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리이니 Jun 05. 2024

[메리, 퀸 오브 스코틀랜드]-여왕에서 단두대까지

엘리자베스 1세의 친척이자 라이벌

<메리, 퀸 오브 스코틀랜드> 포스터



 메리 스튜어트, 스코틀랜드의 여왕 메리 1세이며 스튜어트 왕조의 8대 여왕이다.

잉글랜드에도 메리 1세가 있기 때문에 '메리 스튜어트'라고 불리기도 한다. 하지만 공식적인 칭호는 당연히 '메리 1세'이다.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 스튜어트 1세

 메리 스튜어트는 엘리자베스 1세와 비교 당하는 일이 많다. 동시대에 살았고, 나이대도 비슷했으며 둘 다 여인으로서 왕의 자리에 올랐으니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만큼 메리 스튜어트의 생애를 이야기 하기 위해서는 엘리자베스 1세를 빼놓을 수 없다. 하지만 두 여인은 다른 점이 더 많았다. 일단 시작점부터가 달랐다.


 암살 위협에 시달리며 극적으로 여왕이 된 '엘리자베스 1세' vs 태어나니 여왕이었던 '메리 1세'

 엘리자베스 1세는 여왕이 되기까지의 과정이 실로 다사다난했다. 잉글랜드의 왕 헨리 8세와 두번째 왕비 '앤 볼린' 사이의 딸로 태어났으나, 어머니 앤 볼린이 죄를 뒤집어 쓰고 처형당하면서 신분이 위태로워졌다. 공주 시절에도 딸이라는 이유로 아버지 헨리 8세에게 홀대를 받았고, 어머니가 처형당한 후로는 거의 죽은 듯 위태로운 나날을 보냈다. 이 때에는 공주 작위도 잃고 왕위 계승권까지 박탈당했었다.

 엘리자베스에게는 이복 남동생이 있었고, 왕위 계승 서열은 당연히 남자인 에드워드가 가장 높았다.  남동생이 왕위에 올랐다가 일찍 죽은 후에도 엘리자베스는 다음 계승 서열이 아니었다. 엘리자베스에게는 또다른 이복 언니가 있었는데 그 언니가 바로 '피의 메리'라고 불리는 잉글랜드의 메리 1세이다.

 메리 1세는 자신의 어머니를 내치고 왕비 자리를 차지한 앤 볼린을 증오했고, 앤 볼린의 딸이었던 엘리자베스도 당연히 동생 취급도 안하며 죽도록 싫어했다. (어렸을 때는 사이가 괜찮았으나 점차 사이가 벌어졌다고 한다) 엘리자베스는 메리 1세의 재위기간 동안 '정치범 수용소'라 불리는 런던탑에 감금되기도 하고, 역모죄를 뒤집어 쓰고 거의 사형 직전까지 가기도 한다. 언니 메리 1세가 숨을 거두게 되면서 엘리자베스는 25세에 기적처럼 여왕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반면, 스코틀랜드의 스튜어트 왕조의 메리 1세는 태어난 지 6일 만에 왕위에 올랐다. 그야말로 태어나보니 자신은 여왕이었던 것이다. 스코틀랜드의 왕이었던 아버지 제임스 5세와 어머니 마리 드 기즈 사이에 이미 제임스와 로버트, 두 아들이 있었으나, 아들들은 메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일찍 요절했다.

 이는 위태로운 유년기를 보내며 겨우겨우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잉글랜드 여왕 엘리자베스 1세스코틀랜드의 여왕 메리1세에게 열등감을 가질만한 부분이다.


'잉글랜드 국교회'의 대명사  vs '정통 가톨릭'의 대명사

  두 여인이 라이벌처럼 비교되곤 하는 것에는 종교적인 이유도 있었다. 잉글랜드의 왕 헨리 8세가 '앤 불린(엘리자베스 1세의 어머니)'을 왕비로 맞이하기 위해 내세운 무리수 '잉글랜드 국교회(영국 국교회)'는 정통 가톨릭을 믿던 사람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에, 정통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에서 지냈던 메리 스튜어트 1세가 잉글랜드를 통치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었다.


 이미 아버지끼리도 라이벌이었던 두 여인

 또한, 애초에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는 라이벌 국가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잦은 내전을 벌이고 있던 때였다.

  메리 스튜어트의 부친 제임스 5세는 메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잉글랜드와의 많은 전투에서 패배하여 몸이 쇠약해져 있었고, 메리가 태어난 직후 사망했다. 이때 제임스 5세와 많은 전투를 했던 잉글랜드의 왕이 바로 엘리자베스 1세의 아버지 헨리 8세였다. 

