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ika aka 도깽이 엄마 Jun 25. 2021

현실육아와 모성애 사이 II

모성애 프레임에 갇혀버리다

아이가 태어난 지 52일째 되던 날, 나는 남편에게 아이를 맡기고 우리 집에 와서 혼자 하룻밤을 보내기로 마음 먹었다. 물론 금요일이라 가능한 일이기도 했지만 금요일이 아니었어도 번 아웃 되어 있던 나는 무조건 가야 했다. 그날도 낮에 아기는 이유 없는 잠투정을 2시간 넘게 부렸다. 너무나도 지치고 힘든 나는 아이와 함께 목 놓아 울어 버렸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냐고, 졸리면 자면 되지 않냐며 아이에게 울며 불며 호소 했다. 내가 울자 아이는 잠시 당황했는지 울음을 멈추더니 나 보다 더 큰 목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어머님께서 퇴근 해 돌아 오시고 나의 이야기를 들으시더니 연신 웃으셨다. 내가 울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으신 듯 했다. 그리고 내가 울었다는 이 재미난 에피소드는 온 식구들에게 전해 지고 수화기 너무 이모님께도 너무나도 재미난 에피소드로 남겨졌다. 


그날 밤 용산 집으로 올 채비를 하는데 어머님께서 진짜 가냐며 당황해 하셨다. “괜찮아요 남편이 있잖아요 어머님” 그러자 어머님은 “그래도 애 엄마가 애랑 떨어져 하루를 보내겠다고?” 우리 어머님은 여느 시어머니와 달리 쿨 하셔서 이런 걸로 잔소리를 하거나 날 비난하는 건 아니셨다. 오히려 이 사실을 알았다면 친정엄마가 날 더 비난 했을지 모른다. 어머님은 단지 아기 엄마가 아기를 남겨두고 아무렇지 않게 간다는 것에 적지 않게 당황을 하셨던 것 같다. 난 잽싸게 내 짐을 챙겨 애한테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얼굴 한번 보지 않고 나왔다. 그렇다, 어머님은 이런 유형의 애 엄마는 본적이 없으셨을 거다. 




현실육아에서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건 잠투정을 부리는 아이도, 방해 받는 나의 단잠도 아니었다. 물론 그런 것들이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맞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정말 더 힘들다고 느껴지는 건 우리 내 정서가 만들어 놓고 기대하는 모성애 프레임이다. 즉 “엄마는 이래야 한다,” “엄마는 원래 이런 거다,” “엄마니까, 엄마인데, 엄마잖아……” 엄마라는 이름 아래 여자는 없는 모성애도 발동 시켜야 하고, 강해져야 하고, 희생해야 한다. 또 누구나 다 그렇게 살기 때문에 힘들어도 힘들다고 말하면 안되고, 늘 아이에게 웃는 얼굴로 대해 주어야 하며, 힘들지만 보상 받는 게 있다고 믿어야 하고 그러기에 다른 미혼의 혹은 신혼 부부에게 아이는 꼭 낳아야 하는 존재라고 전도 해야 한다.  


상대적으로 나처럼 자기애가 강해서 모성애가 잘 생기지 않는 사람도 있고, 누구나 다 그렇게 살지만 힘든 건 힘든 거라 말하고 싶고, 나처럼 엄마도 울고 싶어 울 때가 있고, 너무 힘들어 거짓 친절을 베풀 수가 없는데 마치 엄마는 그러면 안 되는 것처럼 강요 받는 이 분위기가 나를 너무 지치고 힘들게 했다. 남편이 육아를 나 몰라라 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남편도 주말과 본인의 휴가 때는 비교적 열심히 함께 해주고 있다. 하지만 남편은 기본 적으로 아직은 내 역할이 본인의 역할보다 더 크다고 생각한다. 


아이가 아장아장 걷기 시작하고 말문이 트이면 본인이 여기도 데려가고 저기도 데려가고 캠핑도 가고 등등 많은 계획들을 세워 놓고 있다. 하지만 이 신생아 시기에는 아빠인 자기 보다 섬세한 엄마가 좀 더 잘 할 수 있다고 믿는 듯 했다. 연약한 아기가 자기가 잘못 안아서 뼈라도 부러지면, 얼굴에 상처라도 나면 이란 생각이 시작포인트였다. 그러나 몇 번 안아보니 결국 아이에게 아무 일도 일어 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처음 응가 기저기를 갈아 달라 할 때에도 한발자국 물러나서 먼저 어떻게 하는지 보여주면 다음 번에 자기가 해 보겠다고 한다. 어이가 없었다. 사실 그때 나도 처음이었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해보겠냐고 말한 건데 나는 마치 여러 번 해본 것처럼 말을 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너도 처음 해보는 거겠지만 그래도 이런 건 원래 엄마가 더 잘 하니까……” “혹은 엄마가 더 많이 해야 하니까 그냥 네가 해”로 들렸다. 이것도 결국엔 “엄마니까, 엄마잖아” 라는 마인드에서 나온 말일 거다.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 남편은 말할 수도 있다. 아니 진짜 그런 의도가 아닌데 내가 왜곡 하는 것일 수도 있다. 어찌 보면 나는 지금 모두가 나를 모성애라는 프레임안에 가두어 놓았다는 피해망상에 젖어 있는걸 수도 있고 아니면 진짜 가두어 놓았지만 본인들은 그걸 인지 못하는 걸 수도 있다. 그렇다면 왜? 그건 아마 한번도 모성애라는 프레임 밖에서 엄마를 생각해 본적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남편이 나랑 결혼을 결심하게 된 데에는 나의 성격이 한몫 단단해 했다. 나는 여느 여자들처럼 이유 없이 화내거나 삐지 거나 울음을 무기 삼지 않았다. 논리적으로 남편이 잘못한 게 없는데 괜히 내 기분이 별로라고 신경질 부리지 않았다. 본인이 경험했던 유형의 여자랑 다른 그 성격에 끌려 나랑 평생을 함께 하고자 결심했다고 한다. 그래서 남편에게 말했다. 당신이 끌렸던 그 다른 부분을 잘 생각해 보아라. 나는 여러 방면으로 일반 여자들이랑 다른 사고 방식을 가지고 사는 여자다. 내가 다른 여자들에 비해 남자를 이해 하는 폭이 넓어서 좋았겠지만 그 만큼 나는 일반 여성들에 비해 모성애가 적고 자기애가 강한 여자다. 


