로였다. 잔디밭을 뛰어가는 블루와 화이트 토토로는 어떨까? 아니면 우산 쓰고 아빠를 기다리는 아이들과 그 옆에 선 토토로? 하지만 이 역시 4번에 위배된다. (슈퍼 301조 같은 조항, 걸면 걸리는..)


맞다. 토토로 피규어는 비싸다.


문득 이사 때 발견한 장난감이 생각났다.

뭔 생각이었는지 총각 때 옥션인가에서 구입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바로 스타워즈 X-윙.


스타워즈 X-윙으로 연출 가능한 최고의 씬은... 아마도 에피소드 5의 대고바 늪지대가 아닐까?

안개와 늪지대로 이뤄진 대고바 행성, 이곳에서 루크는 스승 요다를 만나 포스의 힘을 깨치게 된다.


늪지에 불시착한 후 물에 빠져 이끼와 수초가 가득한 X-윙의 모습



스타워즈는 영화뿐 아니라 스토리텔링史에서도 한 획을 그었다. 최초 개봉된 에피소드 4가 조셉 캠벨의 '영웅 서사 이론'을 그대로 적용해 성공을 거둔 전형이라면, 에피소드 5는 스토리텔링의 이론적 정통성을 계승하면서도 기대를 넘어서는 변주로 완성시킨 확장판에 가깝다. 게다가 선의 또 다른 면으로 존재하는 악이라는 철학적 메시지를 어두운 터널이 끝없이 이어진 듯, 장엄한 미장센의 연결로 꿰뚫어냈다.


그렇다. 꼭 슈퍼 301... 아니 4번 항목 때문이 아니라, 스토리 있는 콘셉트라면 스타워즈! 스타워즈 하면 에피소드 5, 에피소드 5 하면 대고바 행성의 늪지대 씬이라는 논리적 전개에 따라 콘셉트는 결정되었다.


일단 이끼를 표현하기 위해, 이끼를 실로 감은 X-윙을 물병에 담가 두었다.

물병에 담긴 X-윙

바닥모래는 검은색을 쓰기로 했으니 늪은 흰모래가 적당할 듯하다. 그런데 모래를 두 종류를 쓰게 되면 당연히 물 흐름에 따라 이리저리 섞이게 되고 만다. 집에 굴러다니는 PET병을 가위로 오린 다음, 물고기들이 날카로운 절단면에 다치지 않도록 가스불로 둥글게 처리했다. 플라스틱에 열이 닿으면 변형이 일어나고 자연스러운 느낌의 굴곡이 나온다. 그 경계를 따라서 흰모래를 부어줬다.


검은모래가 침범하지 못하도록 플라스틱 경계선을 만들고 늪을 표현할 흰 모래를 부었다.


그 뒤에는 돌과 나뭇가지를 배치해서 전체적인 느낌을 조율하고, 흰모래 위에 비닐을 덮어준 다음, 푸르름을 담당할 씨앗을 뿌려주었다.


이때 들었던 생각 두 가지.


1. 돌멩이를 돈 주고 사다니 이건 이상하다!

2. 나무 쪼가리를 돈 주고 사다니 이것도 이상하다!


위에서 찍어 본 어항 모습


3일쯤 지나자 푸릇푸릇하게 싹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어항 만들기로 시작했는데 이제 농사의 즐거움까지 알게 되는 마법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아들은 연신 '엄마! 싹이 났어!'라며 신났다.

아내는 어항을 보면서 '그렇게 어항 관리가 귀찮다 어쩌다 하더니 즐기고 있으시군..'이라고 했다.

난 그저 플래티 부부와 아이들에게 보다 나은 거처를 만들어주고 싶었을 뿐인데 말이다.


씨앗 파종 후 흰 모래 위의 비닐은 벗겨 두었다
래핑해두면 습기가 조절되어 싹이 더 잘난다
아들과 돌마다 또 어항 곳곳마다 이름을 붙여줬는데, 이 돌의 이름은 무려 설악산이다. 설악산에도 씨를 뿌려놓았다.



