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절대 애를 버리고 가지 않았다!!!
52일만에 주어진 꿀 같은 휴가는 손가락 부상으로 안타까운 최후를 맞았다.
그 잠시 주어졌던 휴식 같지 않은 휴식이 끝나는 53일째 날의 아침이 급 서프라이즈 방문을 했다.
평상시에 절대 대문의 안전바를 걸어 잠그지 않는 나인데 그날은 정말 그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자 하는 의지가 강했던 것일까? 아무도 집에 못 들어오게 안전바까지 걸어 잠그고 숙면을 취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문이 덜컹덜컹 거리는 소리에 놀래 잠에서 깼고 급 데이트라도 하자고 시키지도 않은 서프라이즈를 한 남편이 열리지 않는 대문과 씨름하고 있었다.
안전바를 풀어 볼 테니 기다려 보라는 나와 힘껏 밀 테니 비켜보라는 남편의 외침 속에서 나의 왼쪽 가운데 손가락은 대문에 찌여 손톱은 다 들리고 손 끝은 골절이라 하셨다. 그리하여 주말포함 3박4일의 수술 및 입원 치료를 하게 되었고 2020년 12월 11일경 난 사고는 197일이 지난 지금까지도 자라나는 새 손톱을 보호하기 위해 붕대로 감겨져 있다. 그때의 그 악몽은 지금 생각해도 오금을 저리게 만든다. 사람이 너무 아프면 악 소리도 안 난다고 내가 딱 그랬었다. 아마 완벽히 자라서 자리잡아 원래 손톱모양으로 돌아오려면 아마 2달은 더 기다려야 할지도 모른다.
사고 후 집에 돌아왔을 때 어머님은 괜찮냐며 걱정을 많이 해 주셨다. 그리고는 웃으면서 놀리셨다.
“거봐 애기 엄마가 애 버리고가니 사고가 나지 하하하”
어머님은 분명 우스개소리로 하신 거….
그래서 그 말이 딱히 상처가 되거나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다시금 거론되는 애기 엄마가…. 엄마가…. 그 놈의 모성애 프레임이 날 기분 나쁘게 하였다.
난 내 아들을 버려 두고 가지 않았다. 100일 안된 아기이니 옆에서 누군가 먹여주고 씻겨주고 기저귀만 잘 갈아주어 아이가 안전하게만 있을 수 있다면 엄마가 꼭 매 순간 옆에 있어야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모든 걸 잘 할 줄 아는 남편도 있고 또 남편 보다 훨씬 베테랑인 어머님 아버님이 계신데 어찌 내가 아들을 버린 걸까? 만약 내가 진짜 아이를 버린 것이라면 그 아이의 안전 상태도 장담 받지 못해 경찰이나 119가 달려와야 하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난 반대로 아이를 세상 가장 안전한 집이란 공간에 가장 믿을 수 있는 가족들과 함께 두었는데 어찌 버렸단 말인가?
수술 후 적어도 1달 정도는 2~3일에 한번 정도 소독하러 갔어야 했다. 수술 부위에 물도 닿으면 안되었고 초반 얼마간은 골절 난 손가락도 움직이지 말라고 고정되어 있었다. 그러다 보니 분유를 타 먹이는 건 할 수 있었으나 기저귀 가는 일과 젖병 세척이 무척 힘들었다. 그리하여 아들은 수술 직후부터 내 손가락이 어느 정도 나을 때까지 할머니랑만 자기 시작했고 아들은 점점 할머니 방을 본인 방으로 인지하기 시작하여 생후 249 일이 지난 오늘까지도 오늘은 누구랑 자던 할머니 방에서 자야만 한다.
그리하여 나의 연말 연시도 그리고 아이의 100일 잔치 까지도 붕대로 감긴 손가락과 함께 해야 했다.
100일의 기적이란 말이 진정 있는 것일까? 거짓말처럼 100일이 지나니 아이는 2~3시간 마다 깨지 않고 조금 더 통잠스러운 잠을 자기 시작했다. 밤에 적게는 한번 정도 밖에 깨지 않았고 낮에 활동량이 많아 지고 있었다. 물론 낮에 활동량이 많아지고 밤잠이 길어지니 낮잠을 전 만큼 자주 안 잔다는 단점은 있지만 옹알이도 하고 나랑 눈도 마주치기 시작했다. 눈을 마주치면 귀여웠다. 가끔 웃어 주기라도 하면 나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어머 너무 사랑스럽고 귀여워!,” “어우 심쿵이야!” 정도의 호들갑의 느낌은 또 아니었다. 세상 모든 아기는 그냥 이정도 귀여움은 다 있는 것 아니던가?
아이의 100일 잔치가 있었던 2021년 1월 말 남편이 회사를 그만두고 백수가 되었다.
남편이 회사를 안 가고 도깽이 육아에 24시간 동참할 수 있음에 너무나도 신났다.
그리하여 도깽이는 엄마 아빠와 매일 매 순간을 함께 할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