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진영 Mar 20. 2021

진부하게, 안녕

일상에 물주기

    진부하게, 안녕


  비가 내리는 토요일 오후, AI스피커에게 잔잔한 음악을 틀어달라고 하고는 컴퓨터 앞에 앉았다. 나는 어떤 글을 쓰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한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그 어떤 글이라는 것이 구체적인 욕구 또는 감각으로 다가오기까지 무작정 기다려야 하기도 한다. 마치 운명적인 사랑을 기다리듯이. 그러니까 나는 어느 작곡가가 인터뷰에서 흔히 곡을 쓴다고 할 때 매일같이 피아노 앞에 앉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솔직히 고백하자면 영감이 떠오른 순간에 한달간 쓰지 못하던 곡을 고작 30분만에 만들어내는 게 현실이라고 한 말을 이해한다. (웃음) 결론은, 그 영감이라는 게 오늘 찾아왔고, 참지 못하여 자판을 두들기고 있다는 거다.


  나는 시각장애인이다. 그런데, 때로는 시각장애인 앞에 '부끄럽게도'라는 단어가 때로는 '자랑스럽게도'와 같은 단어가 달라붙었다. 입 밖으로 꺼내어 읽지 않았을 뿐 내 마음에는 뚜렷하게 두 개의 단어가 괄호를 치고 마치 자기 집인 것처럼 자리를 잡곤 했다. 나는 내 마음을 임대해준 적이 결코 없는데, 이상하다고 여기면서도 나는 그들을 기꺼이 내쫓지 못했다.

  대신에 나는 대학교에서 사회학을 전공하며 부지런히 장애학과 각종 인식론을 넘나들었다. 기껏 끓여놓은 라면을 형제에게 빼앗긴 어린양의 심정으로 절실히도 매달렸다. 왜냐하면 나는 누구보다 장애를 이해하고 싶었으니까. 정확히는 그것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과 나의 시선 그리고 그 사이에 떠도는 수많은 말을 꾸역꾸역 익히고 싶었으니까. 덕분에 많은걸 배웠다. 정말이지 절절한 대학생활이었고 나는 거기서 많이 성장했다.

  하지만 한 가지 부작용이 있었다. 많은 이론은 장애가 사회적인 개념이므로 더 이상 장애를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아니 그러지 않아야 한다고 설파했다. 처음에는 그 강력한 확신에 매료되어 한번쯤 되돌아볼 겨를 없이 우당탕 뒤를 좇았다. 실제로 어떤 순간에는 내게 상당히 큰 해방감을 선사하곤 했다. 그렇듯 거대하고 당당한 외침이 나를 세우는 막대기처럼 느껴져 등 뒤가 든든했다.

  그런데, 내가 초라하고 부스스한 날이면 여김없이 부끄러움이 “내가 나간 줄 알았지? 방 한 켠에 숨어 있었어. 아니 사실 그냥 있었는데 알아차리지 못하더라?” 하며 고개를 불쑥불쑥 내밀었고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뜨악한 심정으로 장애를 부끄러워하는 나를 부끄러워했다. 많은 장애인들은 더 이상 스스로의 장애를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게 당당하고 멋진데 나는 왜 여전히 제자리에 머무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답답하고 누추하여 견디기가 쉽지 않았다. 그 누추함을 견디지 못하여 때로는 장애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게 됐다는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날리고 싶어하기까지 했다. '합리화' 하지 말라고. 또는 거짓말 하지 말라고. 그러나 나는 다시 그런 내 모습이 서글퍼 마음에 을씨년스러운 구멍을 숭숭 뚫었다. 구멍난 스펀지같이.


  장애인 19년차가 되어 돌아보니 이제야 알게 되는 게 있다. 아니 어쩌면 장애인으로서의 경력이 아니라 세월이 쌓여 알게 된 것일지 모르겠다.

