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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서 Apr 24. 2022

폭설

여행산문. 여행에세이

다시 북쪽으로 왔다. 멀고 춥고 고립되기 쉬운 곳. 그곳의 짙고 깊은 푸름은 나를 깊은 심연으로 데리고 간다. 그러고 보니 한 가지 색을 무한히 다양한 단어와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경이로운가.

홋카이도의 겨울 밤하늘은 쓰지 못한 글자들이 녹아 있는 짙고 푸른 잉크 같았다. 누군가 던진 잉크병이 하늘에 부딪치고 깨져서 밤하늘을 푸르게 물들이면 저렇게 깊은 색일까. 눈 밟는 소리가 살얼음처럼 부서졌다. 오타루의 달빛은 삿포로 보다 조금 더 노랗게 반짝였다. 오늘 밤은 멀리 뜬 반달이 잊었던 이름처럼 간신히 밤하늘을 잡고 있었다.


삿포로에 내리던 눈이 오타루까지 쫓아오더니 점점 더 많이 내려 집과 길을 하얗게 덮었다. 오타루에 도착한 지 며칠이 지나서야 눈이 그쳤고, 난 조금 편하게 오타루의 골목길 산책을 할 수 있었다. 우선 호텔 근처의 작은 초밥 가게에서 초밥을 먹기로 했다. 메뉴도 일본어고 영어를 못하는 주인장만 있는 가게에서 난 손짓을 동원해 나도 모르는 메뉴를 주문했다. 평일이라 그런지 식당에는 손님이 별로 없었다. 창 밖의 설경에 시선을 고정한 채 차를 마시는 사이 상큼한 고추냉이 향이 어깨를 두드렸다. 따뜻한 정종 이 나왔고 조심스럽게 칼질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난 도마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소리가 노크 소리 같아서 대답을 해야 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도마 소리는 화장실에 밖에서 누군가 문 두드리는 소리 같았다. 아마도 단정하게 입은 중년의 신사거나 맞선을 보러 나온 여인이 노크를 하면 저런 소리가 나지 않을까. 평화롭고 안정적인 소리가 모스 부호처럼 규칙적으로 들렸다.


잠시 후, 주방장은 메인 요리인 초밥 한 접시를 내게 내주었다. 나는 일본어를 모르지만 주방장은 내게

 “맛있게 드십시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 인사하고 초밥을 먹기 시작했다. 내가 첫 점을 먹는 것을 흐뭇하게 쳐다보던  주방장은 내게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자리를 벗어났다. 식당은 여전히 한가했고 초밥은 맛이 있었다. 북해도의 신선한 해산물의 힘이 아닐까 생각했다. 난 초밥을 입에 물고 지난밤에 받은 이메일을 떠올렸다. 원고 마감일에 대해 리마인드 해주는 단순한 메일이었지만 그런 메일을 받고 나면 어쩔 수 없이 압박감을 느끼기 마련이다. 두고 온 일들을 생각했다. 해야 했던 일과, 하고 싶었던 일과, 할 수 없었던 일과, 하지 말았어야 할 일. 난 왜 그 일들을 두고 도망치듯 떠나야 했을까.


방랑자에게 노트북이 필수처럼 여겨지는 시대가 되었지만 가끔은 노트북을 괜히 가져왔다고 생각할 때도 있다. 지난밤 나는 노트북을 열어서 간단한 답장을 보내려 했지만 편지함에 도착한 또 하나의 이메일을 발견하고는 노트북을 덮어버렸다. 메일 주소란 움직이는 집과 같아서 내가 아무리 이사를 가도 주소를 폐지하지 않는 이상 누구라도 내게 편지를 보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때로는 몇 년 만에 잊지 못한 이름이 컴퓨터 화면에 뜨기도 하는 것이다. 난 그 메일을 열어보지 않았다. 발신자와 수신자 사이에 쌓인 시간이 먼 은하계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창밖에는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폭설이 쏟아지고 있었다. 멈춰 선 차들의 헤드라이트 불빛이 멀리 뻗어나가지 못하고 눈길에 쓰러졌다. 눈을 덮은 도시가 가동을 멈춘 발전소처럼 고요했다.