 전투에서 승리한 헨리 8세는 제임스 5세의 외동딸 메리를 자신의 아들 에드워드(엘리자베스 1세의 남동생)와 혼인시켜 스코틀랜드 왕국을 잉글랜드로 병합하려 했고, 실제로 혼인 조약이 체결된다.

 하지만 애초에 강압적인 조약 체결이었으므로, 메리의 어머니 마리 드 기즈는 그 조약을 이행할 생각이 없었다. 약혼 조약이 깨지자, 두 국가의 관계는 더욱 급격하게 악화되었으나 마리 드 기즈는 딸 메리를 프랑스의 왕자에게 시집보내 버린다.


 


 추녀(?) 엘리자베스 1세 vs 미녀 메리 1세

 메리 스튜어트는 당대 왕녀들 중 가장 아름답고 키가 크고 늘씬하기로 유명했다.

드라마[레인]에서의 메리 스튜어트

 스코틀랜드의 유일한 왕위 계승자였기에 출신성분은 이루말할 것도 없었으며, 4대 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었다.

 또한, 어린시절 프랑스의 왕자와 약혼한 후로는 계속 프랑스에서 지냈기에 최고의 교육과 최신 유행을 선도하고 있어 메리 스스로는 자신감이 넘치며 왕궁내에서도 오만함을 가질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엘리자베스 1세는 천연두를 앓았던 과거력으로 얼굴의 흉터자국으로 외모 콤플렉스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때문에 노년기에는 더더욱 화장에 집착을 했으며, 드레스도 최대한 화려하게 입고 다녔다.


다이아몬드 수저, 메리 스튜어트 1세의 비극

 메리 1세의 화려한 유년시절은 남편 프랑수아 2세가 왕위에 오른 지 1년 만에 사망하면서 막을 내리고, 이때부터 서서히 메리의 비극이 시작된다. 엘리자베스 1세가 위태로운 어린 시절을 보냈으나 잉글랜드의 최고 전성기를 이끈 여왕으로 거듭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부분이다.


 졸지에 미망인이 된 19세 메리 스튜어트는 자신의 모국 스코틀랜드로 돌아온다. 하지만 5세 부터 프랑스에서 지냈기 때문에, 메리는 스코틀랜드어에 능숙하지도 못했고 종교분쟁이 점점 심각해지고 있는 스코틀랜드의 상황에 대해서도 무지했다.


 메리 여왕이 돌아왔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잉글랜드의 여왕 엘리자베스 1세에게까지 전해졌다.

메리 스튜어트는 미망인이었으나 19세밖에 되지 않았기에, 메리 여왕의 혼은 온 유럽의 초미의 관심사였다. 당시 강대국 중 하나였던 스페인의 국왕이 메리와의 결혼을 추진할 때, 엘리자베스 1세는 메리의 세력 강화를 우려하여 번번이 훼방 놓았다.


 하지만 주변국과 귀족들의 많은 우려와 달리, 젊고 예쁜 메리는 뜬금없이 매우 잘생기고 훈남이었던 스코틀랜드의 귀족, 단리 경에게 반했다. 단리 경에 대한 불 같은 사랑은 메리의 입지를 약화시켰다. 메리 스튜어트의 이복 오빠 '모레이 백작'은 메리가 차라리 다른 나라 왕과 결혼해 스코틀랜드를 떠나 주기를 바랐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메리 여왕의 두 번째 남편, 단리 경

 더 큰 문제는 단리 경의 외모만을 보고 빠졌던 메리의 불 같던 사랑이 차갑게 식어버리는 데에 있었다. 단리 경은 자신이 여왕의 배우자이자, 남성인데 왕권을 주지 않는다고 투정을 부렸고, 많은 실수와 잘못들을 저질렀다. 단리 경이 메리와 메리의 시종 '리치오'의 관계를 의심하여 만삭이었던 메리의 눈 앞에서 리치오를 잔인하게 살해하는 일이 발생한 후, 메리는 단리 경에 대한 마음을 완전히 닫아버렸다.

 


 단리 경과의 사이가 안좋아지자, 그 틈을 노린 불한당이자 카사노바였던 '보스웰 백작'이 메리 여왕을 자신의 성에 감금해두고는 단리 경의 집에 불을 질러 폭사시켜 버린다. 메리 여왕은 보스웰 백작에게 감금당한 기간 동안 강제로 합방이 이루어졌고, 협박에 의한 강제 결혼식이 진행된다.

