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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 Architect Apr 22. 2021

나는 어쩌다가 변호사가 되었는가?(2편)

로스쿨 생활과 대형로펌 입사


순진하기만 했고 현실적이지도 않았던 나는 로스쿨에 진학 후 방황의 방황을 거듭하였다. 친인척, 지인을 통틀어 내 주위에 법조인은 단 한 명도 없었기에 로스쿨에 진학하여 법조인이 된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떤 의미인지 잘 몰랐다. 그냥 늘 해왔던 대로 열심히 공부하고, 그 공부에서 의미를 찾으면 내 삶은 탄탄대로 일 거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로스쿨은 '학교'의 탈을 쓰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직업인 양성소였기에, 내부 경쟁이 매우 치열했다. 다들 검찰, 로클럭, 대형로펌을 꿈꾸고 있었는데, 나는 입학 당시 그것이 정확히 뭔지 몰랐고 그들이 낭만 없고 정 없다고 우쭐했던 것 같다. 로스쿨에 들어가서도 3월에 친구들이랑 우정을 쌓고, 버들골에서 기타를 치고 새벽까지 술 마시며 놀고, 수업에 빠지기도 했다(그나마 그때 쌓은 우정이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는 인연들이 몇몇 있다).


학부 때에는 새벽 3시까지 공부하고 새벽 6시까지 놀고 2시간 자면서 촌음을 아껴 살았으나 어찌 된 일인지 로스쿨에서는 열심히 사는 것 자체가 싫어졌다. 학교생활에도 질려버렸는데, 예를 들어 동기 중 누군가 자신의 시험이 더블이 되자(하루에 시험이 두 개가 되는 것을 일컫는 말) 교묘하게 교수님께 거짓말하여(개인적인 급박한 사정이 있다든지), 시험 일정을 바꿔서 졸지에 내 시험이 도리어 더블이 되기도 하였고, 앞에서는 나를 두둔하다가도 뒤에서는 나를 욕하는 일도 비일비재하였으며, 경영대 수석 졸업생이라는 타이틀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이상하게도 유난히 신경 쓰는 것도 느껴졌다. 물론 나도 그런 것에서 자유롭지 못했기에 하나하나 민감하게 받아들였던 것 같다. 삶의 원칙과 단단함이 있었다고 믿어왔는데 로스쿨 시절은 늘 흔들리는 나날들이었다.


그리고, 교수님들의 보수적인 태도와 법조계의 경직된 문화는 나를 학교 밖으로 도망치도록 더욱 부채질했다. 그러면서 법문, 판례, 학설, 사안의 적용, 결론으로 이어지는 딱딱한 논리를 비판(사실 '비난'했던 것 같다)하며 법학은 진정한 학문이 아니라며 휴학하고 쓸데없는(?) 짓들을 했다.


정조의 격쟁을 대입하여 행정 시스템에 관한 논문을 써서 논문대상을 받기도 하고, 사회적 경제에 빠져서 관련 활동을 하기도 했고, 과외를 해서 돈을 모아 긴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그런데 결국 자퇴할 용기는 없었는지 긴 방황 끝에 학교에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돌아오기로 결정했으니 그래도 꾸역꾸역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친구들을 다시 사귀고, 소위 '대형 로펌'이라는 곳에 인턴도 나갔다. 거기서 최첨단 자본주의와 법조 문화가 결합한 색다른 경험을 하였고, 다시 욕망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사실 경직된 법원, 검찰문화에는 별 관심이 없었는데 로펌의 역동적인 문화는 경영학에 친숙했던 나를 끌어당겼고, 전통적인 법률사무가 아니라 판례가 정립되지 않은 최첨단 산업에 관하여 법 해석을 한다는 점도 새로운 것을 좋아하는 나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왔다(입사하고 나서는 변호사에게 이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가를 깨달았지만...).


대형로펌 여러 곳에 인턴을 나갔고, 최종적으로 대형로펌 한 곳에 컨펌되었다. 긴 터널이 끝나는 기분이었다(근데 사실 예상치 못한 긴 터널이 몇 개 더 남아있었지만..). 3학년에 접어들어 변시 공부에 매진하려고 했지만, 엉덩이가 무겁지 않아 공부에 집중하기가 매우 힘들었다.


