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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서 Apr 27. 2022

홍콩 서신

여행산문. 여행에세이

내일부터는 여름일 것 같은 날이었습니다. 종로 거리를 걷다가 여행사에 다니는 후배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세 시간쯤 있다가 출발하는 비행기 중에 제일 적당한 걸로 항공권 하나만 알아봐 줄래?" 그건 나를 조여 오는 여러 일들로부터의 도피이기도 했으나, 어디든 가면 체한 것 같은 내 안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게 가능할 것 같아서 이기도 했습니다. 가방에는 노트북 하나밖에 없고 갈아입을 옷 한 장 없이 홍콩에 도착했습니다. 나의 숙소는 오래되고 낡은 건물이었습니다. 붉게 녹슨 하모니카가 지상에 꽂혀있는 것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바람이 불면 불협화음이 들릴 것만 같았습니다. 나는 그 하모니카의 한 칸을 차지하고 앉아 글을 쓰거나 답답하면 가끔 산책을 나가곤 했습니다.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원고지 칸에 발이 빠져 꼼짝달싹 못하는 날이 며칠째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고물 에어컨에서 나오는 습한 공기가 기침하는 노인처럼 좁은 방을 서성거렸습니다. 나는 그날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바닥에 대자로 누워 파리 한 마리가 날아다니는 것만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가 들렸습니다. 좁고 경사가 심한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였습니다. 머리 위에서 들리기 시작한 그 소리는 잠시 후 내 아래로 이동하더니 삐걱거리는 철문 소리가 난 후 사라졌습니다. 30초 정도 되는 짧은 시간 동안 그 소리를 선명하게 들을 수 있었습니다. 난 메모지에 그녀의 모습을 묘사했습니다. 그녀의 모습을 억지로 상상하지 않아도 또렷하게 그릴 수 있었습니다. 눈앞에 계단을 내려오는 그녀의 발목부터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작지도 크지도 않은 키였고 허리에 벨트를 한 원피스를 입고 있었습니다. 하늘거리는 치마가 한걸음 한걸음 계단을 내려올 때마다 펄럭거렸습니다. 그녀는 경사가 급한 계단에서 넘어지지 않으려고 한 손을 벽에 대고 내려오고 있었고, 다른 한 손은 작은 빨간색 파우치를 들고 있었습니다. 머리는 짧았지만 손질을 오래 하고 나왔는지 옛날 영화 속 여배우의 머리처럼 단정했습니다. 난 그녀의 발이 교차되는 것을 바라보았습니다. 발끝에 힘이 들어갔는지 하얀 발목이 긴장한 듯 보였습니다. 덜컹. 철문이 열리고 닫혔고 그녀의 발자국 소리는 점점 희미해졌습니다.

그녀가 아파트를 빠져나간 후 나는 냉장고에서 맥주캔을 꺼내 마셨습니다. 시원한 맥주를 한 모금 넘기자 갑자기 많은 소리들이 크게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주변의 소음들이 마치 내 일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말을 시작하는 수다쟁이 아줌마처럼 떠들기 시작했습니다. 옆방에서는 며칠 째 마작 소리가 들렸습니다. 박자를 못 맞추는 캐스터네츠 소리 같았습니다. 복도 끝에서는 영어와 중국어가 섞인 대화 소리가 들리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오후가 지나갔고 어느덧 창문에는 건너편 빌딩의 네온사인이 비치고 있었습니다. 창문을 열면 후덥지근한 홍콩의 밤공기가 불쑥 들어왔습니다. 펼쳐놓은 노트북엔 다리, 소리, 계단이라는 단어만 적혀있었습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위층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와 작은 호흡소리가 천장에서 물방울이 새듯 툭툭 떨어졌습니다. 난 분명히 계단을 내려가던 그녀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언제 들어왔을까. 발자국 소리도 못 들었는데. 그날 밤 그녀의 방에서는 이런저런 소리가 계속해서 들렸습니다. 냉장고 문을 열고 닫는 소리, 희미한 음악 소리, 방안을 걸어 다니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고, 그러다 조용히 한 시간 정도가 지나면 뭔가 간절하게 외치는 목소리가 들리기도 했습니다.


