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빠지는 건 날 미워하는 일이야
오랜만에 옛 일기를 펼쳤다. <DAY BY DAY>라 쓰인 표지를 열면 월별 달력이 나온다. 달력 옆에는 체크박스가 있어서 매월 ‘해야 할 일’을 적었다. 1월엔 <금주, 야식 끊기, 배달음식 끊기> 모두 성공. 2월엔 <금연> 하나 있었는데 실패. 3월엔 <수영복 사기, 여권 케이스 사기>, 4월엔 <뉴욕 여행 책 사기, 영어 학습지 마무리>, 5월엔 <매주 회화 과외> 모두 성공했다. 6월엔 <Go to Newyork>이라 적혀있고 그 뒤론 체크박스 칸이 텅 비어있다.
하경과 나는 겨울에 만났다. 만났다는 말이 ‘사귀었다’와 동의어라면 만났다는 말을 쓸 수 없다. 정말 ‘서로 마주 보다’의 의미다. 하경에게 빠지는 데엔 3시간이 걸렸다. 하경과 둘이 보낸 시간은 고작 나흘이었고, 12월이었다. 그는 미국에서 살고 있고, 난 그를 만나기 위해 6월에 미국에 가기로 했다. 그 결심 이후 반 년 동안 내 삶의 종착점은 6월이었다. 6월을 위해 반 년을 살았다.
겨울의 일기는 그를 믿고자 스스로를 설득하는 과정이다.
■이상화는 사랑에 빠지는 과정
하경은 나에게서 단점을 찾을 수 없다 했다. 나는 생각했다. 나 정말 결핍덩어리인데 날 너무 이상화하는 게 아닐까? 그런데 하경도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자신을 좋게만 보는 것 같다고, 자기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이야기했다. 나는 이걸 사랑이라 생각해. 사랑에 빠지는 데에는 이상화 작업이 필수적이지 않나. 이 사람을 특별하게 지각하는 과정인 거지. 서로 그러고 있었던 거다. 우리는 사랑에 빠진 거야. 물론 그 과정을 지나 본격적으로 관계를 진전시켜나갈 때 현실을 마주한다는 걸 안다. 본격적으로 실망하며 현실적인 기대를 조절하면서 상대의 모습을 직면하는 거지. 하지만 실망이 곧 관계의 끝은 아니야. 오히려 진정한 만남의 시작이다. 이때 소통을 잘 해야겠지. 실망이나 서운함, 내 욕구를 감추지 말고 말이다.
■기대와 실망에 대하여
기대와 실망은 그걸 한 사람의 몫. 내가 원하는 말을 강요하거나 유도하는 말을 하지 말자. 관게에 대한 불안은 하경이 적극적으로 해소해주지 못하는 거야. 하경, 무언가 책임져달라거나 더 더 빨리 연락을 달라는 게 아니야. 어떻게 받아들일지 두려우니 듣고 이야기해줘. 나는 연락하고 싶을 때 소식 전할 거고 아마 네 답장이 오면 난 계속 이어갈 거야. 다만 여유가 있을 때 답장 주면 되고 그냥 내 소식만 알고 있어도 좋아. 여기서 끊고, 마음을 미루기 싫어서 그래. 미리 안 좋을 거라 예상하거나 미리 실망감을 상상하고 지금을, 현재를 부정하지만 않으면 좋겠어. 그럼, 뉴욕에서 봐!
■혼자 묻기(함부로 예측하기)
하경, 네가 두려운 건 뭐야? 아님 두려운 게 아니라 네 마음이 그 정도가 아닐 뿐인 걸까? 네가 떠나고 연락을 개떡같이 해도 (나는 너를 미워하지만) 사랑하지 않을 순 없을 것 같아. 두 가지만 부탁해..! 밀어내지 말아줘. 진심을 말해도 아깝기만 한 시간인데 미국 간다는 얘기에 오지 말라고 하지마. 내가 가는 게 싫으면 그렇게 이야기하고 아니면 와달라 해줘. 답장, 사흘 안에 해줘. 이틀 연락 안 되는 것까진 네 마음을 믿을게. 보다 길어지면 나를 신경쓰지 않는다 생각할지도 몰라.
