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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피동 Aug 15. 2021

인어 마마

함께 다시 쓰는 안데르센 세계 명작

  바다 왕국의 막내딸 인어공주는 물 위 인간 세상에서 노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어릴 적부터 수면 위로 떠올라 지나는 배들을 구경하고, 겁도 없이 배에 탄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기도 해 인어공주의 아버지인 왕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외출을 못하도록 바다 궁전에 가둬 보기도 하고, 호위무사들을 늘려 공주를 밀착 감시해보기도 했지만 공주의 물 위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잠재울 수 없었습니다. 고심 끝에 왕은 바다 마녀를 찾아갔습니다.


  “인어공주가 당신을 찾아오면 편하게 육지를 다닐 수 있도록 인간들의 두 다리를 주시고, 여행이 끝나고 바다로 돌아올 때 다시 꼬리를 돌려주시오. 공주가 육지에서 답답함과 외로움을 느껴야 여행이 짧을 테니, 육지에 나간 동안 인간들과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도록 목소리를 맡아주시오. 내 부탁을 들어주면 당신에게 적절한 지위와 왕실에 당신이 거처할 곳을 마련해주겠소. 마법이든 요술이든 평생 맘껏 할 수 있을 것이오.”

    

  인어공주는 수시로 바다 마녀를 찾아가 비늘이 아름답게 수 놓인 늘씬한 꼬리를 희고 매끈한 다리로 바꿨습니다. 꼬리를 구르며 미끄러지듯 수면 위로 오르는 것과 양다리를 번갈아 차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너무나 달랐습니다. 온몸으로 물이라는 벽을 뚫고 나아가는 것처럼 버겁고 숨이 찼지만 인어공주는 힘이 들면 들수록, 숨이 차면 찰수록 손끝부터 발끝까지 세포 하나하나가 살아 움직이는 듯 엔도르핀이 마구 솟아났습니다.    


  발갛게 상기된 채 기분 좋은 흥분감을 느끼며 육지로 나온 인어공주는 태양 빛에는 흰 조약돌처럼 눈부셨고, 달빛에는 모래알처럼 반짝였습니다. 누구든 인어공주를 한 번만 보면 사랑에 빠졌습니다. 육지의 많은 남자들이 인어공주를 아꼈고, 그녀는 그중 가장 멋지고 예의 바른 한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남자는 인어공주를 보고 '길에서 찾은 사랑스러운 여인'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은 파도가 부서지는 단단한 바위 위에서, 고소한 수프 향에 밴 남자의 포근한 침대 위에서, 음악과 마차와 사람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가득한 도시에서, 뱃고동을 울리며 유유자적 헤엄치는 작은 돛단배에서 둘은 키스를 하고 사랑을 나눴습니다. 눈빛만으로도 사랑을 주고받은 그들에게 인어공주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는 큰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바다와 육지를 오가며 달콤한 연애를 하던 인어공주는 인간 남자의 아이를 임신하게 되었습니다. 인어공주는 근심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인어는 원래 바다에서 출산을 하는데, 만약 인간 아이를 낳게 되면 호흡 문제로 세상에 나오자마자 죽게 될 것이 분명하였고, 반대로 육지에서 출산을 하는데 만에 하나 인어 아이가 태어난다면 마찬가지로 살 수 없게 될 것이었습니다.

  

  인어공주는 자신에게 찾아온 생명을 절대 버릴 수 없었습니다. 바다 마녀를 찾아가서 뱃속의 아이가 인간인지 인어인지 물어보기로 했습니다.


  “마녀님, 제 배 속에 아기가 있어요. 인간입니까? 인어입니까?”


  “공주님, 전 왕과의 거래를 통해 많은 것을 누리고 있습니다. 나의 의무에는 공주에게 벌어지는 일들을 왕에게 보고하는 것도 있지요. 이 일을 왕이 알게 되면 공주도 나도 무사하지 못할 것입니다.”


  “아버지에게 알려도 상관없어요. 어차피 전 떠날 것입니다. 아기에게 바다와 육지 중 어디가 가장 좋을지 그것만 말해주세요. 마녀님 당신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전 지금 제 인생 전부를 걸고 마녀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의 간절한 마음을 모른 척 말아주세요.”    


  "인어의 수명은 300살입니다. 하지만 뱃속의 아이는 고작해야 100년 정도밖에 살지 못해요. 공주님과 다른 존재입니다. 아이의 탄생과 죽음을 모두 지켜보게 될 것이에요. 공주님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왕과 함께 의논하는 것이 어떨까요?"


  "인어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말이군요. 고마워요. 그리고 아버지와 함께 이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어요. 아버지는 절 이해하지 못할 것이에요. 달콤한 유혹과 함께 나를 자신의 손바닥 위에 두고 빤히 지켜보시고 계시잖아요. 당신과의 거래만 봐도 알 수 있어요. 이번 일을 아버지가 알게 되시면 분명 저를 다른 손바닥 위에 올려놓으시고 말 거예요. 옆 바다 왕자와의 결혼 같은 것으로 날 꽁꽁 묶으려 할지 몰라요."