다음날, 정오 즈음 그녀가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가 또다시 들렸습니다. 열쇠 구멍으로 그녀의 모습을 볼까 생각하는 사이 어제처럼 철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들렸고 그녀의 소리는 다시 희미하게 사라졌습니다. 그날 밤 나는 창가에 소파를 끌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맥주를 마시며 그녀가 돌아오길 기다렸습니다. 자정이 넘을 때까지 들리던 마작 소리도, 영국식 악센트의 대화 소리도 모두 잠잠해지자 어제의 그 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천장에서 침대 소리와 그녀의 호흡 소리가 뚝뚝 떨어져 내 방을 적시고 있었습니다. 난 소파에 웅크리고 앉아 소리에 집중했습니다. 그녀의 표정, 그녀의 등이 떠올랐습니다. 그런데 문득 이상한 겁니다. 오늘은 정신 차리고 하루 종일 집에서 기다렸는데 나는 그녀가 돌아오는 발자국 소리를 듣지 못했던 겁니다. 그럼 지금 이 소리는 그녀가 아닌 걸까? 매일 아침 나가는 그녀가 왜 돌아오지 않는지 혼란스러워서 머리를 흔들었습니다. 바닥에 고였던 소리들이 점점 증발하기 시작했습니다. 구름 같은 수증기가 창문을 통해 홍콩의 밤거리로 날아갔습니다.


아침이 됐고, 난 한 숨도 자지 않은 채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또각또각 계단을 내려가는 그녀의 발자국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녀는 똑같은 속도로 계단을 내려갔고 여전히 조심스럽게 철문을 열고 닫았습니다. 난 소리에 더 이상 집착하지 말자고 생각했습니다. 커피포트에서 물이 끓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노트북 앞에 앉아 뭔가 타이핑할 수 있었습니다.

깨어나는 홍콩의 혼잡한 소음은 이상하게도 시끄럽기보다 책 읽는 소리 같습니다. 채도가 높은 이미지들과 내레이션 같은 소리들로 채워진 아침이었습니다. 난 어제 사놓은 빵을 먹고 책상 위에 있는 선인장에 물 한 컵을 부어주었습니다. 홍콩은 꼭 폐관한 극장의 영사실 같습니다. 몰래 들어가 먼지 쌓인 영사기를 돌리면 매 장면마다 이어지는 이미지들이 내게 상실감을 전해주는, 그런 곳 같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토니 타키타니'라는 영화에는 주인공이 집에서 두부 한 모에 간장을 두르고 맥주 한 잔을 마시는 저녁 씬이 있습니다. 그때부터 나도 두부 한 모에 맥주 한 잔을 곁들여 먹는 것으로 저녁을 때우는 걸 좋아합니다. 두부라는 낱말은 이상하죠. 발음도 글자의 모양도 쓸쓸하게 느껴집니다. 나는 자주 그 쓸쓸함을 조용히 입에 넣습니다. 하루키의 소설 '토니 타키타니'에는 "토니 타키타니의 이름은 진짜로 토니 타키타니였다."라는 문장이 나오죠. 그 소설을 영화화한 동명 영화에서의 그 내레이션을 생생히 기억합니다. 이름을 두 번 읊는 것만으로 심장에 돌덩이가 쿵 내려앉는 문장이라니. 그런 단어나 문장이 있습니다. 난 그런 단어를 찾는 게 여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인생을 돌아보며 글을 써서 저울에 올리면, 백 자를 올려도 천 자를 올려도 쉽사리 기울지 않던 저울이, 모든 글을 지우고 끝내 버리지 못한 한 단어만 저울에 올렸을 때 휘청 기울지 모릅니다. 언젠가 신카와 가즈에가 했던 말처럼 그런 말을 찾는 게 시인의 일일까요 아니면 그런 단어를 감추는 게 시인의 일일까요.


오늘은 해 질 녘에 조금 오래 산책을 했습니다. 붉은 조명이 푸른 공기 속에 갇혀있었습니다. 공원 벤치에 잠시 앉았는데 오래전 사이쿵에서의 새벽이 떠올랐습니다. 헤엄치는데 앞으로 나가지는 못하던 개울 속의 열대어와 깜박거리던 편의점 형광등, 그리고 미안하다며 울먹이는 그녀와 공중전화를 벗어나서야 중얼거린 "안녕"이라는 혼잣말. 난 그 후로는 홍콩에 와도 사이쿵에는 가지 않습니다.

생각에 빠진 나를 까마귀 한 마리가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까마귀 소리는 항상 고독하게 느껴집니다. 여러 마리가 함께 있는데도 공중에 혼잣말을 외치는 것 같죠. 종종 나는 왜 늘 이방인이었을까, 왜 이별은 그토록 집요하게 날 쫓아다닌 걸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도 다시 홍콩에 오고 현실인지 꿈인지 모르는 소리에 비틀거리는 건 왜일까요.