씨앗에서 싹이 나와 푸른 정원처럼 바닥이 만들어졌다. 이제는 이끼를 감아놓은 나무와 X-윙을 배치하고 물을 붓는다. 그리고 기존 어항에 빼곡하고 풍성하게 자라던 수초들을 새 어항에 이식하기 시작했다.

물론 수초를 전부 옮겨 심지 않았다. 기존 어항에 있는 치어와 플래티 부부의 정서안정을 위해서다.


대략 큰 수초를 옮겨 심고 물을 부으니 아래와 같은 느낌이 만들어졌다.

나름 아늑해 보인다. X-윙에서 미처 내리지 못한 R2D2의 반짝이는 머리가 인상적이다.


왼쪽부터 순서대로 용의 나무, 이끼바위, 설악산, (수초가 많은 텅빈 중간부분이) 정글, 주먹바위, 새우 쉼터(바위 아래 공간)



이 상태로 며칠간 물고기가 살 수 있는 물이 될 수 있도록 놓아둔다. 중간중간 기존 어항 물도 조금씩 넣어주고 여과기도 열심히 가동하여 준다. 그리고 용감한 새우들부터 두 마리씩 이주를 시작한다.



수줍음이 많은 체리새우가 새우쉼터를 오르고 있다.
이끼바위 근처를 배회하는 노란새우, 둘 중 한마리는 얼마전 초록색으로 변색돼 초록이가 되었다.


빨간 새우와 노란 새우, 그리고 생이새우들이 모두 잘 지내는 것이 확인되어 조심스레 가오리 비파를 옮겨 주었다. 가오리 비파는 좀처럼 얼굴을 드러내지 않지만 막상 잡으려니 무척 빠르게 움직여서 당황했다.


이끼청소는 시원치 않고 이름만 비파지 실제로는 잉어과라는 가오리 비파. 소심하고 잘 놀라지만 어항의 귀여움을 맡고 있다.



그리고 마침내 플래티 부부와 치어 모두를 무사히 이주시켰다.




치어 : 엄마 아빠 초원과 대나무 숲이 마음에 쏙 들어요
플래티 엄마 : 그래, 뭐 이 정도면 제법이구나
새 어항에서 무럭무럭 자라는 치어들... 울고 싶을 땐 들어가 맘껏 울라고 기존 어항의 이끼 낀 여과재를 함께 넣어주었다.






그렇게 새 어항으로의 이사는 행복하게 마무리되었다.

어항은 제법 풍요롭고 살만한 곳이 되었다.







이렇게 텅 빈 어항(좌)이 풍성한 어항(우)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모두 행복하고 쾌적해 보이는 수중 친구들








새우쉼터를 정말로 좋아하는 생이새우들






잘먹고 잘자라서 이만큼 커버린 치어들





어두운 늪이 아니라 호수에 떠 있는 듯한 X-윙






밤이 찾아온 대고바 행성... 아니 어항, 요다가 나올것 같다.




그렇게 모두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이 나야하는데...



길고 길었던 명절 연휴... 집을 며칠 비워야 해서 천천히 녹는 고체 사료를 주고 여행을 다녀왔다.

집으로 돌아와 어항 앞에 앉으니 아들도 척하니 내 무릎에 앉는다.


'아빠 모두 잘 지내서 다행이야!'


'그러게 다들 건강해 보이는구나'


'근데 엄마 플래티 배가 다시 홀쭉해졌는데?'


좌 상단에서 빠르게 지나가는 치어!!!



(우와 치어다... 그러네 치어네...)


그렇다. 금슬 좋은 플래티 부부가 출산한 지 얼마 안 되어서 다시 치어 스무 마리를 순산한 것이었다.

게다가 새우 두 마리도 갑자기 알을 가득 배에 매달고 이곳저곳을 배회하기 시작했다.


아... 살기 좋아지면 출산율은 자연스레 느는군요. 그것이 세상의 이치군요. 생각했다.

아들은 좋아했다.

그리고 아내는 '이제 더 이상 큰 어항은 안돼요.'라고 말했다.


이제 또 어쩌나 어항 앞에 앉은 (물고기 세계의) 창조주는


다시


멍 때리기 시작했다. (끝)


<다음 글 : 뜻밖의 취미생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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