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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서 Apr 15. 2022

어제 하지 못한 말

여행산문. 여행에세이

그때 즈음이었던 것 같다. 내겐 더 이상 사랑이 없을 거라고 느낀 것이.

공기마저 회색빛이던 어느 날 나는 카페에 앉아 바닥의 무늬를 바라보고 있었다. 곧게 뻗다가 꺾어지고 이내 벽 속으로 사라져 버리는 선. 선을 쫓다 눈으로 도형을 그린다. 삼각형, 사각형, 오각형, 육각형, 팔각형. 그런데 구각형은 어떻게 생겼지. 생각해보니 구각형은 떠오르지 않고 있긴 있는지도 모르겠는 거다. 세상에는 그렇게 단 하나만 더 해져도 모르겠는 것들이 많다. 냅킨에 구각형을 그려봤다. 변의 길이가 다른 이상한 도형을 그리고 나니 이번에는 왜 일각형, 이각형은 없는지 궁금해졌다. 세상에 그런 도형은 정말 없는 걸까 아니면 보지 못하는 걸까.

그렇게 성냥갑을 손에 쥐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동안 카페에 하나 둘 손님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테이블에 앉아서 나누는 얘기들이 들려왔다. 대부분 덴마크어 여서 알아듣기 힘들었지만, 나는 종업원의 소매 끝에서 식탁보 위로 떨어지는 단어와,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는 손님의 안경테에 걸친 단어를 볼 수 있었다.


창밖에 보이는 가로수가 바람에 흔들렸다. 며칠  이어지는 코펜하겐의 흐린 날씨는 나를 충분히 쓸쓸하게  주었다. 그러다 고개를 돌려 그들의 가벼운 복장을 보면 나는 지금 어느 계절에 있는 건지 모르겠는 것이다. 카페 안과 밖의 계절이 다르고 사람들 각자의 시간이 다르게 흐르는, 시공간이 비틀린 지점에 와있는  같은 느낌이었다. 식은 커피를  모금 마시고 저들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알고 싶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들의 말이 들리기 시작했다.


"눈이 오는 것 같아."

그녀는 입안에 비타민 세 알을 넣고 우물거리며 얘기했다. 그녀의 입에서 오도독 소리가 날 때마다 투투 툭 소리가 나며 세상의 한 부분이 조금씩 깨져나가는 것 같았다. 그녀의 말대로 정말 눈이 올 것 같은 날씨였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덴마크어가 멸망한 민족의 음악처럼 들렸다. 그녀는 알루미늄 포일처럼 보이는 비타민 포장지를 반듯하게 접어 영수증과 나란히 놓았다. 두 개의 비밀 메시지를 테이블에 올려놓은 것처럼 보였다.

"당신은 똑같구나. 그 약들은 왜 먹는 거야? 어디 안 좋아?”

"응, 이거 샘플로 받은 거야. 먹어줘야지. 세상 어딜 가나 친절한 사람들이 있어.”

그녀는 창밖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휙 돌리며 말했다.

"눈이 오면 좋을 텐데! 그렇지?"

웃음으로 그녀에게 동조해주는 남자를 보았다. 십 년 전에 내가 그랬던 것처럼.
"우습지 않아?"

"응? 왜?"

"이 음악 말이야."

“아……”

그러고 보니 조금 전부터 팻 매스니의 '이프 아이 쿠드(if I could)'가 흐르기 시작했다. 커피잔에 떨어지는 음악 소리가 눈송이처럼 녹아들고 있었다.

"응. 이 음악, 내 생일날 우리 같이 갔던 카페에서 흐르던 곡이잖아. 당신이 내게 제목도 알려줬고. 그날도 눈이 왔어.”

"그래?"

"당신은 이제 나하고 있었던 일 다 잊었나 보구나? 흥. 하지만 기억하길 바라면 내 욕심이겠지. 훗”

그녀 앞의 남자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긍정인지 부정인지 모를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나는 혹시라도 소리를 내면 들킬까 봐 커피잔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그런데 문득 생각해 보니 내가 지금 듣고 있는 건 오래전 날 떠난 그녀의 목소리 같았다. 간지러운 목소리, 장난기 있는 눈동자, 가만히 두지 못하는 손. 그녀는 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대로였다.

