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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tif Jul 13. 2024

서로의 인생장도를 위해 건배!

Ray & Monica's [en route]_191


그림처럼 행복하겠습니다.

 


지난해 9월 6일 멕시코에 입국 후 멕시코시티에서 40일을 지낸 후 멕시코에 대한 진한 끌림이 생겼다. 신화가 계속되고 있는 듯한 역사, 다양한 문화, 삶과 유리되지 않는 예술, 양 극단을 아우르는 자연, 각기 다른 정서가 공존하는 원주민과 이주자들의 삶, 침략과 저항, 융화의 정치, 역동적인 경제... 이 모든 것을 차치하고 극악한 카르텔의 마약과 범죄로만 각인된 뇌를 새롭게 정돈하고 오류의 감각을 바로 잡을 필요를 느꼈다. 


우리는 다른 나라로 발길을 향하는 대시 멕시코를 다시 시작하기로 하고 멕시코의 서북단 끝, 티후아나로 갔다. 이런 결정의 가장 큰 이유는 멕시코 사람들에게서 느껴지는 인간적 친숙함이었다. 유럽이나 북미의 다른 나라에서 느낄 수 없는 묘한 친근감은 그저 '친절'로만 상쇄할 수 없는 정서가 있었다. 


우리 부부와 같은 세대임에도 내 부모가 가졌던 헌신과 희생의 정서를 수시로 경험할 수 있었다. 심지어 우리 부부보다 나이가 훨씬 아래인 분들에게서 나의 어머니와 아버지, 심지어 할아버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내 삶만을 챙기느라 부모님과 교감할 시간을 모두 놓친, 그래서 시시각각 다른 모습으로 통한스러운 그 시간을 만회해 보고 싶은 내 속의 또 다른 이기심이 나를 티후아나로 이끌었지 싶다. 


우리나라 동해의 태평양 끝, 바하칼리포르니아 반도를 종단해내려오면서 내가 잃어버린 수많은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버지와 어머니를 만났다. 그 마음들과 대면할 때 마다 내 가슴은 붉은 눈물로 젖었다.


1300 km, 건조기후의 오지를 종단한 끝, 라파스에서 며칠을 보내면서 길 위에서의 피로를 회복하고 또 다른 멕시코를 만나기 위해 본토로 넘어갈 예정이었다. 그런데 이곳에서 이번에는 아들을 만났다. 우리 막내인 아들과 같은 또래이지만 세명 아이의 아버지인 32살의 청년, 옥스나르였다. 라파스에서 209일은 아들과의 평범하면서도 비범한 나날이 7할이었다. 


멕시칼리로 가서 그의 아이들을 만나고 그 아이들의 엄마인 전 여자친구를 만나고 그 여자친구의 어머니를 만났다. 그의 친모와 친부, 외할머니, 이복자매들, 대모와 삼촌과 사촌들을 두루 만났다. 한 가계의 뿌리와 줄기를 비롯해 한 나무를 통체로 만나는 과정에서 우리 부부는 정서적으로 그 가정 가계도의 일부가 되었다. 


그는 자국민이 아니면 쉽지 않을 일들을 우리 부부를 위해 기꺼이 앞장서 주었다. 어금니 일부가 부서져서 잇몸이 붓고 통증으로 불편 해할 때 자신의 인척 치과의사를 통해 해결해 주었고 원인불명의 복통이 왔을 때 그의 어머니 재클린이 우리보다 먼저 병원에 도착해 진료를 주선해 주었다. 몇 개월 체류를 결심했을 때 우리의 요구에 맞는 집을 찾아내고 계약을 대신해 주었다. 


라파스의 정주자로 사는 시간은 우리가 발을 들여놓을 멕시코의 다른 지역은 물론, 중미와 남미의 정서를 해독하는 문해력(Literacy)를 키울 수 있었다.


