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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닥노닥 Nov 16. 2024

아직은 가을, 아득한 겨울

내 일상대로 국어사전

아득하다

1. 보이는 것이나 들리는 것이 희미하고 매우 멀다

2. 까마득히 오래되다

3. 정신이 흐려진 상태이다.

4.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라 막막하다


이곳에 미련이라도 남은 것처럼 올해의 가을은 오래 우리 곁에 남아있다.

붉은빛의 단풍과 노란빛의 은행잎, 그 사이 주렁주렁 열린 주홍빛의 감

군데군데 파란 하늘을 떠받치는 초록의 소나무

흘러가는 시침과 함께 찾아오는 남색의 밤, 다음날 다시 찾아오는 보랏빛의 아득한 새벽녘.

여름이 비 온 뒤 가지런한 선처럼 남는 무지개라면,

가을은 선명한 색들이 뭉게뭉게 꽃다발처럼 피어나는 무지개였다.


사람들은 꾸역꾸역 밀려서라도 게으른 가을의 정취를 느끼러 분주히 움직였다.

흔치 않은 계절의 머묾이 신의 호의라는 것을 모르지 않기에,

창문을 내린 채 차의 시동을 끄고 가만히 앉아 쇄쇄 샛노랗게 물결치는 은행잎들을 바라보았다.

그칠 줄 모르는 가을과 달리 나는 아직 오지도 않은 겨울의 한복판에 서서 서서히 식어갔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훌륭한 부모 아래에서 기어이 못나게 자라 버린 난 몸에 자라난 가시들을 숨기려 부단히 노력했지만,

엉성한 노력으로 감춰지지 못한 아둔함은 끝내 좋은 사람을 아프게 밀어내고야 말았다.

상대방에게 상처를 준 일이 내 잘못임을 모르지 않기에,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빠삐용(Papillon)을 뒤로하고 자신의 동굴로 돌아가는 드가(Dega)처럼 묵묵히 지옥으로 향했다.

이건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빽빽한 안갯속에서 피어나는 새소리에 고요한 적막은 새가 알을 깨치고 나오듯 천천히 부서지었다.

평화로운 계절의 정경과 달리 나는 뭉게뭉게 피어난 안개를 헤치며 달려도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간의 반성들이 무색하게 마주해 버린 상처받은 이의 눈을 보고 고개를 떨구었다.

달라지려고 노력했던 내 용기가 멋쩍어질 만큼 다시 돌아온 긴긴밤을 고개 들어 바라본다.

눈물쯤이야 이제는 잠결에 헝클어진 머리카락처럼 당연해졌다고 생각했었다.

결국 제자리구나. 선고를 받은 것 같이 남은 삶이 아득해졌다.


사진: UnsplashElke Bürg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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