햇살에 묻은 나무 그림자가 소리 없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참 많은 길을 돌아왔습니다. 그런데도 난 아직 얼마나 더 먼 길을 돌아가야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가끔 길을 돌아갔을 때 더 멋진 풍경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처럼 삶의 길도 보다 먼 길을 선택했더라도 그 여정이 더 아름다울 수 있는 것 아닐까요. 난 왜 남들과 같은 길을 걷지 않았는지, 내가 숨기려는 것도 아닌데 찾지 못하는 단어 하나가 무엇인지 아직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제는 적어도 자음과 모음이 부유하는 안개처럼 무언가 희미하게 보이는 것 같습니다. 그것만 남기면 될 것 같은데 단 하나만 남기는 것이 그렇게 어렵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말이지요. 커피잔을 하나만 쓰는 것도 어렵고, 관심을 하나로 줄이는 일도 힘듭니다. 사람들은 관심의 폭이 줄어드는 걸 두려워하는 것 같습니다. 그럴 필요 없는데 말입니다. 관심의 폭이 줄어드는 만큼 관심의 깊이가 깊어지지 않을까요. 하지만 무엇이든 줄이는 것이 늘리는 것보다 쉽지는 않을 겁니다. 우리는 살면서 “시야를 넓혀라.”라는 말을 자주 듣지만 실은 시야를 좁히는 게 그 보다 훨씬 어렵고 삶에는 더 중요한 일일 겁니다.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홍콩에 온 후 처음으로 전화를 받았습니다. 좋은 친구인데, 난 그 친구에게 뭔가 깊은 속마음을 전달하는 게 참 어렵다고 느꼈습니다. 어쩌면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신과 비슷한 사람과 아닌 사람을 구분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자기 속마음을 표현하지 못하는 고질병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누군가의 고독과 슬픔, 간절함과 안타까움을 공감하고 이해하는 건 힘든 일 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인정하는데 이해하는 척, 인내하면서 인정하는 척 말을 합니다. 나 또한 평생 그래 온 것처럼 또다시 인내하며 상대방에게 맞춰주는 자신을 발견하곤 문득 친구에게도 내게도 미안했습니다.


숙소로 돌아와 휴대폰을 침대에 던져놓고 의자에 앉았습니다. 문밖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녀가 돌아오는 걸까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잘 들리는데 난 왜 이제까지 나가는 소리만 듣고 돌아오는 소리는 듣지 못한 걸까. 하지만 더 이상 궁금하지 않았습니다. 찾으려는 단어 하나에 대한 생각이 더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휴대폰을 던지듯 보다 단절하고 고립하면 보일 것 같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건 길에 있지도 외부의 소리에 있지도 않다는 걸 이제는 알기 때문입니다. 그 단어는 원래부터 내 마음속에 있어서 날 둘러싼 많은 소음과 이미지를 걷어내면 결국 보일 것 같았습니다. 진실이 눈앞에 보이지 않는 건 진실은 항상 눈 안에 있기 때문 아닐까요. 그러므로 삶은, 의미를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무의미한 것들을 지워 나갈 때 더욱 의미 있어집니다.

오래전 그녀를 찾아갔던 홍콩에서 다음날 새벽 홀로 돌아온 후로, 나는 처음부터 그녀를 혼자 보내지 않았다면 배신도 실수도 이별도 없지 않았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사랑이 제일 중요하다고 말은 하면서도 일상의 많은 순간에 일을 먼저 선택합니다. 그것이  사랑을 유지하는 길이라고 생각하니까요. 그렇게 삶은, 너만 쥐고 나머지는  놓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도, 다른   놓으면 너를 잡을  없는 현실이 반복되는 것입니다.


오늘 밤도 마작 소리가 들렸지만 그 소리가 날 방해 하지는 않았습니다. 도리어 한 줄을 쓰면 마침표를 찍듯이 들리는 마작 소리가 나의 작업과 절묘한 타이핑 하모니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살면서 제일 힘든 게 뭔지 아시나요? 그건 단 하나만 남기는 일입니다. 그게 무엇이든 단 하나만 남겨서 그걸 끝까지 유지하는 일. 나에게 그 하나가 무엇인지 깨닫기 위해 여행도 하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저의 여행의 이유인 것입니다.

언제 돌아갈지 아직은 모르겠습니다. 여행에 끝이 있을까요? 끝이 있다면, 여정의 끝에서 난 반짝이는 윤슬처럼 허공에서 흩어지다 사라지고 싶습니다.



/ 글, 사진. 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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