생각을 길게 해봤거든? 네가 ‘나를 알고 나면 나에게 실망할 거다’ 하는데 그건 내가 설득이 안 돼. 그냥 내 마음을 보여주는 수밖에. 나 혼자 있는 시간 필요한 사람이야. 그래서 너 미국 가는 거… 좋다고 말할 순 없지만 그리 나쁘지 않아. 잘 지내고 네 생각 많이 하고 있을게. 그리고 6월에 갈게. 그땐 내가 더 멋있는 사람이 될 거야. 그렇게 2년을 지내다가 있잖아… 너 돌아올 거잖아. 한국 오면 나랑 제대로 연애해야 한다? 나 신하경 못 잃는다!
■이별 직후
이제야 이별이 실감난다. 눈물이 울컥했다가 주체할 수 없어 삼켜야만 한다. 차라리 같이 슬퍼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걸 요구할 수도, 내가 징징거리기만 할 수도 없다. 내가 감당하겠다고 알아서 이겨낼 수 있다고 했으니까. 그러지 못하면 하경이 내게 표현한 걸 후회하게 되겠지. 나는 그를 품어줘야 한다. 그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 그를 잘 보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실수하고 싶지 않다. 왜 하경의 단점이 안 보일까. 너무 나에게 과분한 사람이다. 나도 나를 믿지 못하는 건 맞다. 내 의지가 얼마나 약하고 내 사랑이 얼마나 유약한지도 안다. 하지만 내가 여태껏 이리도 빠른 시간에, 그것도 날 밀기만 한 사람에게 빠진 적이 있는가. 하경 같은 사람은 다신 만나지 못할 것 같다. 수다만으로 수 시간이 증발되고 눈 녹듯 내 이야기를 하게 되고 한없이 안아주고 싶은 사람. 자신의 가치를 과소평가해, 그걸 제대로 봐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이 여리고 단단한 사람에게 나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하경이 한 말 복기하기
그가 한 감동적인 말들을 혹여 잊을까 적는다.
“미국에서 보자”
“너와의 관계에 무책임하기 싫어서 고민을 오래 해야 해.”
“일단 해보자! 모르겠다.”
“미국에 돌아가면, 너보다 내가 더 힘들 거야.”
“연락 잘 할 거야. 갑자기 사라지지 않아.”
“전 애인과 나의 공통점이 뭐야?”
“결혼이나 동거, 아이에 대한 생각은 어때?”
“너랑 같이 있을 때, 온 세상을 가진 것 같았어.”
“이런 감정은 몇 년 만에 처음이야”
“계속 이러면 난 너와 길게 보고 싶어”
“나 요즘 너에 대한 생각을 정말 많이 하고 있어.”
■수시로 일어나는 심경 변화
하경과 떨어진 지 딱 이틀 만에 왜 하경이 나를 걱정했는지 알게 됐다. 분명 난 기대했고 서운해했다. 제발, 오래 보려면 덜 가까워져야 한다. 서로에게 부담되지 않게 긍정적인 느낌만 남기자.
답장이 너무 오랫동안 오지 않는다. 무얼 하는 걸까. 하지만 늦더라도 연락줄 거야. 하경이 너무 보고싶다.
하경이 날 안 좋아한다는 걸 내가 못 받아들이는 걸까...?
내가 하경을 너무 많이 좋아하나보다. 눈 뜨자마자, 잠 들 때까지 하경 생각이 대부분이다. 이제 일주일도 안 지났는데 보고싶은 마음을 어떻게 달랠 수 있을까.
하경의 연락이 하루에 한 번으로 줄었다. 오후 5시 돼서 겨우 한 번, 그것도 이어지지도 않는다.
선생님 나 불안해요. 어떻게 해야 하죠? 저 자신이 없어요. 버틸 자신도 하경을 계속 좋아할 만한 사람이 될 자신도 없어요.
■불안의 지배
하경에게 너무 의존하고 있다. 연락 속도에 안절부절하고 나 자신을 쉴틈없이 검열한다. 내 외모부터 마음에 들지 않는다. 식단과 운동의 동기는 오롯이 신하경이다.
