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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뮤즈노트 Mar 11. 2020

휴식보단 휴직이 필요해

휴직권장 글

회사에 휴직계를 냈다.

지난 8개월간 보직을 하며 지치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새로운 도전의 기회를 찾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기 때문이다.

마침 적절한 핑곗거리도 있었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부서를 떠나기 전, 부서원들이 꽃다발을 선물해줬다.

카톡으로 고마움과 시간 날 때 따로 커피를 마시자는 이야기들을 남겨주기도 했다.

따뜻한 사람들이다. 짧지만 정이 들었다.


휴직이 결정되고 한 의미 있는 일.

가장 먼저 소파의 위치를 바꿨다.

일반적으로 꾸며진, 거실 벽면을 바라보는 위치에 소파가 있었다.

이번엔 거실의 넓은 창을 바라보도록 방향을 정했다.

소파에 앉으면 하늘하늘 흔들리는 나뭇가지와 초록색 잎들이 보인다.

푸른 배경으로 어제처럼 빗방울이 툭툭 유리창에 내려앉는 풍경도 좋다.


거실을 정리하면서 이케아에 들러 작은 LED 전구가 달린 스탠드 등을 구매했다.

그리고 거실 한쪽 벽면에 액자와 그림 걸이 철망을 달아 아트월로 만들었다.

아이와 아내가 미술학원에서 그린 그림들을 몇 장 달아뒀다.



맞은편 벽은 빔프로젝터와 닌텐도 스위치, 스피커, 인터넷 공유기로 늘 지저분했다.

이케아의 빅함메르 서랍장을 사서 수납 정리한 후, 서랍 장위에 빔프로젝터를 올려놓았다.

근거리 프로젝터라서 각도와 높이도 적당하게 맞아떨어진다. 만족스럽다.



어제는 내 서재를 정리했다.

어쩐지 휴직을 결정하고 나서 하나둘씩 집안 정리를 해나가고 있다.

오늘은 옷장을 정리할 차례인가?


회사를 나가지 않자 묘하게 새벽에 잠이 깬다.

그 길로 나와 24시간 스터디 카페로 온다.

새벽 공기는 차지만 두터운 패딩을 입어야 할 정돈 아니다.


커피를 파는 곳이 있으면 좋으련만


어제도, 오늘도 한결같이 나와서 연구논문을 좀 쓰고

주식 투자를 위한 기업들 기사도 찾아보고

브런치에 글도 썼다.


스터디 카페의 자리 번호는 36번.

커다란 유리창이 각각 앞과 옆에 있는 코너 쪽 자리다.

새벽에 나와 있으면 서서히 갈색과 노란색, 붉은빛이 감도는 푸른 하늘로 변해가는 동녘이 보기 좋다.

바로 앞엔 버스정류장이 있어서 7시가 넘어서며 출근하는 사람들이 듬성듬성 보인다.



바쁘게 일하며 하루의 일과에 허덕이고

내일의 걱정까지 오늘 끌어안고 있던 게 전혀 실감 나지 않는다.

실감도 나지 않지만 솔직히 기억도 나지 않는다.


회사란 기억과 시간을 태우는 화력발전소 같단 생각이 든다.

소소한 에피소드를 빼면

20년 동안 딱히 기억에 남는 업무도 없고, 시간도 실감되지 않는다.


반면 대학시절 MT에 가서 옆에 앉은 친구의 목소리, 숨결

새벽 기차를 타고 돌아오며 맡던 봄의 향기

철로에 깔린 자갈의 모양까지 선명히 기억난다.  


나의 시간을 돈으로 바꾸는 것을 노동이라 부른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원리를 설명하기 위해 시간을 끌어들였다.

잉여가치를 잉여 노동에서, 잉여 노동을 노동시간에서 연역해 낸다.

시간을 금전적 가치로 매개할 수 있는 단위로 삼다니 의미심장하다.


결국 시간을 태워 돈을 벌어오는 곳이 회사라면

회사에 있는 시간의 기억도 어차피 내 것이 아니기에

하얀 재처럼 태워져 사라지거나 회사 어딘가에 보관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물론 별 것도 아닌 기억들일 테니 회사란 시스템 입장에서도

거미줄 쳐진 창고 어딘가에 툭 던져놓고 말겠지만.


그 공간에서 만났던 사람들을 떠올려본다.

주로 계약이 끝나 떠나거나 업무상 일별 했던 사람들이 떠오른다.

호감이 가서 개인적인 이야기들을 나눠보고 싶은 사람도 있었다.

시간을 돈으로 환전하는 중이었으니 그럴 겨를도 없었거니와 권장되지도 않는다.

암묵의 룰 같은 것이니 시시콜콜하게 서로의 기억에 남지 않는 편을 택한다.


내게 필요한 것은 휴직이었을까? 휴식이었을까?

회사에서의 스트레스, 난처함 등은 어쩐지 하나도 생각나지 않으니 휴식은 필요 없었던 것 아닐까

다만 시간을 환전하는 행위를 잠깐 쉬는 휴직이 필요했던 것인지도


마르크스 선생은 적어도 이런 생각에 동의해 주시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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