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의 아니게 색채 시리즈가 계속되는 것 같은데, 이번에는 보라색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앞서 파란색과 빨간색에 대해 포스팅했지만, 사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색은 보라색이다. 보라색 중에서도 밝고 청아한 보라보다는 어둡고 깊은 톤의 버건디나 머룬 같은 자주색을 가장 좋아한다. 뭔가 색을 고를 때마다, 선택의 여지가 있다면 나는 보라색을 고르고, 버건디나 머룬이 없으면 바이올렛이라도 고르는 편이다.
보라색을 좋아한다는 말에 사람들은 가끔 "보라색 좋아하는 사람은 천재 아니면 정신이상자라던데?"라며 실눈을 뜨고 나의 정신 상태를 가늠해보려 하는 사람들이 있곤 했다. 흠, 나는 천재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현재 한국 사회 기준으로 봤을 때 정신이상자는 아닌 듯하니 이 설은 틀린 걸로 결론 내린다. 그런데도 보라색을 보면 왠지 신비롭고 귀중한 느낌이 들지 않나? 역사적으로도 왕족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신비와 유혹을 상징하는 색이었다.
미술에서의 보라색
서양미술사에서 보라색을 잘 쓴 작가로는 단연 클로드 모네를 꼽을 수 있다. 일설에 따르면 눈밭에서 사물의 그림자가 회색이나 검은색이 아닌 보라색이라는 것을 밝혀낸 것이 모네라고 한다. 햇빛이 사물에 닿는 매 순간의 색상에 관심을 가지다보니 그러한 미묘한 색상의 차이까지 다 알게 된 것이리라.
최근에 밝혀진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빈센트 반 고흐의 잘 알려진 작품 아이리스 (게티 센터 소장)는 선명한 파란색 붓꽃들이 정원에 가득 피어 있는 모습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이 붓꽃들이 원래는 보라색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적외선과 자외선 조사를 통해 작품에 남아 있던 붉은색 안료가 확인되었고, 당시 반 고흐가 머물던 인근 정원에 보라색 붓꽃이 만발했던 것이 밝혀졌다. 이 작품은 빈센트 반 고흐가 죽기 얼마 전, 스스로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던 시기에 그린 걸작 중 하나로 잘 알려져 있다.
게티 센터에서도 가장 사랑받는 작품 중 하나인 이 아이리스가 오랫동안 파란색으로만 인식되어 왔다는 점에서, 이번 발견은 놀랍다. 이는 보라색이 빨간색과 파란색의 조합으로 만들어진 색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붉은 안료가 산화되어 휘발되었고, 그 결과 파란색만 남게 된 것이다. 여전히 보라색 붓꽃을 떠올리기는 어렵지만, 이제 이 작품이 보라색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인정받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빈센트 반 고흐의 아이리스 (게티 센터 소장)는 이제 새로운 시각으로 평가될 가치가 있다.
보라색의 이중적 이미지: 귀족과 신비, 유혹의 색
자, 이제는 보라색의 역사에 대해서 알아보자.
유럽과 북미 지역에서 보라색, 혹은 자주색으로 불리는 'Purple'은 고대부터 왕실과 귀족, 종교적인 신성함을 상징하는 색으로 자리 잡았다. 반면, 보라색이 핑크와 함께 등장하면 묘하게 에로틱하고 유혹적인 분위기를 풍기기도 한다. 보라색이라는 색이 주는 이중적인 이미지 덕분에 그 사용 범위와 의미도 다양하다.
보라색의 역사적 상징성: 왕실과 교회
서양에서 보라색, 특히 자주색은 왕실을 상징하는 색이었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자주색 염료를 만드는 것이 매우 어려웠고, 그만큼 가격도 무척 비쌌기 때문이다. 자주색은 비잔틴 제국과 신성로마제국을 통틀어 통치자들이 입는 의상 색상이었고, 로마 가톨릭의 고위 성직자들의 의상 색상이기도 했다. 일본에서도 자주색은 귀족의 상징이었고, 그 덕에 '로열 퍼플(Royal Purple)'이라는 표현이 생겼다.
Royal Purple - 보라색은 아무나 입는게 아니야~
보라색, 조금 더 세부적으로는 자주색의 보편적 이미지가 왕실을 연상시키는 데에는 서양에서는 역사적 유래가 깊다. 비잔틴과 신성로마제국 때 통치자들은 물론 로마 카톨릭의 교주들의 의상의 색상이기도 했다. 라벤나의 산 비탈레 성당의 모자이크를 보면,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겉옷은 자주색이다. 컴퓨터 화면의 해상도에 따라 그리고 오랜 세월에 걸친 먼지 탓에 어떤 때엔 갈색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원래는 자주색이다. 그리고 이 자주색은 왕족의 상징이었다. 이렇게 자주색은 왕실의 상징으로서 오랜 시간 동안 사용되어 왔다.
