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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서 May 02. 2022

타이프라이터를 치는 날

여행 산문. 여행 에세이.

글에는 촉감이라는 것이 있다. 어쩌면 그건 그저 기분일 뿐이겠지만, 적어도 나는 방금 인쇄한 종이 위에 새겨진 글자들을 만지면서 촉감을 느끼는 걸 좋아한다. 사람이 만든 모든 것들이 스크린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책, 그림, 사진, 영화, 악보, 편지 등 이전에는 우리가 각자 다른 방식으로 전달하던 것들을 이제는 다 하나의 스크린을 통해 보고 듣는다. 스크린으로 보는 사진은 인화지의 질감을 느낄 수 없다. 스크린으로 보는 책은 인쇄된 잉크의 질감을 느낄 수 없다. 스크린으로 보는 악보는 작곡가가 손으로 그린 음표의 느낌을 느낄 수 없다. 스크린으로 보는 그림은 물감의 질감을 느끼기 힘들다. 스크린으로 보는 편지는 편지지의 질감을 느낄 수 없다. 우리의 삶은 대체로 그렇다. 편리함은 감각을 마비시켜 아름다움을 축소시키고 불편함은 감각을 살아나게 해서 아름다움을 증폭시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유럽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는 아마도 시간이 멈춘 느낌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다. 수백 년이 넘은 건축물들이 즐비한 거리를 걷는 일은 여행자에게 행복한 일이지만, 때로 우리는 그렇게 오래된 것들을 지금도 사용하고 있는 그들의 일상 때문에 불편함을 느낄 때도 있다. 하지만 불편함이 커질수록 아름다움을 더 많이 접할 가능성은 높다. 그럴수록 그동안 무뎌졌던 여행자의 감각은 조금씩 살아나기 때문이다. 점점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이고 안 들리던 것들이 들리는 것이다. 나는 레이캬비크에서 쉽게 보이던 레코드 가게, 후쿠오카 신사의 벼룩시장, 파리의 브로캉트와 서점 등 여러 곳에서 아직 스크린 속으로 사라지지 않은 음반, 책, 그림 등을 손으로 만지고 볼 수 있었다.


어느 날 파리의 골목길을 걷다가 타자기 가게를 발견했다. 그러니까 책이나 인쇄된 무엇을 판매하는 곳이 아니라 그런 것들을 창조하는 도구를 파는 가게를 발견한 것이다. 대학교 앞의 흔한 복사집처럼 보이는 곳이었지만 쇼윈도에는 수동 타자기와 전동 타자기 여러 대가 진열되어 있었다. 나도 타자기로 글을 써 본 적이 있고 타자기를 너무나 좋아하기 때문에 그 가게 앞에서 오랜 시간 기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닦고 조이는 기계가 전자제품보다 애착이 가는 건 그 견고함 때문일 것이다. 무동력 잔디 깎기 같은 전기를 필요치 않는 연장이나 터치 스크린이 아닌 다이얼과 스위치로 조작되는 에스프레소 머신, 기름 따위 없어도 어디든 갈 수 있는 자전거 등의 기계는 내겐 너무나 매력적이다. 그러니까 인간의 힘만 있으면 인간을 위해 작동하는 물건들 말이다.


타자기는 무려 최초 발명된 후 150년 넘게 인류와 함께해 왔다. 스미스 코로나, 마라톤, 클로버, 레밍턴, 에르메스 등 브랜드 이름만으로도 타자기 애호가들을 설레게 만드는 모델들도 많다. 지금도 분명히 타자기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이제는 고장이 나면 스스로 고치거나 아직도 존재하는 몇 군데의 타자기 전문 수리점에 맡겨야 한다. 인류의 마지막 타자기 공장인 인도의 ‘고드레지&보이스’가 2011년에 문을 닫았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새 타자기는 구입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도 오랫동안 타자기가 사용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타자기는 컴퓨터와 달라서 공구를 들고 고치는 그야말로 기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견고하다. 백 년 넘은 컴퓨터는 쓰레기일 뿐이겠지만 백 년 넘은 타자기로는 여전히 글을 쓸 수 있다.


생각해 보면 어릴 때 내가 좋아하던 것들은 모두 전기가 필요 없었다. 현미경, 망원경, 만화경, 펜과 붓, 스케치북 같은 것들이 고장 날까 봐 불안했던 기억도 없다. 몇 년 전 나는 사용하던 맥북 프로를 팔고 마라톤 한글 타자기를 샀다. 멀쩡하게 작동이 잘 되는 걸 확인하고 구입했지만 무엇보다 잉크 리본이 떨어지면 어떻게 구해야 하는지 걱정됐다. 그리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타자기 리본을 검색했더니 판매하는 온라인 쇼핑몰이 많았다. 생각보다 아주 많아서 걱정할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 그건 몰랐던 비밀조직들이 활동하고 있는 걸 발견한 느낌이랄까. 무척 설레는 일이었다.

