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y & Monica's [en route]_243
*은퇴한 부부가 10년 동안 나라 밖을 살아보는 삶을 실험 중이다. 이 순례 길에서 만나는 인연과 문화를 나눈다._이안수ᐧ강민지
#1
11년 전쯤, 헤이리 마을에서 새로운 두 분과 마주치는 놀라움이 있었습니다. GUVS라는 빈티지숍에서 였습니다. 뉴욕 브루클린의 한 공간을 옮겨놓은 듯한 생경한 그 공간에 얼어붙었습니다. 인더스트리얼 스타일의 공간과 분위기가 계속 말을 걸어왔습니다.
실내외에 가득한 화분에 물을 주고 있는 분이 혜주 씨였습니다. 동네 아이들 틈에서 아이들의 일원이었던 한 분이 보람 씨였습니다. 두 분은 교포 부부였습니다. 혜주 씨는 나긋한 말씨조차도 식물 같았고 보람 씨는 그 많은 아이들 속의 누구보다도 아이 같았습니다.
그 후로 헤이리에서도 가장 한적했던 노을동산 아래의 GUVS가 있던 8번 게이트로 발길이 잦아졌습니다. 그리고 한두 점씩 숍의 소품들이 모티프원으로 자리를 옮기곤 했죠. 주로 조명과 의자였습니다. 그런데 의자 한 점에 얽힌 이야기가 대학 강의라 할 만큼 방대했습니다. 디자이너와 제작회사, 제작연도, 그 때의 시대적 배경과 디자인 사조까지... 그 해박한 분이 혜주 씨였습니다. 나는 이 부부의 전문지식과 삶의 방식과 사물과 사람이 관계 맺는 태도야말로 헤이리 커뮤니티의 미래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부부가 헤이리를 떠났습니다. 미국과 한국을 오가는 고달픈 여정에 아이들을 돌보아야 하는 여러 사정을 미루어 짐작할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기적처럼 이 부부가 다시 헤이리로 돌아왔습니다. 이번에는 헤이리에 자체적으로 건축을 하고 돌아온 만큼 그렇게 불쑥 떠날 수는 없는 방식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그 guvintageshop( @guvintageshop ) 공간은 숍이라기보다 보물창고 같았습니다. 부부가 미대륙을 누비는 발품으로 들여온 것들이었습니다.
이번 저희 부부가 뉴욕에 머무는 동안 가장 많은 메시지를 주신 분이 혜주 씨였습니다. 저희가 뉴욕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알고 부터 언제 만날 수 있을지, 어디에서 만나야 할지에 대한 재촉이었죠.
"맨해튼 MoMA에서 뵐까요?"
"프린스턴 대학교가 궁금하시면 내려 오시는 것도 환영입니다!"
두 분이 지척에 있는 것만으로 안심이었습니다. 그래서 뉴욕에서의 한 달 열흘이 언제나 안심이었습니다.
가을이 짙어진 때에 마침내 두 분을 만났습니다. 두 분이 살고 있는 프린스턴에서였습니다.
우리 부부는 그렇게 11년 전 헤이리에서 대면했던 식물 같은 심성의 혜주 씨와 변함없이 아이들의 마음인 보람 씨가 코디네이션 한 하루를 프린스턴에서 보냈습니다. 우리의 관심과 취향을 바닥까지 읽고 있는 두 분의 발걸음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가을보다 화려하고 그윽했습니다.
공원과 도서관과 카페와 맛집과 서점과 음반가게와 미술관과 프린스턴대 교정에서의 피크닉까지... 우리가 방문한 서점의 이름이었던 'Labyrinth Books'의 이름처럼 결코 출구를 만나고 싶지 않은 미로 같은 신비한 날을 보냈습니다.
돌아오는 열차 속에서 생각해 보니 '미로'이기는 이 부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내게 여전히 미로로 남아 있는 곳은 아이들의 마음세계입니다. 내가 잃어버린 세계죠. 천진한, 그래서 불안이 자리 잡을 공간이 허락되지 않는...
#2
보람 씨와 혜주 씨와의 극진하고 촘촘한 하루를 뒤로 하고 떠나오려니 마치 고향의 식구들을 뒤로 하고 막차를 탔던 내 12살 무렵의 어린 유학생으로 돌아간 듯 울컥했습니다.
한국을 가야 하는 보람 씨의 마음이나 남아서 초조해할 혜주 씨의 마음이 자꾸 떠올랐습니다. 나의 12살 산골마을에서 대처로 유학을 보낸 부모님의 마음이 생각나서 뒤도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내 유학은 배우지 못한 탓에 고된 노동에서 벗어 날 수 없었던 부모님의 한을 대물림하지 않겠다는 결심의 반영이었죠. 객지에서 늘 향수에 젖어 산 5년 동안의 방황은 고향으로 가서 부모님과 가족을 만나는 것 외에는 치료제가 없었습니다.
가족과 떨어지는 것이 한이었던 것이 저희 아이들과의 관계에서도 되풀이 되고 있는 것이 참으로 삶의 아이러니입니다. 늘 떨어져 살아온 아이들조차도 내가 어릴 적 느꼈던 그 감정이 되풀이 되었는지 아들의 가장 큰 소원은 어떤 일이 있어도 가족과 떨어져사는 삶을 선택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내 소원이 그러했지만 그렇지 못한 삶으로 지속되고 있으니 아들의 그 다짐에 대해 죄스러운 마음이 됩니다.
두 분을 만나고 뉴욕으로 되돌아오는 시간은 이렇듯 내가 고향 시골마을의 막차를 탔던 55년 전 그때의 마음이 소환되었습니다.
내게 프린스턴은 이제 아련한 환영처럼 존재하는 부모님이 애써 아무렇지 않게 나를 배웅하던 그 삼도봉 아래의 고향마을이 되었습니다.
보람 씨 혜주 씨, 두 분의 선하고 열심인 마음이 아버지의 평생 업이었던 농부의 그것과 다름없었습니다. 동이 터기 전에 들로 나가 달빛을 등에 지고 집으로 돌아오셨던, 쉼을 몰랐던 아버지. 하지만 나는 보람 씨와 혜주 씨가 노동으로만 일관했던 아버지의 삶이 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보람 씨에게는 그렇게 좋아하는 음악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짬이, 혜주 씨에게는 흰 노트 한 권 들고 커피향 가득한 공간에서 사색할 수 있는 짬이 허락 되는 여백의 삶이 펼쳐지기를... 이것이 두 사람을 위해 소원하는 내 지극한 바람입니다.
●GUVS의 이보람·박혜주 부부
https://blog.naver.com/motif_1/30186948765
●마켓에서 ‘Goodwill’을 세우다
https://blog.naver.com/motif_1/30188341930
●몰래 유학을 보낸 아버지
https://blog.naver.com/motif_1/3006936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