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서가들의 서재 : 모티프원_배우 이나리

LIVING SENSE 2023/09

by motif



SPECIAL : Journey Through The Pages

[ 읽기 좋은 계절 ] 책과 함께 보내는 가을을 꿈꾸며

애서가들의 서재


책과 함께 머무는 곳, 모티프원

배우 이나리


파주 헤이리 예술마을에 최초로 들어선 게스트하우스 ‘모티프원’.

너른 창을 통해 계절의 선명한 빛깔을 볼 수 있고, 나무로 만든 서가에 켜켜이 쌓인 책들을 자유롭게 읽을 수 있는 이곳은 머무는 이의 의식을 고양하는 힘이 있다. 여행자들을 맞이하는 건 연극배우 이나리 씨다. 1대 주인장이었던 아버지의 뜻을 이어 이곳을 운영 중이다.


Q 모티프원은 어떤 공간인가요?

->저의 스승이나 다름없는 아버지가 2005년 만든 북스테이예요. 1층과 2층에 각각 방이 2개씩 있고, 반층에도 방이 하나 있어서 10명 정도가 묵을 수 있는 공간이죠. 손님들은 마음속에 해결되지 않는 질문을 가지고 이곳에 오시기도 하고, 스스로에게 틈을 주려고 들르시기도 해요. 큰 변화를 앞두고 계신 분들도 더러 있죠. 내 삶에 어떤 균열을 일으키고자 하는 이들을 자주 만나게 됩니다.


Q 예술가들이 작업을 위해 방문하는 스테이로도 잘 알려져 있죠.

->네, 감사하게도요. 유수의 감독님들이 이곳에서 시나리오 작업을 했어요. 최근엔 윤종빈 감독님과 자청 작가님이 다녀가셨어요.


Q 1대 주인장인 이안수 씨의 근황도 궁금합니다.

->엄마, 아빠는 출가하셨어요(웃음). 그렇게 선언하고 집을 떠나 세계 여행 중이시죠. 영국과 아일랜드를 거쳐 지금은 미국에 계실 거예요. 부모님은 아이들을 기르고, 회사를 다니며 삶도 꾸리고 모티프원을 만들었으니, 이제 인생의 새로운 챕터를 살러 가시는 거라고 했어요. 부모님의 삶은 제게 좋은 본보기가 되는 것 같아요. 저도 꼭 부모님처럼 살고 싶어요.


Q 나리 씨의 삶에는 언제나 ‘책’이 있었겠군요.

->맞아요. 집엔 언제나 책이 가득했어요. 저 또한 지금은 애서가지만,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했던 건 아니에요. 대학에서 연기를 전공하며 희곡을 읽어야 할 필요가 생겨 그때부터 책을 가까이하기 시작했는데요. 당시 제인 오스틴의 소설과 《달과 6펜스》 같은 고전문학들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했죠.


Q 나리 씨가 새로운 주인장이 되면서 모티프원에 생긴 변화는 무엇인가요?

->저의 에너지가 한 스푼 추가된 정도의 변화예요. 제가 기르던 식물들을 들였고, LP 플레이어가 생겼죠. 손님들은 조금 다르게 느끼실 수 있을 것 같아요. 아버지는 여러모로 혜안을 갖춘 인생 선배 같은 사람이었다면 저는 미성숙하고, 성장하는 중인 사람이니까요. 30대에 결혼을 하지 않았고 자녀도 없으니, 누군가에겐 딸 같고 누군가에겐 삶의 부침을 나누는 친구나 언니 같은 사람일 거예요.


Q 모티프원에는 몇 권의 책이 있나요?

->1만6000권을 넘어서는 시점부터 셈을 포기했는데요. 지금은 약 2만 권 정도가 있다고 봐요.


Q 2만여 권의 책을 어떻게 분류하나요?

->분류해 두지 않았어요. 아빠가 운영하실 때 ‘책을 어떻게 분류할까’ 고민을 하셨던 것 같아요. 하지만 결국 분류를 하지 않는 것이 맞다고 판단하셨대요. 불가능한 일이고, 그럴 필요가 없다는 데 동의해요. 책을 항상 같은 곳에 꽂아놓을 이유가 없고, 분류를 한다면 책을 특정 분야로 정의해야 하는데 이곳의 책들은 대개 그게 힘들 거든요. 경제 서적보다는 인문, 철학, 요리, 그림, 예술에 관한 책들이 많기 때문이에요.


Q 책을 같은 곳에 꽂아둘 이유가 없다는 건 새로운 관점이네요.

->모티프원을 찾는 손님들의 방에도 서가가 있는데요. 손님들이 자신의 방에서 책을 골라 거실에서 읽다가 이곳에 꽂아두기도 하고, 거실에서 발견한 책을 자신의 방에 가져가서 읽고 그곳에 놓아두기도 해요. 책은 그런 식으로 ‘여행’을 하는 거죠. 그러는 동안 신기하게도 큐레이션이 돼요. 어떤 손님은 “혹시 이 방의 책들은 저를 위해 골라두신 건가요?”라고 묻기도 할 정도죠. 그러니까 마치 책이 필요한 이를 찾아가는 것 같은 때가 있어요. 책의 자리를 정해 두면 책의 여행과 우연한 큐레이션을 방해하게 되겠죠.


Q 나리 씨는 주로 어떤 장르의 책을 읽으세요?