지난달에는 컴퓨터에 연결해 놓고 사용하던 두 개의 대용량 외장하드가 둘 다 오류가 생겼다. 순식간에 데이터가 반 이상 사라졌고 복구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님을 알았다. 하루에 반 이상을 컴퓨터 앞에 앉아 있지만 쓰던 글이 삭제될까 봐 중간중간 저장하며 조심해야 한다니, 컴퓨터는 그렇게 연약하고 불안한 물건이다. 하지만 타자기는 그렇지 않다. 전진과 후진, 틀리면 다시 치는 방법밖에 없고 종이가 파일처럼 사라질 이유도 없다. 타자기가 고장이 나더라도 이를 고치는 건 컴퓨터를 고치는 것과 다르다. 전자제품 애프터서비스 센터에 찾아가서 보드를 고치거나 바이러스를 퇴치하는 일보다 타자기의 고장 난 레버나 카트리지를 조이고 기름칠을 하는 과정이 훨씬 매력적이지 않은가. 작가가 데이터를 잃는 것만큼 끔찍한 일은 없다, 그렇다면 데이터가 날아갈 확률은 컴퓨터와 타자기 중 어느 것이 높을까?


타자기는 감정이 담긴 기계다. 인공지능이 마치 감정이 있는 것처럼 우리에게 말을 걸 시대가 코앞에 다가와 있지만 그런 교감과 타자기의 차가운 표면을 만질 때 느끼는 묘한 감정은 다른 것이다. 아직도 존재하는 타이프라이터 수리점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화가 있다. 난 그 영화를 너무나 좋아하는데 그 영화에서 배우 톰 행크스는 작은 액자를 보여주며 그것이 Thank you note라고 말한다. 점심을 같이 먹은 것에 대한 감사편지를 받은 것이라는 것이다. 타자기로 친 간단한 감사의 말이 얼마나 감동적이었으면 액자에 넣어놓았을까. 톰 행크스는 아마도 그 사람과의 관계를 쉽게 끊을 수 없을 것이다. 톰 행크스는 타자기 애호가다. 실제 여러 대의 타자기를 수집도 하고 있고, 자신의 책상 위에 타자기를 놓고 항상 사용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스미스 코로나의 소리는 작고 부드럽고 올림피아의 소리는 작고 견고하다며 소리의 차이를 들려주었다. "키보드의 높이가 완벽해요. 자판 크기도 적당하고. 소리의 견고함도." 그리고 타자기로 친 감사 편지에 대해 진짜 이 사람이 내게 감사하고 있다는 걸 느낀다며 이렇게 말한다. "감사 편지를 이메일로 보내는 건 성의가 없죠. 진짜 고마운데 7초 만에 이메일을 보내요?"


그러니까 타자기 앞에 앉아서 무언가 쓰려고 할 때 우리는 신중해진다. 그만큼 무작정 타이핑하기보다 손가락이 움직이기 전에 머릿속에 문장을 먼저 쓰고 속으로 읽게 되는 것이다. 타자기는 사용에 공이 드는 만큼 더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있다. 우리는 글쓰기의 상당 부분이 구상이라는 것을 안다. 그리고 많은 작가들이 자신이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그저 게으른 사람처럼 보일 것이라고 많이 생각할 것이다. 작가가 그 구상의 시간을 인정받는 건 애초에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만일 타자기 앞에 앉아서 팔짱을 끼고 빈 종이를 쳐다보고 있다면 어떨까. 확실히 컴퓨터 앞에 앉는 것과 타자기 앞에 앉는 건 다른 느낌이 있는 것이다. 그런 만큼 타자기로 쓴 편지는 손글씨로 쓴 편지처럼 정성스럽게 느껴지지 않을까.


음악가 존 메이어는 타자기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종종 불후의 명곡은 호텔 메모지에 적힌 채 발견되곤 합니다. 누군가 그 악상을 발견하면 누가 그 아이디어를 끄적였는지 어떤 아이디어였는지 바로 알 수 있을 거예요. 나는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메모했다가 전동 타자기로 써놓고는 합니다. 메모를 타자기로 치면 다시 읽어보지만 컴퓨터로 쳤다면 다시 읽어보지 않을 겁니다. 다들 컴퓨터에는 저장된 게 있다고 생각하지만 난 대체로 그걸 열어보지 않습니다. 그건 언제든 쓸 수 있지만 절대 안 쓰는 쓰레기 같아요. 게다가 그런 파일들은 어떻게 썼는지 과정을 알 수 없지 않나요. 그냥 깨끗하게 편집된 마지막 원고만 스크린에 뜨는 거예요."

우리에겐 의식의 흐름이라는 것이 있다. 그러나 컴퓨터로 편집을 하면 그 의식의 흐름을 따르기 힘들다.  

