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때였던가 어머니께서 우스갯소린지 실화인지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명태 요리를 하면 아들에겐 늘 몸통을 주고 대가리는 엄마가 먹었더니, 장성한 아들이 명태 대가리를 좋아하시는 줄 알고 박스째 엄마에게 선물했다는 이야기였다. 어머니는 깔깔 웃으시면서 '나중에 시계를 선물하더라도 시계침이 안 보여도 상관없으니 작고 예쁜 시계를 사주렴.'이라고 말씀하셨다.
부모가 되어보니 알 것 같다. 늘 풍족하게 먹는데도 아들 밥그릇에 무슨 자석이라도 있는 것처럼 맛난 반찬은 꼭 그 앞에 끌어다 놓는다. 그러다가 '아차'한다. 예전에는 맛있는 반찬, 아랫목에 넣어둔 뚜껑 덮인 따뜻한 밥은 부모님 앞에 놓이곤 했다. 할아버지 할머니라도 계셨다면 분명 소시지나 고기반찬은 웃어른 몫이 당연했을 것이다. 그러면 '너희도 좀 먹거라.'라면서 물려주셨겠지. 따뜻한 정경이다.
그런데 이런 문화를 효나 장유유서 정도로 치부하는 게 부당하다고 생각하곤 한다. 그에 앞서 자녀의 행복한 삶을 위한 훌륭한 교육이기 때문이다.
아이가 무럭무럭 커가며 뿌듯함만큼 서운할 때도 많아진다. 맛있는 것, 좋은 것이 있을 때 아이는 늘 자신이 먼저이기 때문이다. '나는 좋은 게 있으면 아내와 아들, 가족이 먼저 생각나는 데 어쩜 저 녀석은 지 입만 생각할까?'싶다. 그런데 아이를 탓할 건 없다. 이런 행동은 교육으로 습득되기 때문이다.
가족들이 힘든 하루 일과를 마치고 귀가할 때 한 번도 나와보지 않은 아이가, 철이 들었다고 환한 웃음으로 현관에 나와 맞을 리가 있을까? '너는 어서 들어가서 공부해.'라고 말하곤 가사를 분담시켜 본 적이 없는데, 어른이 되었다고 쌓인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건조기에 넣을 리는 없다. 부모님 생일 선물은 또 어떻고.
이런 태도는 교육으로 습득된다. 부모나 웃어른을 위한 교육이 아니다. 수학 문제 한 두 개 잘 푸는 것보다 중요한, 아이의 행복한 일상을 위한 교육이기 때문이다.
힘든 회사 일을 마치고 귀가한 배우자의 찬 뺨을 따뜻하게 어루만지고 안아주는 일, 거실에 널린 빨래를 개거나 지친 가족을 대신해 요리와 설거지를 하고 분리수거가 같은 가사 분담을 물 흐르듯 해내는 습관, 생일을 기억하고 소소한 선물과 카드메시지를 두어줄 적을 줄 아는 다정한 사람이 되는 것.
사랑하는 가족을 대하는 일관된 자세는 정말 힘들다. 그것이 일상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원래 일상은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집에선 가족이 귀가할 때 중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면 나가서 맞이한다. 가볍게 안아주고 수고했다고 어깨를 두드려 준다. 이 역시 쉬워 보이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아들에겐 밥상을 닦고 치우는 일을 시킨다. 평소엔 잘하는 편이지만, 어떤 때엔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를 못 들었는지 자기 방에만 있을 때가 있다. '잘 먹었습니다.'하고 밥그릇을 치우고 먼저 방에 들어가 숙제를 하는 아들을 불러내야 할 때도 종종 있다. 그럴 때면 매 순간 고민에 빠진다.
'지금 한창 숙제를 하면서 집중하고 있을 텐데 굳이 불러 인사를 시켜야 하나.',
'밥상도 깨끗하고 닦을 것도 없는데... 옆으로 밥상 치우면 그만인데 불러낼 필요가 있나.'
밥상 닦을까 말까
힘들다. 가사에 있어서는 눈에 보이는 대로 후다닥 내가 하는 게 편하고, 딱히 뭔가 정형화된 걸 좋아하는 체질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게 잠깐의 괴로운 고민을 하다가 말한다.
'아빠 왔는데 나와서 인사해야지.',
'식사 끝났으니 밥상 닦고 정리하렴.'
아들은 '에에에'하고 심드렁할 때도 있다.
하지만 이제는 당연한 듯 '네'하고 상냥히 대답하는 편이다.
대견하다.
이주 전 주말에 회사 일로 무척 피곤해서 소파에 누워 있었다. 눈을 떠보니 아들이 곁에 와서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