모든 여자들이 애를 낳았다고 모성애가 갑자기 생기지 않는다. 하지만 모성애라는 프레임 안에서 최대한 모성애 있는 여자처럼 본인을 훈련 시키고 육아 선배들의 말에 위안을 삼으며 고생 끝에 행복이 있겠지 라는 믿음아래 아이를 키우는 것이다. 물론 처음부터 넘치는 모성애를 가지고 있는 엄마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을 전환하기까지 남들보다 엄청난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육아 52일차인 나는 아직 그런 생각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그러니 쿨 하게 아이 얼굴 한번 보지 않고 우리 집에 와 이런 글을 쓰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내 기준에 엄마도 행복한 육아를 하려면 정말 비현실적인 세팅이어야만 한다. 상주 하는 입주도우미가 아이를 24시간 케어 해주고 일주일에 2번 정도 청소 해주시는 아주머니가 오시고 그래서 나는 내가 좋아하는 요리에 전념하고 아이와 즐거운 육아를 하다가 내 볼일을 봐야 할 때 혹은 휴식이 필요할 때는 외출을 맘껏 할 수 있으며 밤에는 통잠을 잘 수 있는 그런 비현실적인 육아. 정말 비현실적이지 않은가? 아닌가? 내가 재벌가 며느리쯤 되면 아님 진짜 월 2000만원 정도 벌면 가능한 일일까? 한마디로 대다수에 사람들에게는 불가능 하다는 이야기 이다. 누군가는 나를 비난 할 수 있다. 너무 이기적인가 아니냐고! 엄마가 그렇게 날로 먹는 직업인줄 아냐고! 누구는 그런 육아 꿈꿔본 적 없냐고...... 




그렇다! 난 이기적이다. 엄마란 직업이 날로 먹는 직업이 아니라는 것을 몸소 체험하고 있는 내가 그걸 모르는 걸까? 알지만 경험해 보니 내가 행복한 엄마가 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 들었기에 나도 행복해 질 수 있는 비현실적인 육아를 잠시나마 상상해 본 것이다. 


현실육아 안에서 내가 아이를 미워하거나 정서적으로 학대를 하거나 그렇다는 건 아니다. 솔직히 말하면 아이는 무슨 죄인가? 자기가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이 아닐 텐데…… 그리고 자기도 무엇이 불편한지 말을 하고 싶지만 아직 말을 할 수 없기에 그것이 울음으로 밖에 표현이 안 되는 것 일 텐데 그게 힘들다고 이렇게 투덜거리는 나는 아직 미성숙한 엄마가 맞다. 단지 이러한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 몹시 불편하고 또 이럴 거라는걸 어렴풋이 짐작했음에도 조심하지 않고 이런 상황을 만들어 버린 내 자신에게 화가 나는 것뿐이다. 아이를 갖자는 남편의 설득도 한몫 크게 했지만 그렇다고 이 상황이 남편의 탓은 아니다. 육아 선배들의 말처럼 이유 없이 남편이 미울 때가 있다지만 그 또한 이유가 없기에 남편의 잘못이 아니다. 그러기에 나는 그 누구에게도 화를 낼 수가 없다. 그저 오로지 내 자신에게만 화를 낼 수 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 했던가? 52일차에 주어진 꿀 같은 휴식이 나에게 재충전의 시간이 되어 집에 돌아 갈 때면 웃지는 못해도 조금은 아기가 보고 싶어졌으면 좋겠다. 이 글을 쓰고 있는 52일차, 아니 12시를 넘겼으니 53일차 새벽 2시21분에는 아이가 내 옆에 없다는 것이 허전하기 보다는 너무 달콤하니 좋다. 솔직히 그닥 보고 싶지도 않다. 그냥 나의 소울메이트인 남편이 보고 싶을 뿐이다. 남편과 함께 데이트를 하고 연애 때처럼 우리 집에 같이 올 수도 있었지만 아이도 아빠와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핑계로 남편도 내 고통을 잠시나마 맛 보게 해주고 싶었던 마음이 크다.


엄마니까, 엄마라서 이래야 하는 건 없다.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프레임 안에 내 자신을 가두지 말자. 엄마라서 무조건 희생하고 양보 하는 건 내 스타일의 육아는 아닌 것 같다. 최선을 다해서 그리고 사랑을 주며 아이를 키우겠지만 남들이 생각하는 그런 엄마는 나는 될 수 없을 것 같다. 그것이 아이한테 미안하지 않다. 왜? 내 아이 못지 않게 나는 내가 소중하기 때문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현실육아와 모성애 사이 I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