젓가락을 들고 한참 동안 생각에 잠긴 내가 이상하게 보였는지 주방장이 날 쳐다보았다. 주방장은 문밖에 서서 카트 위에 커다란 스티로폼 상자 세 개를 쌓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길 저 쪽으로 소리쳤다. 잘 가라고 하는 것 같았다. 소리치는 방향을 바라보니 저만치 웬 백발의 노인이 사라지고 있었다. 난 갑자기 그 상자가 궁금해서 일어나 나가보았다. 하얀 상자 속에서 생선의 비늘이 달빛처럼 반짝거렸다. 난 그에게 영어로 대화를 시도해보았다. “저분은 누구신가요?” 주방장은 아는 영단어를 모두 동원해서 내게 대답을 해주었다. “어부죠.”, “어부요?” 주방장은 환하게 웃었다. “저분 늘 반가워요. 저분이 잡아오는 물고기는 정말 최상품이거든요. 좋은 생선이 없으면 제가 서비스를 못하죠. 당연한 거 아닙니까? 허허” 주방장은 벽에 붙은 상장 같은 걸 가리키며 모두 저 노인 덕이라고 했다. 아마도 일본의 어떤 요리 경연대회 같은 곳에서 입상을 한 것 같았다.


난 다시 자리에 돌아와 앉았고, 주방장은 내게 미소국을 더 내주었다. 다시 첫 번째 이메일을 생각했다. 무엇보다 마감 날짜를 어기고 싶지 않았다. 아이디어가 꼬여 있었고 내가 약속한 이야기를 보내주지 못할 것 같았다. 원고는 분량을 맞추기 위해 덧붙이고 짜깁기를 하다 만 상태여서 누더기 같았다. 그건 마치 간이 안 맞는 국에 소금을 넣다가 간장을 넣고 결국엔 조미료를 더하는 것과 같은 일이었다. 결론적으로 나는 그 초고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지막 초밥 한 점을 젓가락으로 들었을 때 주방장이 다시 말했다. 그 사이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인터넷으로 번역한 모양이었다. “음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으로 요리하느냐입니다. 제가 그것을 어떻게 조리하든, 무엇을 첨가하거나 어떻게 칼질을 하든 그런 건 다 잔재주에 불과하죠. 아무리 맛있는 소스로 겉을 발라놓아도 원래 재료가 좋은 게 아니라면 어떻게 최고의 맛을 느끼겠습니까? 생선 요리는 물고기가 중요하고, 채소 요리는 채소가 중요합니다. 제가 가끔 다른 사람들에게 나만의 조리법 같은 걸 공개해도, 사실 저렇게 싱싱한 물고기를 안겨 주고 가는 어부에 비하면 아무 하는 일도 없는 셈이죠."

"그렇군요. 좋은 말씀이네요." 난 그의 말에 맞장구를 쳤고, 그는 바로 다음 할 말을 내게 건넸다.

"건져 올리는 것, 그게 가장 중요하죠. 저는 바로 그 가장 중요한 걸 못하고 있으니까요.”

 

바람이 불어 식당 문에 걸려있던 풍경이 딸그랑 소리를 냈다. 이제 그만 나가려는데 주인장은 한마디 덧붙였다. “다음에 언제든 다른 곳에서 만나면 제가 어부였으면 좋겠네요. 지금 전 어부가 되지 못한 주방장이니까요.” 난 그렇게 말하는 초밥집 주인장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이 사람은 왜 이렇게까지 말하는 걸까. 무슨 사연이라도 있는 걸까.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치고 조금 더 밤길을 걷기로 했다. 눈은 완전히 그쳤지만 쌓인 눈의 양은 상당했다. 차도 양쪽으로는 제설차가 밀어놓은 눈이 내 키만큼 쌓여있고 인도 또한 발목까지 눈에 파묻히는 곳이 대부분이었다. 초저녁 보이던 달이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다시 큰 눈이 올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늘에서 내리는 건지 지붕에 쌓였던 눈이 날리는 건지 눈발이 흩날렸다. 불빛 속을 지나는 눈송이들이 달빛처럼 반짝거렸다. 눈 오는 밤 달이 보이지 않는 건, 눈이 부서진 달의 가루기 때문 아닐까. 난 지금 당장 편지를 써야겠다고 생각하고 호텔까지 쉬지 않고 달려갔다. 부서진 달빛이 볼을 스치고 지나갔다.  


방에 도착한 나는 노트북을 열고  번째 메일에 대한 답장을 썼다. “  호는 원고를 쉬어야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간단한 답장이었다. 나는 사탕 껍질 같은 원고를 보내느니 양해를 구하는  낫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번째 메일을 열었다. 그녀의 편지가 도착해 있었다. 길지 않은 문장이 치우기 힘든 눈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나는 좀처럼  글자를 쓰지 못했다. 창밖엔 다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오늘  눈이 이토록 많이 오는 , 당신이 그리워 폭발한 달이 쏟아지기 때문이.



/ 글, 사진. 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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