타자기로 칠 때는 실수도 소중하다. 실수한 부분이 그대로 남기 때문에 의식의 흐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어떤 단어가 바뀌었는지 어떤 표현으로 수정했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컴퓨터로 완성한 원고는 작가의 완성된 생각만 알 수 있지 그 의식의 흐름을 들여다볼 수는 없다. 물론 소프트웨어에도 수정 기록을 남기는 기능이 있지만 그런 기능이 타이프라이터에서 줄을 바꿔 다시 타이핑하거나 되감아 덧치는 등의 행위와 같은 느낌을 전달하지는 않을 것이다.


크리스토퍼 숄스는 최초의 타이프라이터를 발명한 사람이다. 숄스의 타이프라이터가 엘런 튜링의 인류 최초의 컴퓨터보다 위대하다고 말하긴 힘들지 모른다. 그러나 이제까지 타이프라이터를 사용해서 쓰인 수많은 시와 소설과 극본 등의 이야기가 얼마나 많은 책으로 출판되고 영화로 만들어지고 무대에 올려졌는가. 그중 어떤 문장은 고백을 할 때 사용돼서 한 가족과 그 후대를 만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기계의 힘은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

사람들은 글이란 읽는 것이므로 시각의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때로는 낭독을 하거나 소리 내어 읽으니 청각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 오래된 책이나 서점에서 맡을 수 있는 책 냄새도 있으니 후각과도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글에는 촉감도 존재한다. 프린터에서 인쇄된 종이보다 타자기로 잉크 리본을 강하게 쳐서 새겨진 친 글자의 촉감은 다르다. 타자기로 친 글자는 잉크의 두께도 종이에 새겨진 깊이도 달라서, 만지면 컴퓨터 프린터에서 인쇄된 문서와는 확실히 다른 느낌을 느끼게 된다. 어떤 작가는 타자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종이 표면에 잉크가 날아가 팡! 박히고 스며드는 느낌. 내가 쓰는 이야기가 그렇게 강렬하게 새겨질 때 난 정말 살아있는 이야기를 쓰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유럽에서 처음 자동차를 렌트한다면 오토매틱 기어 자동차가 없을 때가 많아 당황하기 쉽다. 언젠가 스틱 자동차를 빌려서 꼬뜨 다쥐르 해안도로를 달릴 때 느꼈던 기분을 잊을 수가 없다. 그 기분은 오토매틱 차로는 절대로 느낄 수 없는 것이었다. 나와 차가 하나가 되는 일체감과 견고함을 느끼며 드라이브를 하는 건 신나는 일이다. 견고함은 안정감을 제공해 준다. 웬만하면 고장 나지 않을 것이라는 안심. 나만 잘하면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믿음.


내가 인도에 있던 오래전에는 실제 인도의 거리에서 타이프라이터 하나 내놓고 앉아서 사람들에게 편지나 문서를 타이핑해주며 돈을 버는 사람들이 많았다. 뭄바이의 마지막 타자기 공장이 문을 닫은 후 노동자는 물론 타이핑을 대신해주는 많은 인도인들도 실업자가 되었을 것이다. 인쇄소나 신문사의 식자공도 이제는 사라진 직업이다. 컴퓨터는 인간의 많은 직업을 사라지게 만들었고 앞으로 더 많은 직업을 잃게 만들 것이다. 과학자들은 인류가 특이점 앞에 있다고들 말한다. 어쩌면 이미 지나버렸을지 모른다. 그러나 인공지능이 나중에 타자기를 다시 만들어낼지도 모른다. 인공지능이 결국 감정을 가진다면 말이다.


타이프라이터를 좋아하는 미국의 한 작가가 쓴 타이프라이터 선언문이라는 것이 있다. 난 이 선언문이 마음에 들어서 벽에 붙여 놓았다. 그가 이 선언문을 인터넷을 통해 공개한 후 세계의 많은 타이프라이터 애호가들이 공감해서 각자의 언어로 타이핑한 선언문을 다시 그 작가에게 보내는 현상이 벌어졌다. 언젠가 나도 다시 타이프라이터를 산다면 한국어로 타이핑해서 그에게 보내고 싶다.




타이프 라이터 선언문


우리에겐 현 패러다임을 거부할 권리가 있다.

정보 체제를 거부하고

데이터 홍수에서 벗어나야 한다.

의존, 감시, 분열에 반하여

독립, 사생활, 결합을 위해 싸우겠다.


다중 매체, 다중 작업, 밈에 반하여

글로 쓴 말과 생각을 지키겠다.


대리가 아닌 진짜를 선택하고

디지털이 아닌 실물을

지속 불가능한 것 대신

지속력 있는 것을

효율보다 자급자족을 선택한다


혁명은 타자기로 쓰일 것이다.


- 차드 폴트



/ 글, 사진. 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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