->인문 도서를 가장 많이 읽어요. 저는 사회적 소수자인 이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연극을 주로 하는데요. 그러다 보니 ‘읽어야 하는’ 책들이 생기거든요. 온전히 쉬고 싶을 때는 소설과 시를 읽고요. 특히 페르난도 페소아의 《불안의 서》를 가장 좋아해요.


Q 읽어야 하는 책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나요?

->최근 준비 중인 연극은 세월호 10주기를 맞아 2014년에 태어난 어린이와 함께하는 연극이에요. 시작하는 시점에선 아무것도 몰랐기 때문에 관련 도서들을 읽는 중이고요. 지난 공연에는 보호받지 못하는 거리의 청소년에 관한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생일을 모르는 아이》와 《시설사회》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Q 책을 읽는 것보다 끝내는 게 더 어려운 것 같아요.

->책 한 권을 끝까지 읽어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저는 5~6권 정도의 책을 동시에 읽는데요. 끝내지 못한 책은 그대로 둬요. 계절이 지나고 시간이 흐르면 언젠가 그 책을 또 꺼내 보고 싶어질 때가 있기 마련이니까요. 내가 언젠가 그 책을 다 읽고, 제대로 소화하기만 하면 되는 건데요. 중요한 건 손을 뻗는 곳에 책이 있도록 하는 것 같아요. 기쁜 날, 실망스러운 날, 너무 바쁜 날에도 읽고 싶은 책이 있도록 지척에 두고 꺼내 먹으면 되도록.


Q 요즘은 책 읽는 사람들을 찾아보기가 힘들죠.

->흡입할 수 있는 매체들이 많아졌기 때문이 아닐까요? 꼭꼭 씹어 먹어야 하는 텍스트 대신에, 도파민을 일으켜서 그 순간의 기쁨을 취하는 건 훨씬 쉬우니까요. 자연스러운 시대의 변화겠죠.


Q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역설적이게도 책이 지닌 가성비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책을 만드는 과정이 결코 만만치 않은데도 누군가가 이것에 관해 이야기를 해보겠다고 나선 거잖아요. 책은 개인적 경험, 뭔가를 의심하고 확인하는 과정, 실패 또는 성공을 통해 만든 자기만의 철학처럼 복잡한 문제를 주제와 목차와 단락을 나눠 엮어낸 거죠. 저자처럼 고생하지 않고도 그 사람이 쓴 글을 보고 그 서사들을 이해할 수 있다는 굉장한 수지타산을 생각하면 책을 꼭 읽어야겠단 생각이 들어요. 특히 철학 책이 그렇죠. 우리는 언제나 풀리지 않는 걸 안고 끙끙거리는 미성숙한 인간인데. 그에서 오는 고통을 해결하기 위한 정리를 누군가 해두었단 건 항상 놀라워요.


Q 나리 씨만의 독서 루틴은 무엇인가요?

->저는 뭔가를 꾸준히 잘하는 성격은 아니에요. 그래서 저의 일상 안에 녹이려고 해요. 혼자 저녁을 먹으러 가는 길에, 또는 산책을 갈 때 책 한 권을 들고 나가는 습관이 있어요. 어떤 질문이나 답을 책 안에서 찾을 수 있다는 확신과 믿음이 있어서 이런 습관이 굳어진 것 같기도 해요.


Q 가장 좋아하시는 책 속의 문장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저는 제가 하는 일이 누군가를 만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이곳에서 손님을 맞이하는 일이 그렇고, 배우로 산다는 건 결국 누군가의 인생을 만나는 일이니까요. 저는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꼭 방명록을 써달라고 하는데요. 이 방명록 두께만큼의 삶을 만났다고 생각하면 더더욱 북스테이의 호스트라는 직업이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상호작용을 통해서 의미를 찾는 일인 거죠. 그래서 정호승 시인의 ‘방문객’이라는 시 속 문장이 저에게 특별하게 와 닿아요.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L


✱《그냥 사람》, 홍은전

인생 책을 딱 한 권 뽑는 건 참 어렵지만 제 세포가 되어준 수많은 사랑하는 책들 중, 더 많은 사람들이 꼭 읽어봤으면 하기에 추천하는 책입니다. 저자는 사회적 운동을 곁에서 기록하는 ‘기록 활동가’예요. 저는 배우로서 탈가정 청소년, 아동, 위안부 등 우리 사회에서 소수자로 살아가는 이의 목소리를 알리는 중요한 이야기를 할 때 사회적 맥락보다는 그들이 사는 매일의 삶을 관찰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 책을 읽으며 내가 잘 모르던 사각지대를 이해하고, 나도 언제든 소수자가 될 수 있다는 걸 이해하게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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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 파주 헤이리마을에 위치한 모티프원의 2대 주인장 이나리 씨. 1대 주인장이자, 아버지인 이안수 씨 부부의 뜻을 잇는 중이다. 약 2만 여권의 책이 모여있는 1층 거실의 책장.

●오른쪽 : 큰 창을 면하고 있는 차탁에서는 늘 누군가가 책을 읽고 있다.

●위 : 모티프원으로 들어서자마자 있는 공간은 흰 타일과 1대 주인장 부부가 모아 온 예술품들이 즐비하다.

●아래 : 서재에서 시간을 보내는 1대 주인장 이안수 씨의 사진.

●현재의 모티프원은 1대 주인장 부부의 혜안에 딸인 이나리씨의 취향이 묻어가며 더욱 편안한 공간으로 진화하는 중이다.

●업무와 독서를 오가는 이나리씨의 루틴이 일어나는 거실의 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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