그렇다면, 보라색은 왕실 전용의 색상이 되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보라색 염료의 색상을 만들기가 어렵고 따라서 가격이 무지무지 비쌌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왕족이 아니면서 자주색 옷을 함부로 입었다가는 대역죄에 해당하는 벌을 받았다고도 하니 요새 태어나서 정말 다행이다 싶다.
엘리자베스 여왕과 보라색
영국을 너무 사랑하여 영국과 결혼하느라 처녀 여왕으로 지냈다고 칭송을 받는 대영제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은 사실은 '나보다 예쁜 애들 다 꺼져!'라는 정책을 펴신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자신만 화려한 옷을 입고, 다른 여인들은 모두 수수한 색상의 옷 만을 입게 했다고 한다. 이 당시에도 보라색을 함부로 입었다간 아주 큰 벌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무찌른 기념으로 그려진 엘리자베스 여왕 1세의 초상화이다. 배경에는 스페인의 아르마다 함대와 싸우는 모습이 그려져 있어서 아르마다 초상화라고도 불리는 이 초상화에는 갖가지 상징으로 채워져 있다. 아래는 그러한 여왕의 권위에 걸맞게 로얄 퍼플색 드레스를 입고 있는 모습을 그렸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은 다른 여인들이 자신의 존재감을 압도하지 못하도록 보라색 같은 화려한 색상을 입지 못하게 했다. 이 시대에는 보라색을 입는 것 자체가 엄청난 특권이자 권력의 상징이었기 때문에, 여왕의 통제는 곧 그녀의 권력을 유지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짙은 보라색 드레스를 입은 모습을 담은 1998년 영화 엘리자베스의 한 장면은 그 상징성을 잘 보여준다.
2022년 타계하신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역시 보라색 코트를 입은 모습이 자주 언론에 보도되고는 했는데, 이는 보라색이 왕족에게 어울리는 색으로 자리 잡았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준다.
뿔소라에서 채취한 자주색 염료
보라색 염료는 주로 '볼리누스 브랜다리스(Bolinus brandaris)'라는 뿔소라에서 채취했다. 이 조개는 'Purple Dye Murex' 또는 'The Spiny Dye-Murex'로도 불린다. 조개 하나에서 채취할 수 있는 보라색 염료의 양은 정말 개미 눈물만큼 밖에 안되었다고 한다. 게다가 채취방법도 까다롭기에 엄청난 노동량이 필요했다고 한다. 그러니 염료의 가격이 비쌀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결국 이 때문에 자주색은 왕족과 귀족만 입을 수 있는 고귀한 색상이 되었다. 요새도 해안가에 이 뿔소라 껍질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곳도 있다하니, 이 조개로서는 체액의 색상이 인간들 눈에 예뻐보인다는 이유만으로 대량학살을 당해왔던 셈이다.
한편 멕시코 인들은 조개를 죽이지 않고도 자주색 염료를 채취할 수 있는 방법을 고안했다고 알려져있다. 그들은 뿔소라를 포획해서 죽이는 대신, 이들을 천 위에 놓고 바람을 불어넣어 조개가 스스로 체액을 짜내도록 했다. 이 체액이 점차 천에 스며들어 자연스레 염색이 되도록 한 것이다. 이렇게 염색이 완전히 끝나면 조개를 바다로 돌려보내며, 산란기에는 이러한 염색 작업조차 금지했다고 한다. 이러한 방식 덕분에 뿔소라는 멸종을 피할 수 있었다고 하니, 고대 멕시코인들은 자연과의 공존을 잘 알고 있었던 셈이다. (물론, 태양신 신앙에서 태양의 신을 더 오래 살리기 위해 살아있는 인간의 심장을 꺼내 바치며 제사를 지낸 것에 대해서는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말이다.)
자연에서 얻은 보라색의 다양한 원천
자연에서 얻을 수 있는 보라색 염료는 뿔소라뿐만이 아니다. 슈퍼푸드로 알려진 블루베리, 블랙베리, 라즈베리 같은 베리류나 나무 껍질, 체리나무의 뿌리에서도 자주색 염료를 추출할 수 있다. 자연이 얼마나 풍부한 색감을 지니고 있는지 새삼 깨닫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