2학기가 되면서 공부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객관식, 사례형, 기록형 중에 사례형, 기록형에 더욱 집중하기로 결심하고 객관식을 버리기로(정말 버리는 것은 아님, 사례, 기록에 집중하면 어느 정도 객관식도 커버가 됨) 결정하였고, 이러한 전략은 완전히 맞아떨어져서 무난하게 변호사시험에 합격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는 애증의 학교에 돌아가지 않기로 결심했다(너무 질려서 졸업식에도 가지 않았다).


졸업 후 3월에 로펌에 입사했다. 처음에는 아주 긴장되었지만, 동시에 매우 잘하고 싶었다. 로스쿨에 다니면서 전통적인 법률사무에는 매력을 못 느꼈지만 경제규제 법에는 아주 관심이 많았다. 공정거래 및 독점 규제에 관한 법률을 중심으로 관련 과목을 열심히 수강하고 공부하였고, 변호사시험 선택법도 경제법을 선택하였고, 로펌 인턴 과제에서도 독점규제법에서 높은 평가를 받아 컨펌이 되었기에, 공정거래그룹에 배치되었다. 약 1달 정도 적응 기간을 거쳐 4월부터는 새벽 3시 퇴근 아침 10시 출근(할 일을 다 못하면 아침 8시 출근)이 반복되었다.


그렇게 쳇바퀴를 돌던 삶을 살아가다 건강은 계속 악화되었고, 여름에 3일간의 짧은 휴가를 내어 도망치듯 하바롭스크행 비행기를 탔다. 20살 시절 버킷리스트였던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딱 하루 맛보는 경험도 하였다. 하바롭스크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밤을 새워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탔다. 나이가 들어 탄 야간열차로 인해 등과 허리 건강이 우려되었으나, 밤새 덜컹거리는 기차소리는 20살 유럽 여행을 하며 야간 쿠셋을 타던 기억을 되살렸다. 일상에서 멀어지니 삶의 본질에 관한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이 어떤 의미가 있나? 무엇을 위해 일하나? 로스쿨에 진학하게 된 초심이 로펌 변호사를 하기 위한 것이었나? 건강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나?"


일상에서 멀어지니 삶의 본질에 관한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시베리아 횡단열차 종착역 블라디보스토크 - 인생 전환 여행


로스쿨을 졸업하고 남들이 모두 좋다는 진로를 택할 수 있었고 그에 대하여 감사한 마음이 있었다. 다만, 이 길을 가지 않으면 낙오된다는 불안감에 현재 일을 계속하고 있는 부분이 커서 내 삶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름 경제규제 전문가로 성장하고 싶다는 목표를 가지고 입사하였으나, 송무 서면과 의견서를 쓰는 것 외에도 내가 해야하는 현실적인 일들은 VR 용역보고서를 작성하고, 업무 시간을 쪼개어 선배 변호사들의 강의자료도 만들고, 기업이 명백히 잘못한 일들을 뒤치닥거리 하는 일이었다. 부모님이나 지인이 어려운 일이 생겨도 너무 바빠 챙겨보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건강이 많이 악화되었다. 로펌 일은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의미 있는 일이겠지만 내 삶과 건강을 망치면서 까지는 하고 싶진 않았다.


3일간 휴가를 다녀와서 회사를 그만둬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결국에는 연말 즈음에 퇴사를 하였다. 당시 회사에서는 휴직을 권하였지만, 휴직을 하면 로스쿨 휴학을 하고 또 학교에 돌아왔듯이, 다시 회사로 돌아올 것 같았다. 그리고 똑같은 삶을 살아갈 것 같았다. 많이 불안하기는 했지만 악순환의 고리를 여기서 끊어야겠다는 생각에 휴직을 거부하고 퇴사를 하였다.


그리고, 나의 또 다른 버킷리스트였던 하와이 1달 살기, 유럽1달 살기를 하기 위해 무작정 떠났다.

(3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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