  "왕과의 계약 때문에 당신에게 두 다리를 주면 전 당신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어야 해요. 목소리도 없어 인간 아이를 키워야 한다고요."


  "희망을 빌어주세요."

 

  인어공주의 등 뒤로 바다 왕궁이 보였습니다. 말할 수 없는 비밀을 간직한 채 고향을 떠나려니 심장이 슬픔으로 부서질 것 같았습니다. 성을 향해 수없이 입맞춤을 보낸 뒤 검푸른 바다를 헤치고 위로 올라갔습니다.


  인어공주는 가장 먼저, 자신을 '길에서 찾은 사랑스러운 여인'이라고 불렀던 사랑하는 남자를 찾아갔습니다. 하지만 남자는 이미 육지에서 노래를 가장 잘 부르는 어느 여인과 새로운 사랑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마음이 변한 남자를 원망하는 것보다 뱃속의 아이를 지켜야 했습니다. 인어공주에게 가족은 이제 아이뿐이었습니다.     


  더 이상 여행객이 아닌 인어공주는 육지에서 살기 위해 돈이 필요했습니다. 다행히 바다에서 나는 진주는 비싼 값에 팔렸고, 그녀는 머리카락보다 더 많은 진주가 숨어 있는 비밀 장소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눈을 피해 육지로 온 인어공주가 바다로 들어가면 금세 잡힐 것이 뻔했습니다. 인어공주는 샛별도 잠드는 칠흑 같은 밤, 자정이 되면 바다 물결에 맞춰 물살도 거스르지 않고 조심조심 바다로 들어가 진주를 가지고 왔습니다.


  인간의 도시는 각양각색의 물건들만큼이나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육지에서의 생활은 바닷속 생활과 천지 차이였고, 여행할 때와 달리 잔인하게 상처를 입는 날도 있었습니다. 말할지 못한다는 이유로 그녀를 얕잡아보고 진주 값을 제대로 쳐주지 않는 사람도 있었고 함부로 그녀의 몸을 만지며 추행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낯선 땅에서 살아보고자 애쓰는 그녀를 가엽게 여겨 끼니를 챙겨주고 있을 곳을 마련해주는 좋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인어공주는 크고 둥근 눈망울을 가진 남자아기를 낳았습니다. 남자아기는 자랄수록 점점 인어공주를 닮았는데, 인어공주는 어쩐지 자신의 아들을 볼 때마다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인어공주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까지 더해 아들을 정말 사랑했습니다. 온 마음을 쏟으며 잘 자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키웠습니다.


  하지만 말 못 하는 어미가 자식을 키우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아이는 10살이 다 되도록 어눌하게 말하였고, 또래보다 언어 학습 능력은 뒤쳐져 아이들의 놀림감이 되기 일쑤였습니다. 하지만 진정 아이를 괴롭히는 것은 인어공주에 대해 무성한 소문이었습니다.   

  

  홀로 남자아이를 키우는 인어공주에 대한 온갖 추문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말도 못 하는 여자가 매일 값비싼 진주를 팔고 있으니, 진주의 출처에 대해 무궁무진한 상상력이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이어지며 사실화되기 일쑤였습니다.


  무성히 돌고 돌던 소문은 어떤 '사실 아닌 사실'을 만들어 냈는데, 주인공이 말 못 하는 농어라 확인이 안돼 다시 소문처럼 풀어 흩어지기를 몇 번. 급기야 인어공주가 밤마다 늙고 돈 많은 노인네 욕정을 풀어주고 대가로 받은 진주를 팔아 아들을 키우고 생계를 잇는다는 것이 기정사실이 되어 인어공주에게 통보하기 이르렀습니다.  


  인어공주는 부정해 보았지만 손을 두어 번 내 젓는 것으로는 진실을 말할 수 없었습니다. 워낙 싼 가격에 품질 좋은 진주를 팔았기 때문에 소문과 달리 장사는 꾸준히 잘 되었습니다. 아들과 함께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중요했던 인어공주는 자신이 주인공인 허튼 소문에 귀를 닫았습니다.     

  

  하지만 아들은 아니었습니다. 말 못 하는 어미 대신 귀를 활짝 열고 사람들의 말을 하나하나 새기며 더듬더듬 반박했습니다.


  “우,리, 엄마,는 그,런 사......람, 아닙,니다.”


  어느 날 15살이 된 아들은 어눌하게 내뱉는 말과 말 사이에서 인어공주를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엄마는 왜 밤마다 집을 나가는 것일까? 자신이 보고 들은 사실에 대한 궁금증이 15세의 호기심만큼 일었습니다.    


