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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승개 Jun 26. 2022

절교머신의 추억

다들 왜 그렇게 절교를 했던걸까

어린 시절 나는 내가 모르는 정도(바를정에 길도... 맥북으로 한자 어떻게 쓰나요?)가 항상 있다고 생각했다. 돌아보면 그것 때문에 괜히 돌아돌아 왔다고 느껴지는 부분이 있는데, 너무 예전 일이다보니 아쉽다거나 회한(!)이 느껴지진 않는다. 원래 성장하면서 다양한 경험을 겪는 법이고 그 모든 건 어떤 형태로든 자취가 남는 법이니까. 


군인가족 치고는 많다고 할 수 없지만 내가 뭐 다른 가족으로 골백번 살아온 것도 아니고. 그런 의미에서 나의 전학경험은 (눈치볼 것 없이) 꽤 많았다고 말할 수 있다. 방금 톺아봤는데 음, 객관적으로도 많은 편은 아닌 것 같군. 그래도 많았다!고 계속 강조하고 싶은 이유는, 한창 전학을 다닐 그 시기가 내 자아 정립 기간과 맞물리기 때문이다. 


기억도 나지 않는 아긔시절엔 일년에 두 번씩 이사를 다녔다고 한다. 무의식의 영역으로 보면 그때 경험이 더 많은 영향을 줬을 수도? 그래도 일단 기억나는 것만. 나는 강원도에서 꽤 오랜 유년을 보내다 초등학교 N학년 때 경기도 안양으로 전학을 갔다. 한 학년에 11개의 반이 있던 곳이었는데, 이전 학교가 전교에 오십명인가, 있던 것에 비하면 실로 엄청난, 빅뱅 수준의 볼륨이었다. 전학 시기는 항상 새학기 초였는데, 지금 생각하면 엄빠의 배려였던 것 같다. 남들 다 처음 만나는 시기에 나도 낑기는 식이었다. 그래서 드라마에 자주 나오는 웅성웅성~ 들었어 그 소식? 우리 반에 전학생이 왔대! 얘들아 우리 반에 새로운 친구가 왔어요~! 하는 식의 #mood 는 겪지 않았다. 물론 교무실 같은 곳에 있느라 교실에 들어가는 건 좀 늦긴 했지만... 그냥 지각생1로 보이지 않았으려나? 암튼 그런 식으로 몇 번이고 전학을 다녔다.


강원도에서 마구잡이로 살다가 엄청난 양의 또래친구를 맞이하니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하는 게 많았다. 물론 그 때는 어렸고 별 생각 없었기 때문에, 실존에 대한 경험... 지난 시간에 대한 회한.. 이런 과정은 겪지 않았지만 당시 풍경을 묘하게 받아들였던 감각은 생생하다. 무엇 때문이었나 생각해보면. 애들이 우르르 모여있으면 생기는 또래 집단-특히 교실 안 권력관계(난 그런 게 확실히 있다고 생각한다)라거나, 선배와 후배(oh... 초등학교에 대체 무슨 일이)라거나. 그룹을 이루고 깨고 이루고 합쳐지거나(다들 지내봐서 알겠지만 합쳐지는 일은 거의 없다) 누굴 영입하거나 뭐 그런 것들. 혼란스럽기보다는 신기한 광경에 재밌었던 기억이 나는데, 어쨌던 간에 그 시절은 이후로 오롯이 내 안에 남아 이런저런 영향을 끼쳤다. 




재밌고 신기하고 '뭐하는 짓이람' 생각해도, 어쨌든 그 안에서 적응은 해야했다. 그들의 생각을 받아들이고 내 행동에 녹이려면 그 동안-강원도에서 있었던 시간 동안- 내가 지녔던 방식을 버려야했다. 세상 모든 것엔 다양한 방식이 있고 정답은 없음을 알기엔 나는 너무 어렸고 하루하루가 정신없었다. 나는 아이들끼리 하루에도 몇 번씩 하는 절교선언에 교실의 그룹 현황을 살피기 바빴다. 왜 이렇게들... 절교를 하는 거야? 사실 나도 몇 번 당했다 흑흑. 절교 선언을 들으면 사과를 하거나 무언가 액션을 취해야했는데, 그게 그 다음 쉬는 시간의 주된 이슈였다. 나는...주로 편지를 썼던 것 같은데. 그 때부터 나는 말보다는 글이 낫다는 걸 알았다. 암튼 나는 평균기온만큼 쿨했던 강원도의 시간을 돌아볼 틈도 없이, 열심히 그들의 방식을 배워나갔다. 물론 중간중간 예전의 방식이 튀어나오기도 했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받은 절교의 주된 이유였다.


* 지난 1월 개인 블로그에 적은 글을 수정한 게시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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