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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이리얼트립 Jul 01. 2021

[김세진] 섬살이 10년, 서울보다 육지가 입에 익다

북스테이 '초' 사장

북스테이 '초' 사장

섬살이 십 년 차, 어느 결에 ‘서울’보다 ‘육지’가 입에 익었습니다.


제주에서 가볼 만한 곳을 추천해달라는 질문은 줄잡아 295번 정도 받은 것 같다. 해가 지날수록 그 답은 짧고 간결해진다. “여기 가보시고, 저기도 시간 되시면... 참, 거긴 일몰이 좋아요.”


칠팔 년이 지난 다음부터는 슬쩍 웃으며 대꾸한다. “어디가 좋을까요? 어디든, 가보세요.”


제주에서도 척박한 기후와 환경 탓에 살기가 제법 팍팍하다는 동쪽 바닷가에 살다 보니, 말에도 행동에도 군더더기가 빠져간다. 그러니까, 저 말은 진심이다.


그래도 한 가지 팁을 얹으면, 몇 번을 가더라도 질리지 않을 곳을 찾아보자. 줄을 서가며 기다려야 ‘인생 사진’ 한 장 찍을 수 있는 명소보다는 한 시간이든 두 시간이든 오롯이 누릴 수 있는 공간, 찬찬히 들여다보아야 멋이 보이는 장소 말이다.

✈ 프로젝트 <나다운 진짜 제주>는 나답게 제주도를 경험하고 있는 제주 로컬 8인에게서 영감을 얻었어요. 마이리얼트립은 여행자가 제주에서 나다움을 실현하길 바라요. 소수만 알고 있는 제주의 가장 깊은 곳을 향해 여행하려 해요. 우리가 소개할 가장 제주다운 동네, 작은 가게, 숨은 풍경이 여행자의 마음에 쏙 들었으면 좋겠어요. 훗날 마음에 담아둔 제주 곳곳에서 “나다운 진짜 여행”을 할 수 있을 거예요.


1. 섬세하고 정성스럽게 내린 커피를 마실 수 있는 곳, 오리프

제주에 내려올 때 가장 큰 걱정거리는 좋은 커피집의 부재였다. 일로, 취미로 커피와 함께였기에 그 상실감은 생각보다 컸다. 입도하고 한 동안은 광화문, 상수동, 연남동, 곳곳에 포진한 단골 카페가 생각나 몸살을 앓았더랬다. 5년 정도는 자급자족으로 근근하게 버텨왔지만 갈수록 ‘남타커(남이 타주는 커피)’가 그리워졌다. 고가의 로스터기는 들일 돈도, 공간도 없었기에 마당에 불을 피우고 프라이팬에 콩을 볶아 내려 마셨다. 장작불로는 화력 조절이 어려워 숯처럼 새카맣게 타버린 콩이 늘상 중간중간 섞여있었다. 혀가 아린 쓴맛은 제아무리 맛있는 우유로 덮어도 그대로였다. 온도와 습도가 잘 유지되는 로스팅룸에서 안정된 퀄리티로 볶아낸 원두가 절실했다.


2015년 무렵부터 한두 군데씩 자체 로스팅을 하는 카페도 생겼고, 육지에서 좋은 원두를 납품받거나 셀렉트해서 내려주는 브루잉바도 등장하기 시작했다. 왕복 두 시간이 걸리는 제주시까지 나가는 일은 한 달에 몇 번 안 되지만, 무슨 핑계를 만들어서든 단골 카페 한 군데 정도는 들르려고 노력한다.


좋은 안목을 가진 주인이 정성껏 내린 커피 한 잔에 담긴 여운은 입안은 물론, 온몸에 오래도록 남는다. 내가 사는 동네에는 젊은이가 거의 없다. 초반에 청년회 모임에 참석했는데 모두 육십 세가 넘은 분들이라 정말로 깜짝 놀랐다. 이 동네에서 나는 어린이란 말인가. 그렇다 보니 커피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눌 상대도 마땅치 않다.

디저트가 맛있는 카페는 바라지도 않아, 그냥 조용히 커피 한 잔을 만족하며 마실 수 있는 곳이면 좋겠네, 가까운 곳에 말이야. 늙은이처럼 불만을 토로하는 내게 옆 동네 친구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미와 가세요, 미와.”


구좌읍 세화리의 미와는 이미 제법 유명한 케이크 가게였다. 케이크는 그닥 좋아하는 편이 아니지만 이 집의 생크림케이크와 캐러멜솔티케이크는 입에 착착 붙었다. 그 미와의 사장님이 몇 달 전, 남원읍에 오리프라는 이름으로 카페를 오픈했다. 묵묵한 척, 하지만 섬세하게 접객하시는 사장님, 커피에 대해 몇 시간이고 대화할 수 있는 실력 있는 바리스타가 있는 곳이다. 라마르조꼬 머신으로 잘 세팅해서 추출한 에스프레소로 만든 플랫화이트, 블렌딩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서 마실 수 있는 아메리카노. 어느 것 하나 빠지는 메뉴가 없다. 포토존이 많은 카페로도 유명하지만, 커피 애호가라면 지나가는 길에라도 들러볼 만하다. 카운터에 몸을 기대고 슬쩍 질문을 던져보자. “여긴 어떤 원두 쓰세요?”

