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ANESI Nov 17. 2022

정신과라는 뫼비우스의 띠

 나는 정신과를 두려워하면서도, 그곳에 가서 나를 정의받길 원했다.


 지금까지 나는 스스로에게 너무 많은 물음표를 던져왔다. 내가 이해되지 않은 것은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던지라, 다른 사람들도 내게 물음표를 던지곤 했다.


 글쎄, 나는 그것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오지랖 내지는 불필요한 참견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일단 타인에게 궁금증이 생긴다는 것 자체가 그 사람에게 관심이 있다는 뜻일 터이다. 좋든, 싫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누나를 궁금해하는 게 두려다. 나를 향한 질문들이 꼭 나를 추궁하려는 것 같아서. 그 질문들이 공격이 아니라 나에 대한 관심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나는 다시 고민에 빠졌다. 나는 왜 평범하기 짝이 없는 질문들을 무서워했을까? 그건 내가 나를 무서워했기 때문이다.


 나도 나를 알 수 없어서. 내 두렵고 부끄러웠기 때문에. 나에 대해 묻는 질문들이 무서웠다. 여차하다 나의 못난 점들을 들킬까봐.






 그래서 나는 정신과에서 나에 대한 답을 얻길 바랐다. 모 드라마 대사처럼, 내 삶에 물음표만 던지는 게 아니라 느낌표를 받고 싶었다. 물론 그 느낌표를 내 스스로 찾았다면 좋았겠지만, 수 년간의 경험으로 그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건 의학적 도움이 필요한 문제야.


 그래서 나는 정신과에 가더라도 나 자신에 대해 좀 알고 싶었다. 도대체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야 해결이라도 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내가 간과한 것이 있었다. 정신과는 그리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내가 정신적 문제가 있을지도 몰라’와 ‘나는 정신적 문제가 있어’ 사이에는 어마어마한 간극이 존재했다.




 수 십년간 짐작만 해온 문제가 사실로 증명되었을 때, 나는 속 시원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내 착각이었다. 오히려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때 깨달았다.

 이건 끝이 아니구나, 시작이구나.




 두툼한 약봉지를 받았을 때, 그걸 매 식사시간마다 먹어야 할 때, 매 주마다 시간을 내어 내원할 때, 적지 않은 비용이 꾸준히 나갈 때. 나는 매 순간마다 자각해야만 했다.


 ‘나에겐 정신적 문제가 있어.’


 이건 당뇨처럼 평생 관리해야 하는 병이야, 라고 스스로 다독여보았지만 마음처럼 잘 되진 않았다.





 가끔씩 정말 서러울 때도 있었다. 왜 내가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 건지. 잘 해오다가도, 어느 날 하루 무너지면 정말 다 관두고 싶었다.


 의사를 붙잡고 간절히 물다. 도대체 언제까지 약을 먹어야 하나요, 언제쯤 괜찮아지나요. 뭐라고 대답했더라? 내 생각이 중요하댔나, 지켜봐야 한다고 했었나. 그 모호한 대답이 나를 더 힘들게 했다.


 약을 끊고 싶다는 욕망과 약을 끊으면 다시 재발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 나는 매일 살다.








 사람들을 마주하는 것이 어려다. 요즘 뭐하냐는 질문이 무서웠다. 내 삶은 정신병으로 점철되었는데, 그걸 빼고선 나를 설명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이야기하자니 차마 입이 안 떨어졌다.


 어쩌다 말하고나면 마음이 편안한 것도 잠시, 괜히 말했다는 후회가 물 밀 듯이 밀려왔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면 괜히 심술이 났다.


 ‘저 사람들은 아무런 문제가 없겠지.

 나는 정신과 약이나 먹으면서 살아야 하는데.’


 그러다가도 다시 후회했다.


 ‘아니야, 저들이 보면 나도 평범해 보이겠지.

 저 사람들에게도 내가 모르는 아픔이 있을 거야.’


 세상을 미워하고, 증오하고, 저주하고, 그러다 또 통곡하고, 참회하고. 그럼에도 놓질 못해서 아파하고. 뫼비우스의 띠에 갇힌 느낌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우울하다는 건 말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