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네카의 '분노에 대하여'를 중심으로
세네카에게 있어 분노하는 기질은 악덕이다. 그는 분노에 있어 조금의 효용성도 인정하지 않는다. 나아가 우리에게 분노하지 않는 것의 미덕을 설파한다. 그에 따르면 참으로 위대한 정신은 분노하지 않으며 이것이야말로 모든 인간에게 좋은 상태이다. 그런데 내 생각에 이것은 지나친 이상처럼 보였다. 만일 세네카의 글이 단순히 최고의 이상을 느닷없이 제시할 뿐, 그 목표에 도달하는 과정을 상세히 묘사하지 않는다면 이 글은 범인들에게 무용할 것이다. 따라서 나는 이하에서 그가 생각한 위대한 정신의 경지가 그저 뜬구름 잡는 소리가 아닌, 개개인이 각자의 삶 속에서의 부던한 노력을 통해 충분히 접근할 수 있는 경지임을 보이고자 한다.
우선 세네카가 스스로 말하는 분노의 기작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스토아 철학자였던 그는 스토아적 인식론 구도와 유사하게 분노의 발현과정을 설명했다. 먼저 분노를 일으킬만한 인상이 필요한데, 불의를 당했다는 인상에서 시작된다. 이때 실제로 불의를 당했는가 그렇지 않은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실제로 어떠한가가 아니라 어떻게 받아들여지는가이다. 나아가 이성이 이 인상에 동의하면 분노가 발현된다. 여기서 동의라는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바로 이 과정으로 인해 분노는 단순한 충동과 구분되는 정념에 속한다. 세네카에 따르면, 분노는 급작스레 다가와 마음을 흔드는 충동과는 달리 인간의 의지에 따르는 마음의 악덕이라 말한다. 이런 정념은 이성의 동의를 필수적으로 요구하기 때문에 동물에게는 있을 수 없고 오로지 인간의 것이다. 만일 외부로부터 들어온 분노의 자극에 대해 마음이 동의하면 분노가 발현된다.
앞서 간술한 바와 같이 세네카는 분노를 악덕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덕은 악덕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으며 그 자체로 충분하기 때문에 덕 있는 삶을 사는 데 있어 분노는 불필요한 정념이며 제거해야 한다. “분노에 대하여”는 왜 분노는 악덕이며 어떻게 그것을 제거할 것인지에 대한 통찰이라 요약할 수 있겠다. 저자가 제시한 여러 근거들을 토대로 분노를 악덕이라 하자. 그렇다면 분노를 제거하는 방법은 분노의 발현기작을 고려할 때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분노의 자극을 처음부터 멀리하는 것, 다른 하나는 분노의 자극에 동의하지 않는 것이다.
분노를 제거하는 두 가지 방법에 대한 나의 의문은 다음과 같다. 세네카가 묘사한 바 위대한 정신은 분노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해볼 때, 분노를 제거하는 방법이 두 가지 있으므로 위대한 정신이 되는 방법 역시 두 가지가 있을 것이다. 일체 자극을 분노 자극으로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서 분노하지 않거나, 혹은 일체 인상을 분노할 만한 인상으로 동의하지 않음으로서 분노하지 않거나. 듣기에는 간단하다. 그러나 일상 속에서 우리가 분노하지 않는 것이 과연 이러한 것을 의미하는가? 세네카는 일상적 사례로부터 출발해서 과도하게 이상화된 결론을 도출한 게 아닐까? 이하에서 나는 세네카의 논의를 바탕으로 보다 현실적으로 납득할 만한 위대한 정신의 조건을 알아보고자 한다.
세네카의 글을 잘 살펴보면, 명목상으로는 분명히 분노하지 않아야 위대한 정신이 되지만 미묘한 부분이 다소 있다. 특히 묘한 부분은 분노를 다루는 방법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이다. 이것을 세네카는 크게 둘로 나눈다. 하나는 분노에 빠지지 않는 것이며 또 하나는 분노에 빠졌지만 죄를 저지르지 않는 것이다. 이 설명에 대한 가장 단순한 독해는 상술한 것과 같이 분노 자극을 멀리하는 것과 인상에 동의하지 않는 것으로 읽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문제가 있다. 인상에 동의하지 않으면 아직 분노가 아니기 때문이다. 분노에 빠졌지만 죄를 저지르지 않는 것의 의미가 분노의 인상은 가지되 동의하지 않는 것이라면, 이 상태는 아직 분노에 빠지지 않은 상태이므로 앞뒤가 맞지 않는다.
