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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넛버터B Aug 29. 2023

4. 바니바니 당근!당근!

반려 물건이라 불러 본다

당근! 당근!



요즘 당근이 참 달다. 단단한 식감을 느끼며 켱쾌하게 씹다 보면 달콤함이 입 안에 스며들고 고소함까지 느껴진다. 예전에 당근을 생으로 먹는 것은 상상도 못 했던 일인데. 편식 심하던 입 맛도 강산 따라 함께 변해가는 가 싶다. 


매일 같이 당근 먹는 재미를 잠시 제쳐두고 다른 당근에 빠져 재미를 볼 때가 있다. 바로 '모두의 당근'. 당신의 근처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거래. 당근마켓이다. 


집을 뒤적 거린다. 오늘은 주방이다. 물건을 탐색하고 거실로 꺼내 놓는다. 오래 사용하지 않은 물건들은 역시 비닐이라도 덮어 두었다. 과거의 나를 칭찬한다. 그래도 혹시나 싶어 먼지를 닦아 내고 채광 좋은 곳에 잠시 둔다. 찰칵찰칵 사진을 찍어 놓으면 절반은 됐다. 쇼핑백에 물건을 담아 현관에 둔다. 그리고 휴대폰을 들고 소파에 반쯤 눕듯이 앉는다.  






새 커피 머신을 들여 구석에 들어가 있던 커피 머신이 첫 타자다. 그라인더도 세트로 팔면 더 잘 팔릴 거라는 나름의 세트도 구성해 본다. 떠날 때를 알고 떠나는 이의 뒷모습은 아름답다지. 이 녀석 뒷모습. 좀 멋지다.


오호! 이거지 이거. 이건 좀 무겁다. 차라차라 쭉쭉 야채며 과일이며 신선한 즙을 뽑아주던 착즙기. 이것만 있으면 아침을 생과일즙으로, 생야채즙으로 건강하게 시작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사놓고 10번이나 썼을까. 50만 원 정도를 주고 사서는 10번을 썼으니 1번에 5만 원의 비용을 지출한 셈이다. 그런데 왜 아직 껴안고 있을까. 버리려니 아깝고, 무슨 이유를 갖다 붙여 놓고 처분하지 않았을까. 생각났다. 김치 담글 때 쓰면 좋을 것 같다 생각이 들었었던 것이었다. 5년 전에도 안 담근 김치를 퍽이나 5년 후에는 담글까. 예나 지금이나 내 입 맛은 조선호텔 김치다. 앞으로 입 맛이 바뀔지는 모르겠지만, 김치를 직접 담그지 않을 것이라는 99.99%의 확신은 든다. 그래서 이제 너도 안녕. 


먼저 올린 녀석보다 착즙기가 먼저 연락이 온다. 당근! 당근!     


경쾌하게 들리는 저 소리. 손에 현금이 5만 원 쥐어졌다. 왜 이렇게 기분이-가 좋은 것일까. 1회에 5만 원을 주고 쓰다가 50만 원짜리를 5만 원에 팔아 놓고는 기분이-가 좋다. 나는 바보인 것이었던 것인가. 






물건을 버리는 것은 쉽다. 물건을 나누는 것은 귀찮다. 물건을 파는 것은 피곤한 일이다. 시간적 여유와 마음의 여유가 없을 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저 물건을 처분하는 것을 '노동'의 관점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노동의 대가가 따라오는 일일지라도 도저히 처리할 에너지가 없어 버리기도 했다. 후회한다. 


이제는 관점을 바꿔 본다. 인생에 짝이 되는 물건. 정서적으로 의지도 되고 실질적인 도움도 주는 물건. 나만의 '반려 물건'. 함께 하며 많은 것을 주고 떠나가는 존재. 그렇게 함께 하려고 한다. 


그래서 결국은, 


쉽게 사지 않을 것이다.

함부로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보내주는 일에도 책임을 다 할 것이다. 





Photograph source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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