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트 혹은 꽁트
오후 1시를 훌쩍 넘기고 사무실 근처 작은 분식집에 들어갔다. 술을 심하게 마신 다음 날은 콩나물국밥이나 올갱이해장국 한 숟가락 조차 입안으로 넣기 부담스러울 때가 있다. 코로나와 관계없이 무조건 9시 이전에 술자리를 끝내려고 속도전으로 잔을 든 탓이었다.
점심시간에 동료들이 삼삼오오 몰려나갈, 아니 방역수칙을 반영해 삼삼사사 몰려나갈 때도 나는 혼자 남아 의자에 널브러져 속을 달랬다. 점심시간이 끝날 무렵 동료들이 삼삼사사 묻혀온 분식집 냄새는 허기를 몰고 오기에 충분했다. 술이 깨기 시작한다는 신호였다.
점심시간을 한참 넘겨선지 분식집은 텅 비었다. 말을 최소한으로 하고 웃음도 최대한 아끼는 삼십 대 여자 사장은 묵언수행 하듯 장사를 한다. 라면을 주문하면, ’예 라면요’, 쫄면을 주문하면, ‘예, 쫄면요’ 이렇게 답하는 게 일반적이지만, 이곳 분식집 사장님은 ‘예’ 그러고 만다.
벽에 붙어 있는 메뉴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으며 해장라면을 먹을까 수식어가 붙지 않은 라면을 먹을까 잠시 고심을 했다. 눈으로 금방 셀 수 있는 분량의 콩나물이 들어가는 것으로 해장이 될 수 있을지 꾸준히 의심을 해왔기 때문에 일반 라면에 고춧가루를 넣어 먹는 게 훨씬 효과적이라는 믿음을 지켰다. 천원을 절약하는 방법이기도 하고 말이다.
“사장님, 라면 하나 김밥 하나 주세요.”
‘예’라는 대답과 함께 계산대 단말기를 누르자 주방 안에서 ‘띵동’ 소리가 났다. 주문을 전달하는 신호다. 이런 시스템에서 굳이 주방을 쳐다보며 큰 소리로 ’라면 하나‘를 외칠 필요가 없다.
사장이 주문을 넣은 다음 계산대 옆 김밥 싸는 자리로 이동하는 사이에 초등학교 고학년으로 보이는 소년 하나가 문을 밀고 들어왔다.
“김밥하고 라면 하나 주세요. 시금치는 빼 주세요.”
자리에 앉기도 전에 주문하는 익숙한 동작으로 봐서 단골이다. 시금치를 빼달라는 소년의 말에 나도 기다렸다는 듯이 주문변경에 들어갔다.
“사장님, 저는 햄 빼 주세요.”
“그 햄 저한테 하나 더 넣어주시면 안 되나요?.”
내 주문에 사장이 ‘예’라고 대답할 틈을 자르고 소년은 재빨리 햄 하나를 공짜로 더 먹겠다는 의사 표현을 했다. 사장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동의를 구하는 눈빛이었다. 나는 소년을 보았다. 소년도 나를 쳐다보고 있었고 허락을 구하는 눈치였다.
“네 그러시죠. 그럼 이쪽 김밥에서 뺀 시금치는 저한테 더 넣어주세요”
나는 소년을 보았고 소년은 허락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까딱 숙이고 휴대폰에 눈길을 주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주방에서는 간간이 달그락 소리가 들렸을 뿐 김밥을 싸는 곳도 조용했다. 문득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라는 하루키의 산문집 제목이 떠올랐다. 시금치 단무지 우엉 당근, 김밥 재료 사형제들은 침묵하는 주인 앞에서 무슨 기분이 들까. 주인은 비 오는 날과 햇빛이 쨍쨍한 날에 따라 달라지는 채소의 기분을 이해할까. ‘맛있게 드세요’ 한마디쯤 해도 좋으련만, 사장은 무심하게 김밥 접시를 내려놓았다. 옆자리에 앉아 있는 소년한테도 말을 하지 않았다.
시금치가 두 배로 들어간 김밥은 씹는 식감이 좋았다. 옆자리에 앉아 있는 소년이 김밥 하나를 입에 넣었다.
“햄이 두 개 들어가니까 더 맛있어?.”
“네, 그럼요. 아저씨는 시금치가 더 들어가니까 맛있나요?.”
“그럼, 시금치가 얼마나 몸에 좋은데, 시금치를 많이 먹어야 뽀빠이 아저씨처럼 힘이 세져.” 미국에서 뽀빠이 아저씨 만화영화가 나온 직후 시금치 판매량이 무려 30% 이상 늘었다는 말을 늘어놓으며 시금치 좋은 점을 설명했다.