다른 해석을 생각해보자. 축자적인 의미에 보다 힘을 실어, 분노 상태이기는 하지만 잘못된 행동을 하지는 않는 경우라면 어떨까? 이 경우 앞의 논의와는 상통하지만 뒤의 내용과 맞지 않는 것 같다. 이 내용 이후에 세네카는 분노에 빠진 상태를 질병으로, 그리고 분노를 제압하는 것을 치료로 유비한다. 분노에 빠져 죄를 저지르지 않는다면 이것은 증상이 두드러지지 않을 뿐 여전히 질병을 가지고 있는 상태이므로 치료로 볼 수 없을 것 같다.
또 다른 해석은, 분노에 빠지기는 하지만 곧 평정을 회복한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이 경우 분노에 빠진 것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기 때문에 첫 번째 해석의 난문을 피할 수 있고, 분노를 질병으로 유비하는 이후의 내용과도 상통한다.
상술한 세 가지 해석 중 마지막 해석이 가장 그럴듯해 보인다. 그러나 이 해석 역시 난점을 갖고 있다. 분노의 고유한 특징은 반항이므로 일단 시작되고 나면 한동안 걷잡을 수 없다. 그런데 곧 평정을 회복할 수 있을까? 이런 의문에 대해서는 세네카 스스로 이미 상당한 답변을 제시했다. 본문에는 분노에 빠진 사람에게 대응하는 여러 가지 방책들이 제시되고 있는데, 이는 충분히 숙련된 사람이라면 금방 자신의 분노를 다스릴 수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물론 여러 부분에서 저자는 분노란 것이 일단 발현되면 통제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긴 했다. 그러나 이것이 결코 통제할 수 없다는 의미라기보다는 그만큼 맹렬한 정념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을 듯 하다.
그런데 분노의 치료로서 제시되는 방책들의 내용을 살펴보면 세 번째 해석이 과연 맞는지 다소 애매하다. 세네카가 말하는 바는 중의적이다. 어떻게 보면 그는 이미 분노하고 있는 경우에 대해, 즉 터져 나오는 분노 가운데 죄를 짓지 않도록 하는 방책을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아직 분노하기 전, 분노의 자극에 동의할지 말지 고민하는 사람을 두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예를 들어, 식당에서 너무 요란을 떠는 아이가 분노의 자극을 주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아이를 지켜보다 너무나도 화가 난 나머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담배 한 대를 꼬나물며 ‘아이니까 그럴 수 있지’ 라고 생각하는 경우인지, 혹은 그런 아이를 보고 약간의 불쾌함을 느꼈지만 ‘아이니까 그럴 수 있지’ 라며 분노의 인상에 동의하지 않는 경우인지 불분명하다. 나아가 사실 실제 상황에서도 두 예시는 크게 구분되지 않는다.
이를테면 본문 3권 38장에 언급된 카토의 예시를 살펴보자. 렌툴루스가 침을 모아 그의 얼굴에 뱉었을 때, 그는 얼굴을 닦고 속담을 재치있게 바꾸어 상황을 넘겼다. 왜 그는 침을 닦아낼 시간이 필요했을까? 그는 정말로 분노하지 않은 것일까? 아니면 가까스로 분노를 제압한 것일까? 정말 분노하지 않았다면 속담을 바꾸어 응수하기 보다는 다정한 목소리로 무엇에 이리도 화가 났는지 물어보지 않았을까?
물론 과도한 해석일 수 있으며, 사람마다 다른 대응이 가능할 것이다. 다만 내가 말하려는 바는 일상적인 상황에서 분노의 인상에 동의하지 않는 것과 분노를 제압하는 것을 명확히 구분하기는 어렵다는 점이다. 그러나 세네카의 전반적인 논의를 고려할 때 둘은 반드시 구분되어야 한다. 전자는 분노하지 않은 것이고 후자는 치료되기는 했지만 분노한 것이다. 그리고 분노가 정념임을 고려할 때, 전자가 후자보다 훌륭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위대한 정신은 분노를 제압하는 정신이 아니라 분노하지 않는 정신일 테다.
사실 이러한 모호함은 세네카 자신의 말 속에서도 느껴진다. 3권 39장에서 세네카는 “노바투스여, 우리는 영혼을 잘 다스리는 데 성공했습니다. 영혼은 분노를 느끼지 않거나 혹은 분노를 제압합니다.” 라고 말한다. 이미 이 시점에서 분노를 제압하는 것은 분노 인상에 동의하지 않는 것과 비슷한 지위를 갖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위대한 정신에 이르는 길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분노의 자극을 받지 않기, 분노의 인상에 동의하지 않기, 마지막으로 순간 분노할지언정 곧장 제압하기. 이 중 마지막 것은 저자가 직접 언급한 것은 아니지만 상술한 논의로부터 유도된 것이며, 상술한 인용문을 참고한다면 다른 두 길과 동일한 지위를 갖는다.