"당신은 그대론가? 많이 변한 것 같기도 하고. 넥타이에 구두도 세련되고 멋진걸? 설마 아직도 혼자야?"

"달라지긴 뭘. 아직도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지. 넌..."

"난 뭐? 음... 당신, 그땐 내가 미웠겠네?”

"응?"

"결국은 내가 떠난 거잖아."

"아니 그야……”

"그야 뭐? 그땐 당신이 능력이 없어서 그랬다고? 그런 말 하지 마. 나도 별 볼 게 없는걸."

"왜, 지금 행복하지 않니?"

"행복? 사는 게 그렇지 뭐. 그러는 당신은 행복해?”

문득 그녀가 이혼을 한 걸까 생각했지만 난 묻지 않았다. 그때 그녀가 왜 사라졌었는지도, 지금 그녀가 다시 혼자 인지도 나는 묻지 않았다. 잠시 말없이 우린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았다.
 

탁. 그녀 앞에 그녀가 마시던 컵이 내려졌다. 두꺼운 종이 코스터 위에는 그 흔한 커피용품 브랜드 로고가 새겨져 있었다. 그녀의 컵을 통해 보이는 알파벳이 이상한 도형처럼 보였다. 그릴 수 없는데 존재하는 이상한 차원의 도형.

“이해해.”

“이해?”

“언제부턴지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니 당신이 날 찾지 않는 게 조금 서운하더라. 하지만 이해해. 누구라도 그랬을 거야. 아니 찾고 싶어도 내가 어디 있는지 몰랐을 테니까.”

사람들은 종종 인정하는 걸 이해한다고, 인내하는 걸 인정한다고 착각한다. 난 그 순간 우리가 뭐가 다른지 깨달았다. 나는 그녀를 한 순간도 잊지 않았지만 많은 추억을 잊었고, 그녀는 나를 잊었지만 나와 함께 한 추억을 하나도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그녀는 이 한 시간의 시간 동안, 십 년 전 어느 카페에서의 시간만을 추억하고 있는 건지 모른다. 그렇다면 십 년 후에 또다시 이렇게 우연히 만나게 된다면, 그때도 그녀는 오늘 나와의 시간만을 추억할까.


"그날 말이야. 돌아와서 생각해 보니 나만 말을 많이 했던 것 같아. 당신은 왜 아무 말도 안 한 거야? 하고 싶은 말이 없었어?"

먼 곳에 혼자 있을수록, 눈앞의 풍경 속으로 한 걸음 내디뎌 바람처럼 사라져 버리고 싶을 때가 있다. 나는 순간 저 창 너머로 사라져 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말은 마음을 대변하지만 절대적으로 대신하지는 않는다. 나는 그날 내가 놓친 단어들과 삼킨 문장들을 생각했다. 하지만 기억나는 건 그날 당신과 나 사이에 있던 부드러운 음악, 따스한 공기, 당신의 목소리, 달그락거리는 찻잔 소리, 작은 웃음소리와 그만한 미소, 당신의 숨소리, 그리고 아마도 식탁 밑에 떨어뜨렸던 이해와 위로뿐이다.


건너편 테이블의 사람들이 다시 덴마크어를 하고 있었다.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의 마침표들이 툭툭 떨어져 카페 구석으로 굴러갔다. 어제 하지 못한 말을 우리는 오늘도 못하고 산다. 그리고 어쩌면 오늘 하지 못한 말은 십 년 후에도 하지 못할지 모른다. 밖에는 바람이 많이 불었다. 이 먼 코펜하겐의 카페 바닥에 누군가 떨어뜨린 단어가 없는지 찾는 오후였다.

말이란 구멍 난 스푼에 담긴 수프와 같아서 전달하는 동안 항상 무언가 떨어뜨리게 되는 것이다.


/ 글, 사진. 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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