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시간
유독 외로움을 많이 탄다는 나의 말에 무언가를 받아 적던 상담사는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었다는 듯 고개를 들어 정면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그의 뒤편으로 열려있는 유리창 너머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을 이어 나갔다.
“스무 살이 되면서 자취를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대학 때문에 서울에 올라왔는데, 어쩌다 보니 지금까지 혼자 살고 있어요. 스물한 살 때였나, 처음으로 외롭다고 느꼈던 게요. 당시 저는 대학을 휴학하고 남미에서 일 년 정도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었거든요. 그게 벌써 십 년 전 일이에요. 상황도 변하고 나이도 먹었는데 혼자 있는 시간은 여전히 적응 안되고 힘들더라고요.”
내 이야기를 들으며 이따금씩 키보드를 두드리던 그는 의자를 뒤로 밀어 빼고는 테이블 아래에서 도화지 한 장과 반으로 잘린 페트병에 빼곡히 꽂힌 색연필 뭉치를 집어 들었다. “먼저 그림을 한번 그려보면 어떨까 해요.”
그는 강, 산, 나무, 집, 밭, 그리고 동물과 같은 것들을 차례로 그려보라며 검은색 마커펜을 하나 쥐어주었다. 나는 오래 생각하지 않고 순서대로 그림을 그려 나갔다.
"그림이 모든 것을 말할 수는 없지만 심리학에서는 유의미하게 보는 부분들이 있어요. 지금 보시면 주변의 산이라던가 꽃과 같은 배경 요소들은 굉장히 열심히 색칠하셨는데 정작 사람이라던가 동물, 그리고 그림 한가운데를 흐르는 강물은 전혀 색칠을 하지 않으셨거든요.”
그는 색칠까지 완성된 나의 그림을 보며 설명을 더했다. “꼭 그렇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겠지만 지금 그려주신 그림을 보면 주변 환경이라던가 주위 다른 사람들은 굉장히 신경 쓰고 또 챙기면서 정작 본인에게는 무심하고 엄격한 모습이 있으실 것 같아요. 모든 에너지를 밖으로 쏟아내다 보니까 내 안에 남아있는 힘이 없는 거죠. 힘드셨을 거예요.”
어느새 나는 이 자리에 앉았던 많은 사람들이 그랬을 모습으로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갑 티슈에서 휴지를 잔뜩 뽑아 들고 있었다.
“지금까지 어떻게 버티셨어요.” 어쩌면 위로가 목적이 아니었을, 그가 마지막에 덧붙인 한마디 말이 지금까지 어느 누구에게서 들은 말들보다 더 큰 위로가 됐다. 내가 스스로 정의한 나의 문제이자 오랜 고민인 ‘외로움’을 이곳에 가져오며 내가 기대했던 건 어쩌면 해결 방안이 아닌 누군가의 공감하는 말 한마디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 ‘나’를 챙기지 못하셨던 것 같아요. 오늘부터는 스스로를 챙기는 연습을 해보면 좋겠어요. 한 사람 안에는 여러 모습의 내가 존재하거든요. 어린아이 같은 모습의 내가 있기도 하고, 그와 동시에 무엇이든 잘해야 해 라며 스스로를 다그치는 선생님과 같은 나도 있는 거예요.
앞으로 일주일 동안은 그런 나의 모습들을 하나씩 인정하고 이해해주세요. 지금의 나는 ‘외로워서 힘들어’라고 말하고 있지만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엄격한 모습의 내가 있었기에 오랜 시간을 잘 지내올 수 있었을 거예요. 그렇게 끊임없이 스스로를 채찍질해왔던 ‘나’에게 이제는 쉬어도 된다고 얘기해주세요. ‘지금까지 수고했어. 네 덕분에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어.’라고 말이에요.”
첫 시간을 마치고 나는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상담소를 나섰다. 어느 것 하나 해결된 문제도, 달라진 상황도 없었지만 처음으로 ‘나’를 들여다보기 시작한 것이었다.
어려서부터 나는 무엇이든 스스로 해결하길 좋아했다. 그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을 늘 챙기고 배려하라는 어른들의 말을 들어오며 남들 챙기는 일도 내가 ‘스스로 해야 하는’ 일들 중 하나라고 여겼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는 단 한 번도 나를 그 챙김의 대상에 포함시킨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어느 항공사의 비행기에 탑승하더라도 비상시를 대비하여 구명조끼 입는 방법, 산소호흡기 사용방법을 반드시 알려주게 되어있다. 그리고 한 가지 빠지지 않고 이야기하는 게 있다. 어린아이와 동승한 보호자의 경우 본인의 산소호흡기를 먼저 착용한 후 아이의 착용을 도와주라는 설명이다.
삶도 이와 같다. 나부터 살아야 주변 사람들도 챙길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