  그것은, 사람이 어느 하나의 모습으로 살 수 없다는 거. 그러니까 부끄러워하는 나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나도, 심지어 자랑스러워하는 나도. 그게 모두 나라는 거. 장애를 부끄러워하지 않아야 한다는 당위 어린 말보다는 살아있는 내가 얼마쯤은 더 소중하다는 거. 아니, 사실은 장애를 부끄러워하면 안 된다는 말이 나를 꾸짖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선언으로서 마치 우리가 일상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말처럼. 환경을 보호하고 생명을 아껴야 한다는 말랑말랑한 말처럼. 그런 온도와 질감을 지녔을 뿐이라는 거. 단지 내가 괜히 놀란 가슴으로 바라봤다는 거. 그러나 그때에는 그런 내 모습이 최선이었다는 거. 그런 최선이 쌓여 지금이 되었다는 거.

  나는, 당신의 부끄러움, 절망, 분노, 슬픔이 무엇에서 기인하는지 알지 못한다. 가난, 성별, 인종, 장애, 국적, 외모, 학력 등 이유는 셀 수 없이 많을 거다. 당신의 감정이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는지 가만히 숨죽여 묻고 싶기도 하다. 만일 당신이 이야기할 생각이 있다면. 다만 나는 그 뿌리를 알지 못한 상태일지라도 당신의 감정을 지지하고 응원한다. 부끄러워하는 당신도, 그렇지 않은 당신도, 그 사이를 손바닥 뒤집듯이 왔다갔다 하는 당신도. 엉덩이에 가시가 찔린 모양으로 안절부절 도무지 한번 앉을 줄을 모르는 당신도.

  많은 것들이 우리의 가치를 떨어뜨리려고 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나무를 기르듯 일상에 햇볕을 쬐이고 물을 주어야 한다. 정말로, 어떤 것이건 소중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진부한 말일지 모르지만 그래서 쏟아놓고 싶은 말이 있다.

  “당신은 소중하다.”

  진부하되 반드시 필요한 것들이 있다. 매일 숨쉬며 사는 것도, 아침에 눈을 뜨는 것도, 음식을 먹는 것도, 외로움에 타인의 따스함을 갈망하게 되는 것도. 진부하고, 또 진부하다. 하지만 그게 '일상'이고, '삶'이다. 우리는 누구도 그 일상의 진부함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들이다. 그 진부함이라는 건 굳이 이야기하지 않으면 잊혀지고는 하는 법이라서 일부러라도 주섬주섬 꺼내주어야 한다. 그렇기에 “또 그 소리야? 그걸 누가 몰라?” 하는 타박을 감수하고 당신의 마음에 크고 굵게 쓴다. 당. 신. 은. 소. 중. 하. 다.

  물론 나도 나에게 부지런히 물을 주기로 했다. 부지런히 볕을 쬐이고 돌보기로 했다. 설령 물을 마시고 싶지 않다고, 햇볕 따위는 저리 치우라고 내가 있어야 할 곳은 동굴이라고 외친다 할지라도. 그럴 때는 잠시 동굴에 있는 나를 가만히 지켜보면서.

  진부한 말이 아무 의미 없는 것처럼 지나더라도, 많은 어제와 많은 어제의 단어가 모여 지금의 우리가 됐듯이 언젠가 내가 오늘 내 마음에, 당신에게 심은 이 말이 솜털만큼이나마 당신의 존재에 섞이지 않을까.

  그러니까 나는 이 자리에서 진부하게, “안녕?”을 건넨다.

  참, 무엇보다 나는, 그러니까 나는, 스스로의 어느 약함을 부끄러워하는 당신이라 하더라도 부끄럽지 않다. 나는 당신이 부끄럽다고 여겨본 적이 없다. 결단코 그런 적이 없다. 내가 부끄러워봤으니까. (웃음) 그럼에도 여전히 앞으로 어느 순간에는 부끄러워하고, 어느 순간에는 자랑스러워하며 살겠지? 그래도 괜찮다. 살아 있는 것은 변하기 마련이니까. 그냥 지금은 살포시 나에 대한 자책감을 내려놓기로 한다.

작가의 이전글 안녕, 나는 시각장애인이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