메리 여왕의 세 번째 남편, 보스웰 백작

 단리 경 살해 공모자로 밝혀진 '보스웰 백작'이 메리 여왕과 강제 결혼식을 올리면서 여왕의 권위는 바닥에 떨어졌다. 전 남편 살해한 범인과 결혼한 꼴이 된 것이고, 백성과 귀족들은 메리의 억울함을 몰랐기 때문이다.

 졸지에 부도덕한 여인이 되어 민심을 잃은 메리 스튜어트는 어느새 지지세력을 키운 이복오빠 '모레이 백작'과 겨룰 힘이 없었다.

 단리 경과의 사이에 낳은 아들, 제임스(훗날 제임스 1세)에게 왕위를 물려주어야만 했고 모레이 백작이 섭정이 되어 권력을 장악했다.


 태어날 때부터 다이아몬드 수저였던 메리 스튜어트는 나락으로 떨어진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일 수 없었기에, 급한대로 우선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엘리자베스 1세는 처음에는 '사촌'이라 칭하며 거두어 주는 모습을 보였으나, 한 국가에 두 여왕이 공존할 수는 없었다. 엘리자베스 1세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정통성이 뚜렷했던 메리 스튜어트는 그 존재 자체만으로 위협이 되었다.


 어쩌면 처음에는 엘리자베스 1세가 처형할 생각까지는 없었는 지 모른다. 

아니, 그러한 생각이 있었더라도, 주변국 프랑스와 스페인에 명분을 줄 수 없었기에 함부로 건들 수가 없었다.


 하지만 메리 스튜어트의 지지 세력은 메리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권력 다툼과 혼란에 빠진 스코틀랜드의 일부 귀족들은 메리 1세가 잉글랜드로 망명한 후에도 메리를 이용하려 했으며, 정통 가톨릭을 원하는 잉글랜드 내부의 세력도 메리를 지지했다. 따라서 엘리자베스 1세의 보호는 점차 감금의 형태로 변화되어 갔고, 메리 스튜어트는 18년 동안이나 셰필드 성에 갇혀 살아야 했다.


스코틀랜드의 여왕, 잉글랜드에서 공개 처형 당하다

 끊임없이 라이벌로서 비교 당하던 두 여인의 최종 승자는 잉글랜드의 여왕, 엘리자베스 1세였다.

18년 동안 메리 스튜어트에게 불리한 숱한 음모들이 있었지만, 엘리자베스 1세는 좀처럼 결단을 내리지 않다가 프랑스 내전에 스페인이 개입하여 관심이 없어진 틈을 타 메리 여왕의 재판을 진행했다.

잉글랜드 침략을 계획했다는 죄목이었다.  실제로 메리 여왕이 연루되어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엘리자베스 1세가 치밀하게 조작해온 음모라는 설도 있다.


 사실이 어떻든 메리 스튜어트는 결국 잉글랜드에서 공개 처형당했다. 그녀는 엘리자베스 1세의 암살 음모에 가담하지 않았음을 끝까지 주장했다고 한다.

당시 스코틀랜드의 국왕이었던 제임스 1세(메리 스튜어트의 아들)에게 선처를 요구하는 편지를 써달라고 요청했으나, 제임스 1세는 자신의 어머니를 구하지 않았고 답장조차 하지 않았다. 당시 최대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던 잉글랜드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겠다는 판단이었을 것이다.


*메리 스튜어트의 아버지가 제임스 5세인데, 그녀의 아들은 왜 제임스 1세인지 ?
메리 스튜어트릐 아들은 스코틀랜드에서는 '제임스 6세'이지만, 훗날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공동 왕이 되는 최초의 왕이기 때문에 '1세'를 붙인다.

 


 메리 스튜어트는 세 번의 결혼이 있었으나, 가장 행복했던 시절은 첫 번째 결혼이었던 프랑스 국왕이었던 프랑수아 2세와의 결혼이 아니었을까?

아마 그녀 스스로 선택했던 두 번째 남편 단리 경만큼 사랑하지는 않았겠지만, 프랑스의 왕비로서 지냈던 시절은 그 누구도 메리를 건들 수 없었다. 프랑수아 2세가 요절하지만 않았더라면, 스코틀랜드에서의 명예도 지키고,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분쟁에 휘말리지 않고 평탄한 인생을 보낼 수 있었을텐데. 두 손에 다이아몬드 수저를 들고 태어났으나 결말은 처참했던 메리 스튜어트 여왕의 일생이 안타깝다.




작가의 이전글 COVID-19 팬데믹에서 바라보는[면역에 관하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