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방관일지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비정 May 31. 2023

편의점처럼 살고 싶다

방관일지 EP.5

    컵라면을 먹을 때면 이따금씩 예전 생각이 떠올랐다. 꼬깃한 지폐 몇 장을 쥐고 학원 뒤 골목가로 들어가던 고등학생의 나. 하루도 빠짐없이 같은 길을 밟았다. 45도 경사의 좁은 비탈길. 낡은 건물 앞에 빼곡하게 주차되어 있는 큼직한 차들. 쓸쓸하게 홀로 삐걱이는 그네를 품은 작은 놀이터. 옴팡 풍겨오는 음식물 쓰레기 냄새에 미간을 잠시 찌푸리며 나아가면 어느새 목적지에 도달해 있었다. 혼잡한 골목길에는 어울리지 않을 만큼 푸른 간판을 뽐내고 있던 편의점. 편의점은 식사를 해결할 수 있고, 더위를 피할 수도 있으며, 날이 갈수록 오르는 물가를 체감할 수 있는 작은 시장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편의점 좌석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며 라면 먹는 걸 즐겼다. 라면을 오물오물 씹으며 창밖을 보는 건 내가 부릴 수 있는 최선의 여유였다. 어릴 때 편의점만 오면 눈을 반짝이며 이것저것 사고 싶은 걸 집던 어린아이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나는 그저 빛바랜 눈동자로 멍하니 밖을 바라보는 방관자였다. 입안 가득 면을 밀어 넣으면 조금 더 대단한 방관자라도 되는 듯했었다. 이따금씩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손님들과 눈이 마주치기도 했었다. 늘 그렇듯 별 관심은 없었다. 다만 거울에 비친 손님들의 모습이 보였기에 가끔씩 시선을 돌리긴 했었다. 그마저도 잠시 뿐이지만.


    차라리 확실한 번아웃이라도 오길 바랐다. 열정은 나를 갉아먹는 독이었다. 어떻게든 내성을 만들어 보겠다고 품어봐도 늘 아플 뿐이었다. 좌절할 순간조차 없었다. 좌절에 빠지면 무언가를 다시 잃어야 한다는 상실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내겐 아무런 색도 보이지 않았다. 예전엔 이 세상 모든 것이 색을 잃었는 줄 알았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색을 잃었던 건 나뿐이었던 거 같다. 나만 멈춰서 세상을 바라보는데 다들 어찌 그리 잘도 움직였을까. 하늘을 멍하니 바라봐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하늘이랑 가장 가깝다고 생각한 곳에서 바닥을 내려다봐도 출구는 보이지 않았다. 정말 작은 비상구 하나라도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나는 늘 잿빛 생각의 고리에 온정신을 적셔두고 있었다. 


    왜 나는 이토록 무능력할까.


    처음엔 무능력한 나 자신에게 자조적인 태도를 취했다. 아무리 손을 뻗어도 잡을 수 없다는 무력감. 


    아니야 날 이렇게 만든 세상이 문제야.


    다음으로 세상을 탓했다. 세상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고, 세상이 내게서 모든 걸 앗아갔다고 생각했다. 


    그래 내 잘못은 없어. 


    합리화도 해봤다. 나는 아무 잘못이 없는데 상황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고.


    사실 알고 있잖아. 문제는 나한테 있다는 거.


    그리고 솔직한 나를 마주했다. 내가 조금 더 능력이 있었다면. 내가 조금 더 노력을 했었더라면. 내가 조금 더 괜찮은 사람이었다면. 내가 조금 더 좋은 사람이었다면. 


    그래 해보자. 내가 주변을 챙길 수 있는 사람이 된다면. 내가 모든 걸 해낼 수 있는 사람이 된다면. 내가 좋은 사람이 된다면.


    우울 속에서 원동력을 얻곤 했다. 목표는 늘 이렇게 생겼다. 그리고 그 목표가 아득해질 때쯤에 다시 나의 무능력을 탓했다. 끊임없는 생각의 굴레 속에, 어느 순간 자의식 과잉에 빠졌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여기까지의 과정은 고작 3분 만에 완성되는 컵라면이 식기도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가장 힘든 건, 짧은 순간 스친 이런 생각들을 라면과 함께 삼키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사람들 앞에서 웃어야 했던 것이었다. 나는 이제 내가 왜 힘든지도 모르는 지경에 이르렀다. 아픈 걸 아프다고 말하지 못해서. 슬픈 걸 슬프다고 말하지 못해서. 힘든 걸 힘들다고 말하지 못해서. 

    편의점에서 라면을 먹다 보면 종종 어린아이들이 부모님과 함께 방문하는 경우도 있었다. 아이들은 바쁘게 뛰어다니며 여기저기 원하는 물건들을 집었다. 당연히 아이들의 노력은 무시받았고, 아이들은 물건을 한껏 끌어안은 채 주저앉아 엉엉 울어버렸다. 그럴 때면 생각했다. 나도 저렇게 울 수 있을까. 


    편의점처럼 살고 싶었다. 재고가 가득 들어오면 속을 풍성하게 채우고, 꽉 채운 진열장의 물건이 다 떨어지면 또 새로운 물건을 채울 수 있는 그런. 유통기한이 지나 폐기처리 시간이 되면 전부 치워버릴 수 있는 그런 삶. 내 마음에도 청소가 필요했다. 좋은 경험과 긍정적인 생각들로 나를 가득 채우고, 가득 찬 생각이 검게 변하면 폐기 후에 새로 좋은 걸 바라볼 수 있는 나. 많은 걸 바라지 않았다. 그저 눈앞에 펼쳐진 거리에 물감 한 방울이 톡 떨어졌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무채색으로 보는 건 이제 지겨우니깐. 

    언젠가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너는 항상 이성적이고 객관적으로 바라보려 해. 늘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상황을 마주 해. 그런 네가 좋아.

    나는 이성적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거울 속 나를 바라보며 멋쩍은 미소를 지어 보일 때도 답은 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혐오스럽게 변한 회색빛 눈동자는 꽝꽝 얼어 있었다. 

    어제의 나는 내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내일의 나는 내가 불행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오늘의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는 건 그 탓일까. 




    그냥 나는 24시간 열려 있는 편의점처럼 살고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지난여름에 녹아내린 골판지가 미친 듯이 그리울 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