나, 뭐가 불안해? 하경이 날 진지하게 좋아하지 않는 거면 뭐 어때? 내가 많이 좋아하니까…. 그런데 그 자체로 슬퍼. 내가 그렇게 매력이 없나? 뭐가 문제지? 덜 예뻤나, 덜 성격이 좋았나, 덜 재미있었나, 섹스를 안 해서 그런가, 너무 있어보이는 척해서 그런가, 너무 날 보여줘서 그런가…. 나에게서 문제를 찾는 시간이 늘어났다. 그리고 하경에게 약속했거든. 나 이 마음 진심이고 오래 갈 거라고. 하경은 1년 뒷면 없어질 감정이라 했지만 난 그게 아니란 걸 보여주겠다 다짐했어. 내 그 자신 있던 말들이 허풍으로 남는 거, 그래, 그 정도의 마음일 줄 알았다 무시받는 게 싫어. 네 탓 하기도 실어. 제발 환경 탓만 하다 내게 와줘.
하경이 날 좋아하지 않는 것도 그의 자유. 내가 하경을 좋아하는 것이 내 자유이듯이.
■계속 좋아하기 위한 다독임
사람은 마음의 문을 여는 시기가 다르다. 난 느꼈잖아. 하경은 나를 좋아하고 분명 내게 매력을 느꼈어. 그걸 의심하지 말자. 한 달을 참아보자. ‘나 좋다고 했는데 왜 반응이 없지’하지 말자. 생각할 시간 줘야지. 마음을 얻기 위해 잘해주는 건 가산점 같은 존재. 가산점만으론 안 되잖아. 사귄단 고백을 받기 전까지 내가 잘해줘봤자 별 거 없다. 환심 사기 위해 발버둥치지 말아라. 올 사람은 오고 갈 사람은 간다. 이렇게 했는데 한 달 뒤에도 안 온다? 감정은 내가 용쓴다고 달라질 게 아냐. 그럼 그냥 그때 그만두면 될 일이야.
난 경험도 있잖아. 억지로 해보니 끝이 안 좋았잖아. 하경에게 난 너무 과했어. 나에 대한 생각을 하경이 하게끔 만들어야지, 내가 하게끔 나를 게속 들이밀면 나만 안달나고!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내가 할 만큼 했으니 뒤로 물러서서 기다리자. 상대에 대해 잘 모르고 알아가고 싶을 때 더 설레고 궁금하지. 모든 수가 보이면 흥미를 잃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여유를 가지고 가자.
조급해하지 말고 먼저 연락하지 말고 하경이 확신이 생길 때까지 기다리자.
(며칠 후)
하경이 과연 태도가 바뀔까. 과연 그에게 확신이 생길까. 내가 재미없어진 게 느껴졌다. 두자, 두고 할 일을 하자. 그런데 어떡해, 보고 싶은 걸.
■불안으로의 회귀
소설은 끝났다. 어딘가에서 하경은 현실로 돌아갔고 나와의 대화에서 흥미를 잃었다. 내가 또 부담을 주고 너무 매력 없이 다가기도 했다. 그래도 잘못은 하경에게 있어. 소통을 하려 했으면 이렇겐 안 됐겠지. 답답하다. 뭐가 어디서부터 문제였던 건지 왜 저러는지…. 어떻게든 이어가려던 연락을 어제 끊었다. 붕붕 떠있던 삶에서 다시 내 삶으로 돌아왔다.
술을 마시니 하경, 미루고 제껴왔던 그 감정이 올라온다. 사실 하경이 너무 보고싶고 그가 같은 마음이 아닐까 많이 두렵다. 하경… 너의 다정함과 해맑은 미소를 빨리 보고싶어. 손잡고 걷고 애정표현하고 술 마시고 놀고 싶어. 많이 보고싶다. 정말 네게 잘할 수 있는데 내 애인이 돼줄 순 없는 걸까. 나 너와 멀리 있어도 함께일 때처럼 잘 버티고 지낼 자신도 있어. 마음만 진심이라면 꼭 내게 와주길 바라.
■만나기 위한 준비
1월 7일 60.9kg
1월 15일 58.7kg
2월 2일 59.2kg
2월 20일 58.6kg
더 잘할 수 있다! 변화가 아직 미미하다.
쉬는 날 일정
7시 기상 > 8시 수영 > 씻고 아침 > 11시 수업 > 4시 헬스 > 식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