옥스나르와 함께하는 시간을 통해 그가 직면한 인생의 허들들도 눈에 들어왔다. 두 명의 여자친구에게서 얻은 3명의 자식을 부양하는 일이었다. 두 엄마에게 매월 송금해야 할 금액이 적지 않았다. 그 또한 새로운 사람을 찾아서 결혼을 해야 할 나이었다. 당면한 이 허들을 넘는 것이 막연한 덕담만으로는 가능해 보이지 않았다. 당장은 그에게 돈의 부족이 모든 악의 근원이었다. 3개의 대학을 다녔지만 아이들의 양육이 더 화급한 탓에 그가 시작했던 전공인 '동물생산공학(engineering in animal production)', '수의학(Veterinary Medicine)'. '경영학 학사(Bachelor of Business Administration)'의 한 가지도 전공을 끝내지 못했다. 그러므로 전문직으로 취업해 고액의 연봉을 받는 봉급생활로 현재의 악을 일소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대신 그에게는 경제력 확보를 위한 필요성과 열망, 성실성이 담보되는 열정이 있었다. 결국 비즈니스에서 답을 찾는 길이 빠른 방법 같았다. 


그가 경험한 기존의 직업들을 바탕으로 몇 가지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그의 의욕을 고양하는 방법으로 그의 이름을 앞에 넣었다. Oxnar Hotel & Resort, Oxnar Adventures, Oxnar F&B, Oxnar Trade 등이다. 그는 이미 공간 렌털 비즈니스를 시작했고 작은 성공을 거두고 있으므로 그것을 좀 더 확장하는 것과 고객을 대상으로 부가 수익을 거둘 수 있는 경험제공사업, 공간을 확장할 경우 카페 혹은 레스토랑 운영에 관한 준비, 그가 10년을 살았던 멕시칼리와 지금 정주하고 있는 곳과 큰 시세차익을 낼 수 있는 몇 개의 무역 아이템을 발굴하는 것이다. 


그에게 우선 서울 아이들의 도움을 받아 노트북 한 대를 선물했다. 내가 원하는 경험을 제안하고 먼저 선금을 주어서 그의 여행업 첫 손님이 되었다. 그는 회색고래 시즌에 우리를 푸에르토 샬레(Puerto Chale)로 안내하고 El Rosario Uno의 선인장 보호구인 Cactus Sanctuary의 자연탐방과 1800년대 금광과 은광지역이었던 El Triunfo의 역사탐방을 안내했다. 그는 이 첫 비즈니스를 위해 미리 여행사에 파트타임으로 근무하면서 여행업무를 실습했다. 그리고 지난달에 깜짝 소식을 들려주었다. 


"제가 더 큰 비즈니스맨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공부의 필요성을 느꼈어요. 그래서 이번에 3일간에 걸쳐 대학입학시험을 보았습니다. 6월 17일에 합격자 발표가 있어요. 비즈니스관리공학(engineering in business management)전공입니다."


그리고 그날 그의 이름이 박힌 합격자 발표명단을 보내왔다. 19세 처음 대학에 입학한 것을 시작으로, 20세 대학을 옮겼고, 25세에 다시 새로운 대학에 입학했었다. 이번에 네 번째 대학 입학이었다. 


스스로 부족함을 느끼고 그것을 채우려는 생각이 대견했다. 그리고 현재의 에어비앤비 숙소 운영을 병행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보였다.


라파스를 떠나기 전 일주일을 그의 집에 머무는 동안 시내의 새로운 공간을 임대해 숙소를 확장하는 계약을 했다. 이번에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13학기 과정을 완성하도록 다짐 받고 그 대학이 첫 학기 등록금을 지원했다. 


너무나 바쁜 그였지만 우리 부부가 떠나기 전날, 라파스의 첫 예술생태축제에 함께 하는 것으로 환송을 대신했다.


우리는 라파스의 Malecon 해변의 축제에서 건배를 하며 서로의 인생 장도를 응원했다. 그는 우리의 안전을, 우리는 그의 인생항로의 순항을...


아내는 멕시코의 아들 가족을 위해 그림 한 점을 그렸다. 아름다운 라파스 붉은 해변을 향해 서 있는 옥사나르와 그의 10 살 딸 소피아(Sofia), 8살 리암(Oxnar liam)과 5살 가엘(Gael alessandro)의 손잡은 모습이다. 오른쪽의 큰 나무에 그의 가정의 풍요를 담았다.


옥스나르가 말했다.


"꼭 이 그림 속의 모습처럼 행복한 가정을 이룰게요. 지난번에 그려주신 제 초상화와 함께 액자에 담아 제 방에서 늘 함께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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