이제껏의 논의가 타당하다고 가정한다면, 세네카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가한 비판은 과도하지 않은가?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하자면 위대한 정신이 되는 마지막 길이자 가장 인간적인 길, 분노할지언정 제압하는 방법을 말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는 “당연히 화낼 일로, 당연히 화내야 할 사람들에게, 적당한 방법으로, 적당한 만큼, 적당할 때에, 적당한 기간 동안 분노하는 사람”을 가리켜 “온유한 사람”이라 칭했다. 확실히 이것은 분노를 죄악시하는 스토아적 입장과는 괴리가 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조금 더 들어보면, “온유한 사람은 대개 침착하여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이성의 지시에 따라 당연히 화내야 할 일에, 적당한 방법으로, 적당한 기간 동안만” 분노한다. 나아가 이들은 주로 복수하기보다는 용서해주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즉, 온유한 사람의 분노는 철저하게 이성의 지시를 따라 정도에서 어긋나는 법이 없다.
세네카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비판하며 정념을 적절히 사용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덕에 수단으로 준 정념이라는 무기는 전사의 손을 기다리지 않고 제멋대로 싸운다.” 라고 말이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바, 분노 인상에 동의하지 않는 것과 분노를 제압하는 것 사이 구분은 모호하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온유한 사람은 철저하게 이성의 지시를 따라 분노하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어쩌면 온유한 사람은 세네카의 위대한 정신의 한 형태일지도 모른다.
이상의 논의를 통해 나는 뚜렷한 해결책 없이 난점들만을 발굴했다. 요약해보자. 위대한 정신은 분노하지 않는다. 그런데 분노하지 않는 것과 분노를 제압하는 것은 일상적으로, 그리고 겉보기에는 크게 구분되지 않는다. 구분되지 않으므로 동등하다고 가정한다면, 아리스토텔레스를 향한 세네카의 비판은 과도하다. 그러나 과연, 세네카가 이 정도 문제를 몰랐을까?
위의 난점이 기초하고 있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분노라는 정념에 대해 철저하게 이분법적 태도를 고수한다는 것이다. “분노했는가? 그렇다면 결코 위대한 정신일 수 없다.” 물론 논리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겠지만, 세네카 스스로도 밝히다시피 처음부터 위대한 정신을 가지는 사람은 없다. 위대한 정신은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아니라 지고한 이상이자 인류가 추구해야 하는 목표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위대한 정신은 현실에 없을지 모른다. 실현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누군가는 다른 누군가보다 위대한 정신에 가까울 수 있다.
다시 텍스트로 돌아가보자. 분노를 다루는 방법에 대한 논의에서 세네카의 가르침은 다소 난점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사실 이 부분은 더 이상 위대한 정신을 규정하는 것에 대한 논의가 아니었다. 위대한 정신은 이미 규정되었고, 현실적인 조건 속에서 보다 이상에 가까워지기 위한 논의였던 것이다. 가장 처음 제시되었던 의문처럼, 다짜고짜 분노하지 말라고 해도 그게 될 리 없다. 처음에는 분노를 제압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그게 습관화되어 나의 성품을 이루고 나면 분노가 일어난 후 제압하는 것이 아니라 분노 인상 자체에 동의하지 않게 될 것이다. 앞서 말한바 둘은 표면적으로 구분되지 않는다고 했다. 옳은 것 같다. 다만 정도상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아마도 세네카는 두 경우가 근원적으로 동일하기 때문에 굳이 나누어 서술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비판도 이런 수준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 같다. 단순히 그가 분노를 옹호했기 때문에 비판한 것이 아니다. 그러한 분노, 적절한 분노가 ‘이상적 상태’로서 주장되었기 때문에 비판한 것이다. 만일 아리스토텔레스가 온유한 인간을 현실적인 목표로서 주장했다면 비판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절한 분노를 표출하는 ‘온유함’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 이상적인 중용의 덕으로서 주장되었고, 바로 이 부분이 세네카가 보기에는 부당했던 것으로 사료된다.
주지하다시피 세네카의 글에서 나타나는 위대한 정신의 축자적 의미는 지나치게 이상적이다. 현자조차도 위대한 정신을 갖기에는 부족하다. 그러나 누구도 도달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목표의 가치를 조금도 퇴락시킬 수 없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말로 이상을 비난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세네카가 제시한 위대한 정신의 이상과 그에 도달하기 위한 수행의 길은 비로 지루하고 험준할지언정 매일같이 스스로를 비추는 거울이 되어야 한다. 덕은, 가능하기 때문에 추구되는 것이 아니다. 좋은 것이기 때문에 추구되어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