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그렇다면 읽기는 보는 것을 통해서만 가능할까? 아니다. 읽기는 시각적인 영역에 국한되지 않는다. 읽기는 본질적으로 겉으로 드러난 현상에서 숨은 메시지를 파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듣기를 통해서도 읽기는 가능하다. 단지 눈으로 보고 듣는 것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시간이 적을 뿐이다. 생각해보면 많은 경우 듣는 것만으로도 상황을 읽어 왔음을 떠올릴 수 있다. 부모님이 싸운 뒤 설거지를 할 때면 평소와 다르게 들리는 그릇소리에서 감정을 읽을 수 있다. 문을 세게 닫는 행동에서도 감정 상태를 파악할 수 있다. 또한 직접 눈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감정 실린 목소리에서도 충분히 어떤 감정상태인지 헤아려볼 수 있다. 통화 중에도 평소와 다른 목소리와 억양에서 감정의 변화를 읽고 "무슨 일 있어? 평소와 다른 것 같아"라고 물어보는 것도 하나의 사례일 것이다. 일처리를 하는 것에서도 통화로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것처럼, 직접 확인하지 않아도 상황을 읽는 것은 가능하다.
다들 알다시피, 세종대왕이 창제한 한글이 통용되기 전에는 중국의 글자인 한문을 알아야 글을 읽을 수 있었다. 먹고 살기에도 힘에 부친 백성들은 글을 배우고 익힐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여건이 허락되지 않았다. 사극 드라마에서 자주 등장하는 장면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조정에서 공문이 내려오면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 읽어주는 장면이다. 누군가 읽어줄 때, 그에 따른 반응들을 볼 수 있다. 현대 사회에서 글자를 모르면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싶지만, 당시 사람들은 살아갔다. 눈으로 읽지는 못해도 살아갈 수 있었다. 직접 읽지 못해 누군가 읽어줘야 하는 불편함은 있었지만 생활하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듣는 것만으로도 파악할 수 있었고, 글은 몰라도 사람들과 소통하며 살아가는 것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많은 것을 들으며 살아간다. 정확히는 들을 수밖에 없는 게 정확하지 않을까 싶지만 말이다. 하루만 해도 알람 소리부터 시작해 대화를 나누거나 음악을 듣는 것에 이르기까지 다채롭다. 자의적이든 타의적이든 많고 다양한 소리를 들으며 살아간다. 이외에도 비 내리는 소리, 천둥 치는 소리, 물 흐르는 소리, 바람 부는 소리, 고양이들끼리 싸우는 소리, 개가 짖는 소리 등 우리 주변에는 다양한 소리가 존재한다. 현상과 존재가 있기에 소리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소리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수많은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소리에 집중하지 않는다. 들리지만 모든 소리에 매순간 깊게 생각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빗방울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면 "비가 오는 구나"하고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할지 생각한다. 비 내리는 소리가 좋은 사람은 창문을 열고 비오는 소리를 듣는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낯선 소리를 듣게 되면 다른 반응이 나타난다. 평소와 다른 소리는 상황에 집중하게 만든다. 비가 억세게 쏟아지고 바람이 강하게 부는 날, 유리 깨지는 소리가 들린다면 평소처럼 행동할 수 없을 것이다. 듣고 가만히 있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듣는 것만으로도 유리창이 깨졌음을 직감했기에 확인 후 조치를 취할 것이다.
그렇다면 듣는 것만으로도 유리창이 깨졌음을 알 수 있는 걸까? 그것은 유리 깨지는 소리를 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평소와 다른 목소리에서 감정을 읽을 수 있는 이유 역시도 감정에 대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평소와 다른 말투와 목소리의 차이를 구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억 속에 있는 평소에 듣던 패턴의 소리가 아님을 대조하기 때문이다. 글자를 몰라도 살아갈 수 있었던 이유 역시 사람은 경험을 통해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생활해왔던 시간들이 삶을 이어가게 만든 것이다. 글자를 모를 뿐 말을 모르는 게 아니기 때문에 살아갈 수 있었다. 말을 들어주는 주위 사람들이 있었기에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외에도 시각장애인들은 점자를 통해 세상을 읽는다. 이를 통해 정보와 지식을 습득한다. 이렇게 배운 정보와 지식이 살아가는 데 도움을 준다. 눈이 아니라 뇌가 점자를 읽기에 가능한 일이다. 눈이 보이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는 이유이다. 불편한 건 사실이지만 읽을 수 있기에 생활할 수는 있다. 손끝으로 들어오는 미세한 차이를 뇌가 해석하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에 반해, 점자에 대해 모르는 사람들은 점자를 볼 수는 있지만 읽을 수는 없다. 배우지 않는 한 읽을 수 없다. 비슷한 원리로 시각장애인들은 수화를 통해 세상을 읽으며 약속된 언어로 세상을 살아간다. 들을 수는 없지만 수화 덕분에 배우고 생활할 수는 있다. 수화 역시 배우지 않으면 볼 수 있지만 읽을 수는 없다. 수화 역시 약속된 언어이기 때문이다. 두 눈으로 볼 수 있음에도 이해가 불가능한 이유는 뇌가 읽는 역할을 담당하기 때문이다. 눈은 읽는 주체가 아니라 통로라는 것이다. 글자를 몰라도, 보이지 않아도, 들리지 않아도 읽을 수 있는 이유는 뇌가 읽는 작업을 수행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