10:00~17:00 ┃ 목요일 휴무
인스타그램 @oh___leaf



2. 길 위에서 만나는 제주, 한가로운 신천리 산책길

굳이 산책길이라고 명명하기에도 민망하다. 열 걸음마다 포토존이 나타나야 환호성을 지르는 사람이라면 ‘이건 그냥 길이잖아!’ 할 수도 있겠다. 언뜻 보기에는 잡목과 귤밭이 번갈아가며 나타나는, 흔한 제주의 시골길이다. 신천리 벽화마을은 마을사업이라 언론에도 여러 번 보도되었고, 여행업체에서도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소개하는 곳이다. 그 때문인지 종종 미니버스 한 대에서 우르르 내린 관광객들이 벽화 앞에서 포즈 취하는 모습들이 보인다.


신천리뿐은 아니다. 제주의 마을, 특히 땅의 기운이 강한 바닷가나 산과 접한 곳에는 본향당이라는 것이 있다. 마을에서 공동으로 모시는 일종의 사당 같은 곳이다. 지나다니는 길에 쉽게 보이는 본향당도 있고, 외부인들은 잘 모르는 곳에 숨어있는 본향당도 있다. 신천리의 본향당은 이 산책길에서 조금 비껴간 곳, 우거진 잡목으로 둘러싸여 한낮에도 어둑한 곳에 자리 잡고 있다. 


현씨일월당이라는 이름에서 추측할 수 있듯, 현씨 성을 가진 사람을 기리는 당이다. 양반집 규수였던 현씨 아가씨가 원인 모를 병을 앓았는데, 신내림을 받아야 쾌차할 수 있다고 했다. 모두가 반대할 때, 여동생을 가엾게 여긴 오라비가 무복이라도 얻어와 입히겠다며 육지로 나갔다. 돌아오는 남원 앞바다에서 배가 난파되어 오라비는 수장되었고, 낙심한 여동생도 바다에 몸을 던졌다. 둘의 넋을 기리는 곳이 신천리 본향당이다. 제일 큰 당나무에는 하루도 빠짐없이 오색 고운 한복을 감아둔다. 

본향당으로 가는 길목에는 천미연대가 있다. 바다를 감시하던 돌탑으로, 봉화를 올리는 곳이기도 했다. 두 군데를 지나는 길은 신천리 포구까지 죽 이어진다. 이른 새벽 포구까지 걸어가면 고기잡이 어선들이 들어오는데, 운이 좋은 날에는 잡어를 잔뜩 얻기도 한다.



3. 제주도라고 다 같은 고기가 아니랍니다, 대성식육점

제주에서 돼지고기는 어지간하면 맛있지,라고 생각하겠지만 질 낮은 고기를 비싸게 파는 곳도 당연히 있다. 어느 동네 건 하나로마트 정육코너는 기본 이상은 한다. 부위별 고기도 다양하게 있고, 선도는 A급 이상이다. ‘표선 사람이면 대성에서 고기 한 번도 안 끊은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끊은 사람은 없다’라는 말은 내가 만들었지만, 동네 사람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도 수긍할 게 분명하다.

정해진 날마다 들어오는 돼지는 아저씨가 직접 해체하신다. 판매는 아주머니가 맡아하시는데 필요한 특수부위, 하려는 음식, 어떤 것을 이야기해도 척척 꺼내 썰어 주신다. 점심이 지나면 식육점 밖에 걸린 큰 솥에서 아강발을 삶는다. 잘 삶아 노릇해진 아강발이 나올 때쯤부터는 일과 후 들이킬 막걸리 한 사발에 곁들일 안주를 찾는 사람들이 쉼 없이 들어온다. 


십 년 전에도, 오 년 전에도, 오늘도 한결같은 말투와 낯빛으로 물으신다. “고기 어떤 거 줄까?”

삼겹, 목살 반반씩 섞어서 사만원요. 찌개 할 고기도 만원요.


육지로 보낼 육고기는 진공포장 후 택배 발송도 된다. 

☎ 064-787-3040



4. 신산리 해안도로와 만물에서 더운 여름 날리기

신산은 바로 옆 동네, 차로 오 분 거리다. 우리 동네인 신천리 포구도 산책길이나 낚시터로는 좋지만, 급히 물에 들어가고 싶은 찌는 날에는 신산리로 달려간다. 신산-온평으로 이어지는 해안도로에서 일몰과 일출을 바라보면 가슴이 웅장해진다. 자전거로 달리기에도 알맞은 길이다.

신산리 마을카페를 지나 한참 걸어가면 배들이 정박한 작은 포구, 그 너머에 만물이 있다. 용천수가 샘솟아 한여름에도 머리통이 쨍할 정도로 시원한 바다다. 한여름 전까지는 3~4mm 수트를 입고 들어가고, 종일 땀 흘린 여름에는 입던 옷 그대로 입수할 때도 있다. 초입 바다와 가장자리 쪽에 바위가 많은 편이라 아쿠아슈즈로 발을 보호하면 좋다. 물이 적당히 들어온 날에는 마스크와 스노클을 차고 들어가 다양한 물고기를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만물 근처에는 포장마차도 몇 군데 있다. 대부분 물질하는 삼촌이 있는 집에서 운영하는 곳이라, 싱싱한 해산물을 맛볼 수 있다. 한치철에는 해안 쪽에 널어놓고 건조시킨 한치를 구워 파는데, 종이컵에 담아주는 마요네즈 소스에 고소한 한치를 찍어 먹으며 맥주 한 캔 들이키다 보면 집에 가기 싫어질 지경이다.




글: 김세진

사진: 류정철

에디터: 지은경

제작: 마이리얼트립


✈ 마이리얼트립에서 나다운 진짜 제주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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