  자정. 육지도 바다도 컴컴한 어둠에 뒤덮여 하나의 거대한 공간처럼 느껴지는 밤. 인어공주는 옷을 벗고 여느 때와 같이 바다에 들어가 진주를 가지고 나왔습니다. 젖은 머리칼을 채 미처 말리지도 못하고 서둘러 집으로 가는데, 아들이 현관문 앞에서 인어공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디, 다녀,와,요?”


  아들은 인어공주의 양손에 든 진주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말했습니다. 인어공주의 머리칼을 타고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보다 더 빠르게, 아들의 얼굴에 눈물이 흘렀습니다. 아들은 곧장 인어공주에게서 도망쳤습니다. 멀리 뛰어갔습니다. 물고기처럼 입만 벙긋벙긋 거리며 뒤따라오는 인어공주에게서, 도시에서 가장 후미진 곳으로, 세상의 끝으로 뛰고 또 뛰었습니다. 조용한 밤거리에 들리는 거라곤 아들과 인어공주의 뛰는 소리뿐이었습니다.

     

  정신없이 뛰다가 어느 순간 미로 속에 갇힌 듯 인어공주는 길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아들은 보이지 않았고, 아들의 발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번쩍, 저 멀리 땅끝에서 불빛이 일렁였습니다. 바다 가까이에 있는 낡은 외양간인데 지난번 해일이 덮쳤을 때 버려져 지금은 새들의 놀이터가 된 곳이었습니다.


  막 눈이 녹고 봄이 오려는 날, 밤. 미련스러운 겨울이 밤마다 서성이는 아직 추운 날입니다. 아들은 말하기보다 불을 피워 제 몸을 덥히는 것을 먼저 익힐 만큼 추위를 많이 탔습니다.


  인어공주는 불길한 생각에 서둘러 그곳으로 달려갔습니다. 불길이 춤을 추며 활활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외양간을 집어삼키듯 불길이 치솟았습니다. 흔들리는 불길 사이로 아들의 모습이 시커먼 그림자로 언뜻언뜻 보였습니다. 본능적으로 아들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뜨거운 열기가 그녀를 뒤덮었지만 머리카락이 타들어가는 줄도 모르고 엎어져 있는 아들을 잡아끌었습니다. 아들은 나무기둥 아래 깔려 옴짝달싹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미 정신을 읽은 아들은 물먹은 솜처럼 늘어져 인어공주 혼자 끌어내기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인어공주는 도움을 요청하려고 크게 소리쳤으나 소리가 들리지 않았습니다.


  타오르는 불길 너머로 샛별이 보였습니다. 아침이 오기 전 마지막 힘을 내는 별빛이 캄캄한 하늘에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거울을 비춘 듯 별빛이 바다 위로 쏟아졌습니다. 인어공주는 별빛에 간절한 마음을 실어 보냈습니다.


  “마녀님, 마녀님, 제 목소리를 돌려주세요.”


  순식간에 마른 장작처럼 야위고 늙은 두 다리를 아름다운 비늘이 뒤덮었습니다. 밤하늘 별보다 화려하게 빛나고, 영롱한 진주보다 더 오묘한 빛으로 마음을 홀리게 하는 인어공주의 꼬리가 나타났습니다. 인어공주는 화염이 아들을 헤치지 못하게 온몸으로 감싸고 힘껏 소리 질러 사람들을 불렀습니다.


  "불이야! 살려주세요!"


  새벽녘에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외양간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사람들은 십시일반 가까이 있는 바닷물을 퍼올려 불을 껐습니다. 이미 탈 데로 탔기 때문에 불은 생각보다 빨리 꺼졌습니다. 사람들은 아들을 구하기 위해 형체도 없이 타버린 외양간 안으로 들어섰다가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새카맣게 탄 커다란 인어가 쓰러져 있는 아들을 꼭 안고 있었습니다. 아들은 그 어느 곳도 탄 흔적이 보이지 않습니다.


  태양이 떠오르고 따스한 바람이 부드럽게 스며들었습니다. 인어의 몸에서 검은 재가 나풀나풀 실려 바다로 날아갑니다. 저 멀리 바다에서 몇몇의 인어가 고개만 비쭉 내밀고 이곳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인어공주는 아버지에게 인어는 300년 정도 살다 영혼도 없이 그대로 바다 거품이 되어 사라진다고 들은 적이 있습니다. 거품이 될 때는 서늘한 바다를 유영하듯 편안하게 온몸이 스르륵 녹는 느낌이라고 했습니다. 거품이 된 인어가 말해줄 리 만무하지만 인어공주는 아버지인 왕의 말을 믿었습니다. 거품이 되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바다가 되어 많은 생명들을 품고 쏟아지는 별빛을 받는 거라고 그러니 슬퍼할 필요 없다고 아버지는 말했습니다.

  

  불길은 뜨거웠습니다. 하지만 인어공주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들에게 이 말을 할 수 있어서 비늘이 녹아 흐르는 고통도 잊을 만큼 행복했습니다.


  "아들아, 사랑한다. 엄마가 정말 사랑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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