뭘 하고 싶은지 궁금한 나
지금까지 주어진 데로 나름 열심히 살아왔던 것 같다. 대학에 가기 위해 고등학생이 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은 공부였고 공부만 열심히 하면 그때는 다 되는 줄 알고 살았다. 대학시절에는 전공공부와 실습을 오가며 학점관리와 자격증을 취득하여서 취업을 위해 그때도 열심히만 하면 모든 것이 끝날 줄 알았다. 하지만 취업을 하고 나니 조직의 이해와 살아남기 위한 역량개발이라는 주제로 또다시 해야 할 것들이 끝없이 늘어만 갔다. 열심히 달리던 중에 문득 시키면 시키는 대로 복종하는 현대판 노예가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금전이라는 것을 노동의 대가로 보상을 받지만 내가 가고자 하는 주도성과 창의성은 모두 다 잃어버렸다. 그야말로 회사와 집을 오가는 로봇이 된 느낌이고 통장에 잔고는 쌓여가지만 스쳐 지나가거나 혹은 만질 수 없는 통장의 숫자처럼 어느 순간 느껴지기 시작했다. 여가와 취미를 가져라고 많은 사람들이 조언하지만 그 재미는 오래가지는 않았다. 조금씩 맛보기만 해보고 그냥 스쳐 지나가고 재미는커녕 의무감에 열심히 하는 나를 발견하기도 했다.
30세가 되면 인생의 노잼시기가 찾아온다고 한다. 나는 이것을 살아가는 원동력을 잃었다고 정의하기로 했다. 인생이 재미없고 허무하게만 느껴지는 것에는 반드시 자신이 생각하는 삶의 방향과 주도성을 잃고 그저 주어진대로만 하다 보니 그것에 익숙해지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내 주변에 현재를 존재하는 모든 것은 나 자신이 노력을 했고 개발했기에 가능했던 것은 분명히 맞다. 그 노력이 있었기에 사회생활에서 직위와 직책, 경제적 여건 등이 가능했다. 그 모든 것들은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 배를 조종하는 조타수의 모습이 아니라 사회와 주변에서 배의 조종키를 빼앗고 그저 기대에 부응하는 데로만 살아가는 나침판을 잃은 사람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그래서 인생을 잘 살아가는 선배들을 보면 끊임없이 자신과 소통하고 삶의 목표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문득 나에게 100억이라는 돈이 주어진다면 무엇을 하고 싶은지 생각해 보았다. 100억이라는 돈을 설정한 이유는 한국에서 얼마나 자산을 가지고 있으면 부자라고 생각하냐는 질문에 대다수가 50억 이상이라고 대답했다는 통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본이라는 수단을 이용한 것은 빌게이츠가 그 많은 자본으로 인류를 위해 한 인도주의적 행동은 아프리카 아동을 돕는 일이었다. 깊은 의미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깊게 해석하지 않기로 했다. 100억이라는 질문은 쉽게 해답을 찾지는 못했다. 나를 위해 집을 사고 차를 사고 맛있는 것을 먹고 단순한 해답이 아니라 사회에 필요한 일을 찾고 그것에 자본을 투자한다고 생각하니 내가 알고 있는 것으로는 부족했다. 우선 교육을 충분히 받지 못하고 있는 아동을 위해 돈을 쓰면 미래에 투자해보자고 하니 생각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이 질문은 나에게 노잼시기를 이겨내 볼만한 질문이었다. 자본주의에서 자본이 없으면 많은 불편함을 감내하고 살아야 하지만 자본이 무척 많다고 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생각보다 그리 많지 않았고 그것을 지키려고 전전긍긍할 모습이 허탈하게 느껴졌다. 죽는 그날까지 그 많은 자본만을 생각하며 사회를 위해 써보지도 못한 채 관 속으로 들어갈 생각 하니 끔찍했다. 자본을 사회를 위해 사용하고 그것이 재생산되어 사회에도 이롭고 그 노동의 가치가 다시 자본을 만드는 일을 찾기란 여간 까다로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 일을 찾아낸다는 자체가 어려운 일이고 그런 가치를 창출해 내는 사람이야 말로 훌륭한 사람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훌륭한 사람이란 자신을 믿고 그 힘을 원동력으로 삼아 사회에 가치 있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했다.
많은 사람들은 말한다. 그 업을 왜 하고 사는지 물으면 대다수 돈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막상 로또가 되거나 큰 자본을 만지게 된다면 무엇을 하고 싶냐는 질문에 명쾌한 대답을 하지 못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 많은 자본으로 돈이나 섹스, 마약에 손을 대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자본보다 내 인생에서 나침판을 내가 설정하고 내가 조타수가 되어 살아가는데 노력하기로 했다. 자본을 아예 포기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의미와 가치를 더 우선순위를 두고 집착하며 살아가지 않겠다는 의미이다. 나의 노동의 대가는 확실하게 보상받으며 살아가되 그 일과 자본이 사회적으로 이로운데 사용되길 바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