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
많은 경우 두려움에서 자유롭지 못한 이유는 '주저앉은 생각'에 있다. 지나치게 많은 걱정을 한다. 걱정은 현재의 상황이 지속될 거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걱정할수록 상황이 악화되는 암울한 미래만 떠올린다. 예를 들어, 지금 가난하니까 평생 가난할 거라 믿고, 미리 걱정하는 것과 같다. 문장으로만 접하면 어리석음 그 자체인데, 이와 같은 우를 자주 범하곤 한다. 지금의 비참함과 암울한 미래, 부족한 것들에 집중하느라 앞날들도 지금과 다를 바 없을 거라고 착각하게 된다. 지금의 만족스럽지 않은 오늘이 매일 반복될 것 같은 두려움이 엄습해오기도 한다. 평생 이렇게 살까 두려워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현실은 그럴지 몰라도, 이는 사실이 아니다. 단지 느낌일 뿐이다. 느낌은 실재와 다르다는 점을 분명히 의식해야 한다.
경험적으로 알다시피 두렵게 만드는 원인은 다양하다. 만족스럽지 않은 결과, 실패로 인한 좌절, 꺾인 희망, 짓밟힌 자존심, 끝인 것처럼 보이는 절망, 사람들의 시선, 기댈 곳 없는 외로움,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는 막막함, 혼자 뒤쳐진 것 같은 우울함, 환경에 대한 원망 등 여러 이유들은 두려움으로 연결된다. 그리고 두려움은 다시 여러 감정을 촉발한다. 원인이 결과가 되고, 결과가 다시 원인으로 작용한다. 두려움이 또 다른 두려움을 낳는 것이다. 이런 악순환의 꼬리를 끊는 방법은 단순하다. 순간들을 기록하고 두려움을 인정하는 것이다. 걱정하면서 두려움을 붙잡는 것이 아니라 지금이라는 현재를 붙잡는 것이다. 두려움은 막연한 상상을 먹고 자란다는 것을 잊지 말자.
두려움을 인정한다는 것은 굴복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직면하는 용기라 말할 수 있다. 이런 말이 있지 않은가. "인정하면 편해." 그렇다. 인정하면 비교적 편해지는 게, 두려움이다. 인정하는 순간 한층 더 냉정하게 두려움의 실체를 마주할 용기가 생긴다. 두려워하는 이유와 자신을 살펴볼 시간을 확보하는 것이다. 두려움을 인정하는 것은 그 실체를 알아가기 위한 첫걸음이다. 주저앉은 생각을 일으켜 세우는 단계이다. 어떻게 할지 스스로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상상만 하던 두려움의 실루엣을 그려보는 작업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살면서 두려움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얼마나 될까?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우리를 주눅 들게 만드는 두려움을 왜 알아보려 하지 않았을까? 그 이유는 두려움을 생각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혹은 사는 것 자체만으로도 버거워서 생각해 볼 겨를이 없었을 수도 있다. 대개 두려움은 느껴지는 것이고, 감정의 영역이기 때문에 넘어갔을 수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두려움은 언제나 무지에서 샘솟는다"고 말했던 랄프 왈도 에머슨의 말을 기억하자. 여기에서 두려움은 통제 가능하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핵심은 '통제할 수 있다'는 데 있다.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것과는 다르다. 두려움은 그림자와 같아서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두려움의 크기는 통제할 수 있다. 지금을 명확히 보려는 용기가 두려움이 성장하는 것을 억제한다. 냉소와 비관하는 것은 쉽다. 쉬울수록 두려움은 무럭무럭 자라난다. 반대로 지금보다 나아지기 위한 분투와 기록은 울타리를 치는 작업과 같다. 두려움의 영역을 한정짓는 것이다.
또한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자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두려움 역시 생존 욕구, 성취 욕구, 인정 욕구, 안정 욕구와 같은 욕구들에게 비롯된 하나의 감정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두려움은 그 자체로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다만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달라질 뿐이다.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도 있고, 부정적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두려움을 인정할 것인가, 두려움에 사로잡혀 벌벌 떨지는 전적으로 본인에게 달려 있다. 동시에 두려움은 폭군이 될 수도 있고, 충신이 될 수도 있다. 두려움이 우리를 지배하느냐, 우리를 위해 일하느냐는 두려움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달려 있다.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에 따라 관계는 달라진다. 결론을 말하자면, 두려움은 관리할 수 있다.
우리가 두려움을 안 좋게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언어 속에 녹아든 부정적인 이미지가 크게 작용하는 탓이다. '안 좋은 것'이라고 규정하니 두려움 자체를 회피하는 것이다. 피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직면하지 않는다. 그저 시간이 약이라며 외면하거나 잊기 위한 이런저런 방법을 찾는다. 하지만 두려움은 감정의 영역이라서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활용할지 고심하는 게 현명하지 않을까. 두려움은 양파와 비슷하다. 까면 깔수록 점점 작아지는 양파처럼, 두려움에 대해 알면 알수록 두려움은 감정의 일부분임을 알게 된다. 한 겹 한 겹 층을 이룬 양파처럼 한층 한층 막연한 생각이 두려움의 크기였음을 발견하게 된다. 두려움의 크기는 막연함에 의해 결정되는 셈이다. 껍질을 벗기고 손질을 해야 재료로 쓸 수 있는 양파처럼, 두려움 역시 다룰 줄 알아야 인생의 재료로 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