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안 하던 걸 하면
1일차
나는 오늘 죽을 뻔 했다. 뛰다가 아 나 좀 무리하나... 싶어서 시계를 보니 출발한지 2분 됐더라.
당장 내일 죽어도 이상할게 없는 체력인거지.
체력이 거지.
한강이 좀만 더 가까웠다면 그쪽을 뛰었을텐데. 죽어도 아름다운 곳에서 죽고 싶다는 거지의 바람이랄까.
확실히 집에서 하는 운동이랑은 차이가 있다. 날씨가 시원해서 아침시간을 짱짱하게 즐기고 싶다.
2일차
어제 저녁부터 허벅다리가 이상하더니. 아침에 눈뜨자마자 '누가 내 다리 때렸어?' 하며 실체없는 범인을 찾았다. 게다가 기존에 계획했던 것보다 한시간 늦게 일어났다. 그냥 홈트로 대신할까?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나를 유혹했지만, 그래도 집을 나섰다. 그러니까 대부분의 경우 범인은 나인 셈이지. 시작한지 이틀 밖에 안되었는데 벌써부터 협상할 생각을 하다니, 나는 정말 놀라운 인간이다.
오늘은 어제 뛴 방향과 반대로 뛰었는데, 이쪽 길이 더 좋은 것 같다! 내가 뛰는 시간에 본격적인 출근피플이 적어서 덜 민망하달까. 주말엔 한강 쪽을 달려봐야겠다.
조깅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의지? 체력? 옷? 아니, 전날 일찍 잠드는 게 제일 중요하다. 잊지마, 두시 전 취침‼️
하루 한 번 칭찬타임을 갖기로 했다. 계획과 어긋낫다고 냅다 던져버리지 않는 제 자신을 칭찬합니다. 우리네 인생 어떻게 항상 완벽한 성공만 하겠어요. 게으른 완벽주의자는 완벽주의자가 아니다.. 그냥.. 게으른 사람인거지. ((내생각))
어쨌든 가장 중요한 목표는 아침에 나가서 조깅을 하는거지, N시에 기상해서 N시 NN분에 나가는 게 아니다. 그러니 일단 일어났다면 좌절감에 몸부릴 칠 시간에 양말 신고 나가는 게 옳다. 메인 미션과 서브 액션플랜을 잘 구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언제든.
아침에 조깅 계획을 던질까말까던질까말까 망설이다 졸린 몸뚱이를 이끌고 나갈 수 있던 건, 아무래도 이 조깅 일기 덕이 큰 듯 하다. 이래서 사람들이 냅다 지르고 보는구나, 새삼 깨닫는다. 밖에서 찍은 사진이 없어서, 알림 꺼버리며 잘못 캡처된 화면으로 대신합니다.
p.s 오른쪽 발바닥 옆이 따갑고 아프다! 신발이랑 쓸려서 그런 듯 한데, 이거 뭐 어떻게 해야하지? 신발을 벗고 뛸 만큼 진심은 아닌데. 일단, 내일 다시 보자. 허벅다리가 좀 덜 아프길 바라며.
3일차
어제 정말 피곤해서 책 읽다말고 열두시 반에 기절했다. 얼마나 피곤했냐면, 페스티벌 2일차 정도(피곤의 농도를 이렇게 측정하곤 한다). 내 기력이 상당히... 쇠해있었다. 이거 문법적으로 맞는 말 맞아? 아무튼 그래서, 오늘 아침 정말 진지하게 고민했다. 투데이 조깅을 안나가도 되는 이유 101가지, 비트 주세요. 다리도 아프고, 발바닥도 쓸리고, 경미한 편두통, 내 삶은 이미 충분히 고되고... 어쩌고저쩌고 이유는 많았는데, 돌아보니 그냥 하찮은 체력의 농간이다.
어쨌든 나갔으니까, 바라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운동하다 보면 어느 순간 체력이 조금이나마 올라가있지 않을까? 예로 오늘은 2분 넘게 뛰어도 숨질 만큼 힘들지 않았다❗️‼️❗️‼️ 이러다 철인이 되어버리는거 아냐? 조용히 살고 싶었는데 퍽 난감하군.
허벅지에 알이 배겨서 터덜터덜 걸었던 탓인지, 무릎 연골이 바삭바삭해진 느낌이 든다. 아파도 제대로 된 자세로 걸어야 한다. 평소엔 있는지도 몰랐던 근육에 종류까지 나누며 힘을 주고 있자니 그동안 얼마나 매생이전복죽(every life is ruined)처럼 살아왔는지 실감이 난다.
발바닥에 pre-물집이 잡힌듯하여 냅다 후시딘을 바르고 밴드를 붙였다. 내일 달릴 수 있는가? 달리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는 마포구의 적토마가 될 수 없으니, 방법을 강구해봐야겠다. 친구 요야지 말대로 신발, 아님 양말의 문제일수도? 그런데 양말은 그냥, 양말 아닌가? 얘가 문제를 일으켜봐야 뭐 얼마나 어떻게...(2023년 4월, 아직도 모른다.)
안 하던걸 하다보니 몰랐던 문제들이 눈에 띄는데, 이게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사실 자체도 몰랐을 수 있었다 생각하니 그건 그거 나름대로 아찔하다.
누가 보면 조깅 3년 차인 줄 알겠다. 산뜻한 뉴비답게 오늘의 행복 포인트를 말해볼까. 음, 고장난 에어팟을 저승으로 보내주었다. 새로 산 걸 양쪽에 끼고 달리니 기분이 너무 좋았다. 더 이상 오른쪽 소리가 난데없이 사라지지 않는다고. 누가 뭐래도 내 귀는 두 개다. 역시 필요할 때 바로 사는 게 인생퀄 상승의 지름길.
내일은 주말이다! 한강을 달려볼까? 후후. 의욕이 만땅이다.
4일차
아이폰이 폭풍우를 조심하라 하길래 며칠 쉬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마포구에 태풍이 오는 일은 없었다. 비가 조금 왔는데, 그런 식으로 가생이에서 물방울이나 조금 튀긴 듯 하다.
그래도 땅이 젖긴 했다. 나는 비오는 날 뛰어댕길만큼 멋쟁이가 아니라서 얌전히 걸어다니며 안온한 인생을 살았다. 일요일엔 홈트레이닝 비슷한 걸 했는데, 무엇을 했든 그건 조깅이 아니잖아? 괜히 찜찜했다. 그렇게 어제 저녁, 퇴근하는 길에 청명한 하늘과 맑은 공기, 행복한 도시인들로 가득찬 공원을 보며 미친 날씨를 실감했다. 그리고 더 이상의 태풍 걱정은 핑계에 불과하겠단걸 깨달았다. 다시 아침부터 뛰기로 했다.
근데 오전에 뛰어도 너무 덥더라. 꼭두새벽에 나가야겠다. 더운게 싫으니깐.
좋은 소식. 이제 4분을 내리 달려도 죽을 것 같지 않다, 이 말이야.
*2022년 9월 개인 블로그에서 모아옴
p.s 맞아요, 4일차가 마지막입니다. 묵비권을 행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