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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니썬 Oct 02. 2021

엄마의 말이 어렴풋이 와닿는 어느날 밤

별 거 아니었던 날들이 사무치게 그리워지는 존재가 되는 순간

    입시로 인해 스트레스로 가득 찬 날들을 보내던 고등학생 나에게 엄마는 늘 말씀하셨다. 지금의 고민은 내 인생에서 가장 사소한 고민일 것이라고. 나는 말도 안 된다며 성을 냈었다. 매일 여기저기 놀러다니다가 술에 흠뻑 젖은 채 하루를 마무리 짓던 20살 나에게 엄마는 늘 말씀하셨다. 돌아오지 않을 나이니 조금 더 소중히 보내라고. 나는 나도 성인이니 알아서 하겠다며 화를 냈었다.


참으로 푸르고 푸르던 하늘. 이상하게 저런 하늘만 보면 울컥할 때가 있다. 너무 파란 하늘이라서 찬란하기에.

    2018년 2월, 함께 대학교에 입학한 동기 중 처음으로 누군가가 졸업사진을 찍는다며 오랜만에 한 자리에 모였다. 오후 5시 30분, 태양은 서서히 뒤로 숨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던 때에 동기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1학년 이후 거의 보지 못했던 친구들과도 근 3년만에 인사를 나눴다. 시간이 무색할 정도로 어색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고 4학년, 취준생이라는 비극적인 신분도 떠오르지 않았다. 눈이 마주친 그 순간부터 우리 모두는 2018년 풋풋한 새내기가 되었고 헛웃음나는 농담 따먹기에도 깔깔 웃기 바빴다. 마치 타임머신을 탄 것 마냥. 이미지 메이킹 따윈 없었고, 모든 걸 내려둔 편한 마음으로 나다운 모습을 보여주기에 바빴을 뿐이다.


    벌써 누군가가 졸업을 한다니. 사실 졸업사진 찍을 거라는 말을 들었을 때까지만 해도 이제 그럴 시간이 왔구나 라는 생각만 들었지 감정적 동요는 그닥 없었다. 단지 내가 뒤쳐진 건 아닐까 불안함만 살짝 생겼을 뿐. 하지만 그 시절 그 때의 우리를 마주하니 울컥했다. 같은 수업을 듣기 위해 손가락을 바르르 떨어가며 수강신청을 했고 수업 시간 내내 저녁 뭐 먹을 지 이야기하다가 수업이 마치면 노을 지는 하늘을 바라보며 다같이 후다닥 저녁 먹으러 갔다. 이젠 그런 순간을 나눌 이들이 점점 줄어든다. 소소하고 평범하게 일상에 자리잡았던 그들과 추억을 쌓을 수 있는 기회가 이젠 없다는 뜻이다. 지금 헤어지면 언제 어디서 어떻게 다시 만날 수 있을 지 더이상은 기약할 수가 없었다. 다음에 꼭 보자, 밥 한 끼 해 라는 인사만 남길 뿐이었다. 그렇게 같이 하고 싶은 게 많았고 졸업하기 전에 이것만큼은 하자 라며 포부에 차서 세운 리스트도 가을 바람을 따라 저멀리 날아갔다.


    엄마의 말이 맞았다. 고등학교 때 입시 고민은 고민이라고 하기에도 어이가 없을 만큼 별 게 아니었다. 좋은 대학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직진만 하면 됐다. 사기업, 공기업, 공무원, 외국계 기업 등 수많은 선택지 중 가능성과 이것저것을 파헤쳐야 하는 갈림길의 문제가 아니었다. 새내기 때 우리는 조금이라도 더 많은 추억을 남겼어야 했다. 밤새며 논 것을 후회한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조금은 더 '추억'이라고 할 만한 기억들을 쌓았더라면 어땠을까. 아니면 차라리 좀 더 화끈하게 제대로 놀아볼 걸. 사회인이 되기엔 너무 아쉬운데. 각자의 현실에 치여 살기엔 아직은 아까운데. 심지어 팬데믹 때문에 4년 중 반은 노트북에서만 만났는데.


    어디선가 그런 글을 본 적이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인간관계에서 남는 것은 깊이보다는 멀어짐이라고. 살결에 전해지는 멀어짐의 두려움을 어느 정도 수긍하는 나 자신이 참 미웠다.


    2021년 10월 1일. 핑크빛 하늘 아래, 붉게 물들어가는 덩쿨나무로 덮인 한 건물 앞에 18학번 새내기의 해맑은 웃음소리가 울려퍼졌다. 어쩌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매 순간의 아쉬움을 숨기기 위한 아린 웃음소리였을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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