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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 Architect Apr 23. 2021

나는 어쩌다가 변호사가 되었는가?(3편)

로펌을 퇴사하고 개업변호사가 되다.


로펌을 퇴사하고 하와이에서 약 1달, 포르투갈에서 약 1달을 살았다. 해외로 나가기 전에 무작정 세종시에 가봤고 생활환경과 산책로, 분위기 등을 보고 세종시에서 살아보기로 결정했다. 나는 당시 서울에서의 생활에 무척 지쳐있었고, 더 이상 경직된 법조계에서 조직 생활을 하기 싫었으며, 그렇다고 서초동에서 무작정 개업하기에는 남들과 똑같아지는 것 같아서 선뜻 내키기 않았다. 남들과 비슷하게 살아가기 싫다는 이상한 똥고집(돌이켜 보면 내가 선택해온 진로는 정말 평범했었는데 그때 내 마음속에 이상한 바람이 불었었나 보다)이 아무런 연고가 없는 세종시를 택하게 했다. 물론 정부청사가 있고, 거주환경이 쾌적하고, 젊은 사람들이 새로운 도전을 위해서 많이 모여든다는 점도 세종시에서의 개업을 택하는 주요 이유가 되기도 했다.



하와이에서는 로스쿨 지도 교수님의 주선으로 비교적 저렴한 비용에 UH(하와이 대학) 교직원 숙소에서 머물 수 있었다. 오픈 스포츠카를 렌트하여 섬 곳곳을 돌아다녔다. 당시 심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많이 지쳐있어 다른 섬에 갈 생각은 하지 못했고 오아후 섬에서 교민들과 친하게 지냈다. 물가가 비싸서 집에서 요리를 해먹고 혼술을 많이 했던 것 같다. 또한 당시 한국은 탄핵 정국이었는데 하와이 교민들과 함께 촛불 시위를 하고, 이러려고 하와이 왔나 자괴감 들고 괴롭다고 대표 발언도 했다. 당시 도호종 선생님과 홍승혜교수님, 백경임 교수님이 많은 도움을 주셔서 정말 고향처럼 잘 지내다가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 때 아니면 언제 오픈카를 타볼까 해서 큰맘먹고 렌트해서 섬 곳곳을 돌아다녔다



하와이에서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5일 만에 포르투로 출국했다. 포르투에서 19일 머물렀는데, 현지인 포스를 풍기며 러닝도 하고, 어느 정도 적응하고 나서는 한국인들에게 맛집과 주요 관광지를 소개해 주기도 했다. 많은 글을 쓰고 생각도 정리했다. 퇴사하고 정해지지 않은 미래가 불안하기는 했지만 어쩌면 내 인생의 마지막 긴 여행일 수도 있겠다는 마음에 순간순간에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포르투에서 만난 여러 인연들 중, 3년이 훌쩍 넘은 지금에도 계속 연락하며 종종 보는 인연들이 있는데 그때의 생생한 추억을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면에서 감사하다. 꼭 기회가 된다면 포르투는 다시 한번 가서 1달 정도 또 살아보고 싶다. 한겨울에도 낮 기온은 10도 이상이라 밖에서 햇살을 맞으며 1.5유로 에스프레소를 먹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가장 사랑한 포르투 도오루 강



포르투에서 돌아오자마자 세종시로 이사했다. 사무실 건물을 계약하고, 인테리어 업체랑 함께 철야하며 사무실을 만들었다. 내 이름으로 첫 수임도 했다. 로펌에서 일하던 법률사무와는 다르게 한 사람의 삶 자체가 나에게 크게 다가왔다. 부담스러워서 도망치고 싶기도 했고, 타인의 불행으로 내가 돈을 벌게 된다는 점도 불편했다. 하지만 지도 교수님께서 '너의 직업은 이미 불행해진 자를 덜 불행하게 만들어 주는 것 아니겠냐'라고 말씀하신 점이 콕 박혀 마음을 다잡고 열심히 일하기로 했다.



인테리어 과정의 사무실


인테리어 완성!


개인변호사 방

로펌에서의 법률사무는 아주 복잡한 법 논리와 배경이 담겨있었고, 수천억이 오고 가는 사업에 관련되거나 한국에서 누구나 알만한 기업을 대리하는 사무였다. 반대로 개업 변호사로 맡았던 사건들은 한 개인의 내밀하고도 사소하다면 사소하고 중요하다면 아주 중요한 사무였다. 객관적으로 보면 전자의 중요성이 압도적이라고 할 수 있으나 후자의 일을 하면서 나는 '진짜 변호사'가 되어가고 있었다. 부동산 개발에 얽힌 사람들의 욕망이 만든 분쟁을 대리하여 소송을 진행하기도 했고, 경제적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양육권을 아버지에게 넘겨준 어머니를 대리하여 양육권 변경 청구를 해보기도 했으며, 이혼 직전까지 간 당사자를 대리하여 소송을 진행하던 도중 화해를 시켜 다시 봉합시키기도 했다. 계약서를 쓰지 않은 채로 현금을 빌려줘서 결국 반환청구소송에서 패소 한 때에는 실체적 진실과 법적 결과는 다르다는 점에서 마음이 쓰라렸다.



변호사 업무를 하면서 결과는 이미 90%가 정해져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이유 때문에 내가 하는 일의 효용에 대해서 많은 의문점이 들었다. 하지만 개업변호사는 한 개인이 불행에 빠졌을 때 객관적으로 길을 안내해 주는 역할도 하지만 고난의 길을 갈 때 말동무가 돼주는 심리상담자 역할 또한 꽤 크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그 역할은 학교에서나 로펌에서 배울 수 없는 것이어서 매번 모든 것이 다 새로웠다. 그러나 의뢰인의 삶을 함께 짊어지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었고 때로는 너무나도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2년동안 개업 변호사로 일하면서 어느 순간 정신적으로 한계점이 왔고, 사무실을 정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 일을 당장 그만두면 먹고사는 것도 문제고, 여태껏 나를 믿고 사건을 의뢰한 의뢰인들에게 죄송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만 둘 수는 없었다. 다만, 가사, 민사, 형사 등 전통적인 법률사무만 하면서 변호사로서 나이들고 싶지 않다는 생각은 여전히 강하게 들었다. 법률사무를 처리하면서 변호사로 성장하고 내면적으로 성숙해지고 있었으나, '일'로서는 크게 재미있지는 않았다. 마음 한구석에는 내가 좋은 변호사일까?라는 의구심도 계속 들었다.



그래서 2019년부터 기본적인 법률사무를 하되, 내가 하고 싶은 분야를 정하여 다양한 경험을 하기로 결심했다. 시간이 모자라서 법률사무와 함께 잘 할 수 있을지 고민도 되었으나 오히려 다양한 경험에서 얻은 긍정적인 에너지 덕분에 기본적인 법률사무를 처리할 때 마음의 여유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아직 많이 부족하겠지만 덕분에 조금은 괜찮은 변호사가 되는 것 같기도 했다. 2019년의 수많은 도전은 변호사의 삶에 있어서 큰 터닝포인트가 되었다(4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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