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치(且置)
1. 내버려 두고 문제 삼지 아니함
인사가 많이 늦었습니다.
그동안 간간이 소식은 건네 들었으나 마땅히 물었어야 했던 안부는 차마 묻지 못했습니다.
변명을 하자면,
당신의 승진 소식을 들었을 때 연락을 하지 못한 건 '전화를 할까, 말까' 고민만 하다가 타이밍을 놓쳐버렸기 때문입니다. '내가 뭐라고, 내가 아니어도 축하받느라 정신없을 거라고' 넘겨짚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가족을 먼저 하늘로 보냈다는 슬픈 소식을 뒤늦게 들었을 때는 제 머릿속에 떠오르는 어떤 말도 '함부로'인 것 같아 결국 침묵을 택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보니 모든 걸 차치하고 제 자격지심이자 비겁한 회피였던 것 같습니다.
많이 후회했고 죄송했습니다.
4년 정도 되었던가요.
우리가 이렇게 다시 술잔을 기울이게 되기까지 당신에게도 제게도 참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무심한 시간들 속에 당신에게 다정한 사람들과 영광스러운 사건들도 있었겠지만,
폐부를 찌르는 것처럼 아픔을 주는 이들과 바닥을 기듯 모욕적인 순간들도 있었겠죠.
그 길고 긴 터널을 지나 이렇게 다시 마주 앉으니 당신도 참 많이 부드러워졌습니다.
지난 4년간 인생의 정점과 바닥을 모두 겪어보았다는 당신 앞에 숙연해집니다.
허공을 보는 듯 하지만 지나왔던 시간들을 꿰뚫어 보며 토해내는 당신 말이 모두 맞습니다.
우리들이 그때 죽어라 하던 모든 일들은 신기루가 되어 아무것도 남은 것 같기도 합니다.
그동안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았나?'라는 공허한 질문을 수천 번, 수만 번
스스로에게 던져 깎이고 깎인 당신이 얻어낸 답이 결국 무의미라는 게 너무 씁쓸합니다.
그래도 저는,
그것만이 내 세상인 것처럼 온 힘을 다해 지켜내려고 했던 우리들의 모습을 저는 여전히 그리워합니다.
때로는 어리석을 정도로 우직한 믿음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바꾸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당신의 모습이었고, 제가 생각하는 어른의 책무이기도 합니다.
아닌 건 아니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자신감과 틀린 건 깔끔하게 인정하고 과감하게 변화하는 용기를 저는 기억합니다.
위에서 군림하기보다는 앞에서 이끌려고 했던 마음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 시간들과 기억들이 있으니 오늘의 이 자리를 진심으로 반가워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가슴의 대못이 박힌 것 같다는 당신에게 저는 작은 위로도 될 수 없겠지만 그래도 언젠가 제가 당신을 정말 좋은 동료이자 인생 선배라고 생각한다는 걸 이야기할 날이 오면 멋쩍게 기뻐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너무 늦지 않게,
당신이 제2의 인생을 시작할 때,
당신의 상처가 조금이라도 더 흐릿해질 때 다시 한번 오겠습니다.
이번에는 그럴 여유가 없었지만 그때가 되면 제가 당신에게 타드리곤 했던 황금 비율의 커피를 다시 한번 건네고 싶습니다. 그때까지 항상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옛 동료가
사진: Unsplash의 Quaid Lag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