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y & Monica's [en route]_273
*은퇴한 부부가 10년 동안 나라 밖을 살아보는 삶을 실험 중이다. 이 순례 길에서 만나는 인연과 문화를 나눈다._이안수ᐧ강민지
#1
안티구아는 시간이 갈 수록 매력과 호기심이 더 높아지는 곳이다. 우리는 이 도시를 과테말라 전체를 탐험하는 거점으로 삼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티구아는 1543년 스페인 식민지 정부에 의해 '산티아고 데 과테말라'라는 이름의 수도로 건설되었다. 1773년 대지진으로 파괴되어 수도를 과테말라 시티로 옮길 때까지 230년간 번성했다. 1979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스페인 식민지 시대의 건축물과 역사적 유적들이 고스란히 보존될 수 있었다.
480여 년 전의 도시 풍경에 세계의 화산이 지척인 독특한 자연경관, 매달 개최되는 전통문화 행사, 잘 갖추어진 편이시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안이 안정된 이 도시는 쉽사리 싫증이 날 것 같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붕괴된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폐허의 유적들, 종교적인 의례와 의식, 전통음식과 복장, 인근의 커피농장과 수많은 스페셜티 커피숍 등 탐구심이 발동하는 요소들이 가득했다.
도시의 관심 지역들을 차례로 방문하는 중에 외국인들이 몇 년씩 묵고 있는 집을 발견했다. 이름도 없고 어떤 숙소 예약 플랫폼에도 올라있지 않은 곳으로 최소 6개월부터 3년, 5년 등 10여 명의 외국인들이 장기간 머물고 있었다. 2인까지 머무를 수 있는 크고 작은 10개의 공간이 있었지만 커플이 사용 중인 한 공간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1인이 거주 중이었다.
10여 년 전 Itzamná spanish라는 스페인어 교육을 하던 곳으로 여행자들에게 단기 스페인 교육과 숙박을 제공하던 곳을 관리의 편의를 위해 스노우버드(Snowbird)나 은퇴자를 대상으로 하는 장기 주거공간으로 전환한 것이었다.
넓은 정원, 전망 좋은 옥상 등 그 집을 둘러보자마자 반하고 말았다. 주인을 만났을 때 1년을 머물고 일주일 뒤에 떠날 예정인 한 사람이 있다고 했다.
#2
이곳에 입주한지 보름째인 지난 토요일, 정원에서 포트럭 파티(Potluck Party)가 있었다. 호스트인 마틸다(Matilda)가 일주일 전에 포트럭 파티를 공지했을 때 모두들 무슨 음식을 준비해야 할지 행복한 고민에 빠졌다.
제일 먼저 메뉴를 정하고 준비에 나선 사람은 파멜라(Pamela)였다. 그녀는 자신의 특기인 숙성 미트볼을 만들기로 하고 이틀 전에 미트볼 반죽을 만들어 냉장고에 넣었다. 이렇게 48시간 정도 두면 풍미가 더 깊어진다고 했다.
이틀 전에 대부분 메뉴의 윤곽이 드러났다. 호스트 마틸다와 릭(Rick), 직원인 월터(Walter)와 크리스티나(Christina)는 닭과 새우꼬치구이, 잭(Jack)과 나탈리(Natalie) 커플은 세비체(Ceviche), 우리는 김밥을 준비하기로 하고 재료의 선도 유지를 위해 당일 아침 일찍 시장에 다녀왔다.
그렇지만 공용 주방을 선점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그런 면에서 김밥은 오랜 시간 주방을 점유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일찍 준비를 끝낸 아내는 다른 사람들을 도울 시간을 벌었다.
꼬치구이팀은 바비큐 그릴을 독점 사용하는 것으로 여유로웠다. 리처드(Richard)는 캐서롤(Oven-Baked Ground Beef and Potato Cheese Casserole)를 준비했다. 감자를 삶고 고기를 볶고 하는 여러 과정에도 불구하고 5년 동안 이 집에 살았던 터라 시간이 걸리는 과정을 잘 소화했다. 제일 손이 많이 가는 것은 세비체였다. 준비한 여러 가지 해물을 손질하는 것부터가 보통 성가신 것이 아니었다. 아내가 양파와 고수 다지는 일을 도왔다. 샐러드를 준비한, 제일 연세가 많으신 마크(Mark)는 메뉴선택의 승리자였다.
아랍의 부호를 만나 호주에서 레스토랑 개업을 준비 중인 요리사 아구스틴(Agustín)과 LA에서 온 말론(Marlon), 기타리스트인 데이비드(David)는 주방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테이블이 차려지는 오후 2시가 되자 모두가 한 가지씩을 안고 차례로 모습을 드러냈다. 에그롤(Egg rolls)과 치크 케이크, 술과 음료... 이들은 모두 단골 중국집과 베이커리에 주문을 한 것이었다.
이로써 누군가가 메뉴를 할당한 것도 아니지만 전채와 후식까지 모두 갖추어진 테이블이 완성되었다. 채식주의자 잭을 위해서 아내는 맛살을 뺀 김밥을 한 줄 따로 만들었다. 해물을 먹지 못하는 리처드는 맛있는 세비체를 멀리했다.
음악은 아구스틴이 담당했다. 정원은 음식과 바람과 빛과 음악과 이야기로 채워졌다.
나는 이웃 마을의 행사에 다녀오느라 좀 경황이 없었다. 하지만 이 사람 저 사람 오가며 말과 웃음으로 빈틈을 메우려고 했다. 75년이라는 인생 경륜의 마크가 말했다. "미소는 한 마일을 간다네(A smile goes a mile)!"
포트럭 파티는 밥상을 나누는 것이고 밥상을 나누는 것은 시간을 나누는 것이고 시간을 나누는 것은 결국 마음을 나누는 것이다.
이 집은 나라도, 나이도, 이곳에 머물게 된 사연도 각기 다른 사람끼리 서로 마음을 기대는 관계로 갖은 문화가 융합되는 곳이다. 주인은 이 집이 이름이 없는 집이라고 했지만 나는 스페인어학당이었을 때의 이름, '이잠나(Itzamná)'로 부르기로 했다. 이 집 회랑의 벽에는 다양한 액자가 걸려있지만 벽에 직접 그려진 큰 그림 하나가 '이잠나'이다. 이 그림이 스페인어학당이었던 10여 년 전의 집 이력을 증거하는 셈이다. 이잠나는 마야 신화에서 우주와 자연 질서를 관장하는 하늘의 신으로 낮과 밤, 삶과 죽음, 남성과 여성, 지상과 하늘의 이중성을 구현한다고 한다.
우리 부부가 이곳에서 장기 체류를 결심할 때는 단지 거점으로 삼는 다는 생각이었다. 지난 보름 동안 이곳 사람들과 삶을 섞으면서 한 사람 한 사람이 지극한 사연을 가지고 지금 여기에 있구나 싶었다. 모두는 이잠나 신의 속성처럼 빛과 그림자를 한 몸에 지닌 사람들이었다. 지금은 생각이 좀 바뀌었다. 이 집 밖이 아니라 이 집 안의 사람과 마음을 기대는 교우의 날들만으로도 이곳에 머무는 충분한 이유가 되겠구나 싶다. 함께 하루 하루를 쌓아서 어떤 삶이 엮여질지는 알 수 없다. 이 집에서 몇 날들을 쌓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집을 떠날 때면 분명 사유는 더 부드러워지고 그 행위는 더 단단해져있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