“그거야 만화니까 그렇죠. 저도 유튜브에서 뽀빠이 몇 번 봤어요. 근데 아저씨는 햄은 왜 안 드세요?.”
녀석이 나와 나누는 대화를 싫어하지 않는 것 같아 말을 이어갔다.
“가능하면 고기를 먹을 때는 첨가물이 많이 들어가는 햄보다는 생고기가 좋지. 건강을 생각하면서 음식을 먹어야 해. 너도 나이 들어봐, 하루하루가 다르단다.”
“그럼 라면은 건강에 좋은가요?.”
생각하지 못한 질문이었다. 서로 다른 김밥을 먹으며 각자의 맛에 대해 나누는 것은 좋았지만, 같은 라면을 먹으며 나올 수 있는 질문은 기대 밖이었다. 무언가 말을 해야 한다는 강박감이 느닷없이 몰려왔다.
“라면 불겠다. 어서 먹어. 라면 불면 경찰들이 바빠지거든.”
“경찰이 왜 바빠져요?.”
“너 모르는구나. 라면이 경찰서에 가서 사건을 목격한 범인들을 다 불었거든. 경찰이 범인들을 붙잡으러 다니려면 얼마나 바쁘겠냐. 그리고 불란서에선 왜 라면을 안 파는지 아니?.”
“거긴 라면을 안 팔아요? 헐.”
“그 사람들이 불어 써서.”
내 얼굴을 보며 놀라운 답변을 기다리던 소년은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표정을 짓더니 젓가락으로 라면을 휘감았다. 마치 왜 불었냐며 고문을 하는 듯했다. 나는 애써 그 모습을 외면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하필 계산대에 서 있는 사장과 눈이 마주쳤다. 측은하다는, 안타깝다는, 어이가 없다는, 단순한 표정은 아니었다. 무표정하게 ‘예’라는 대답만 하던 그동안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김밥은 김밥가게 주인이 싸주는 대로 먹는 게 가장 맛있고, 라면은 호 불어먹는 게 가장 맛있어요. 제가 가게 임대기한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하는 말이 아니라 분식집 주인의 직을 걸고 말하는 거예요.”
오랫동안 주인을 보아왔지만 이렇게 길게 말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직을 걸고 말을 한다는 분식집 주인 얼굴 뒤로 검찰개혁과 관련한 뉴스 화면이 막무가내로 흐르고 있었다.
”아저씨, 앞으로는 불란서라고 하지 마시고 프랑스라고 하세요. 저희 할아버지가 예전에 해외여행 다녀온 얘기하실 때 맨날 구라파라고 하셨거든요. 저는 처음엔 유명한 조직을 견학가신 줄 알았잖아요.”
계산하는 나에게 소년은 잔소리로 인사말을 던졌고, 카드를 건네주는 사장은 연극무대의 방백 같은 대사를 읊조렸다.
“코로나 끝나면 불란서 가서 동동구루무 하나 사 와야겠네.”
사무실에 와서도 얼굴 한쪽은 화끈거렸지만 주인이 나한테 관심을 갖고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그거는 완전히 선배님 혼자 생각인 거죠. 하여튼 늙은 아저씨들은 이래서 안 된다니까.”
분식집 여사장이 보여준 반응을 얘기했더니 후배는 일언지하 무시를 했다.
“나이 든 아저씨랑 꼬마랑 어이없는 얘기를 하는데, 그 사장이 선배님을 어떻게 봤겠어요. 아마도 저렇게 늙지는 말아야지. 이런 생각을 했을걸요.”
“그나저나 지난달 들어온 신입 술 한잔 사줘야 하는 거 아니냐, 내일 금요일인데 어때?.”
술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나오는 걸 보면 어느새 속이 제법 풀어졌다는 것이다. 인생은 음주 전과 후로 나누어진다는 어느 애주가의 말이 스쳤다.
“요즘 금요일에 누가 술을 마셔요. 젊은 애들이 좋아하겠어요?. 회식을 강제하면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헌법정신을 무너뜨리는 겁니다. 백이면 백 술자리 성원이 안 될걸요. 백퍼 미달입니다.”
나는 책상 위에 나란히 놓여있는 전립선강화제, 비타민C, 오메가3, 간장약 가운데 어떤 걸 안 먹었는지 살펴보며 긴 한숨을 내뱉었다.
“술자리도 미달, 대학 정원도 미달, 이 난국을 어떻게 타개해야 할지. 불란서 대학들도 정원이 미달되나?. 여하튼 나는 애 학비를 몇 년 더 내야 해서 직을 걸지는 못하네.”
*<굿모닝충청>에 실린 콩트 재수록임, 제목을 바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