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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ka aka 도깽이 엄마 Feb 07. 2024

엄마 됨을 후회함

아이와 나의 안전거리 확보

출산 후 내가 이런 글들을 쓰기 시작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난생처음 느껴 보는 이 감정들이 생소했다. 그래도 아이를 낳으면 나도 어느 정도의 모성애라는 것이 생길 줄 알았다. 그런데 16개월이 지나 이제 20개월이 얼마 안 남은 지금도 사실 난 남들이 말하는 그런 모성애는 없다. 좋게 말하면 그저 하루하루 주어진 내 삶을 열심히 살려고 노력할 뿐이고 나쁘게 말하면 하루하루를 꾸역꾸역 살아야 하니 살아내고 있다. 정신줄을 놓지 않고 잘 붙들고 하루하루를 간신히 살아 내고 있는 나 자신이 대견스럽다.


모성애 없는 이런 내 모습이 나조차 신기하지만 또 이게 진정 나의 모습이기도 해서 굳이 내 감정을 타인들에게 속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타인이란 내가 아닌 사람은 모두 타인이기에 가족들에게도 속이고 싶지 않았다. 우리 어머님이 보시기에 나는 아마도 아주 이상한 며느리 일 것 같다. 애 엄마인데 전혀 애 엄마 같지 않고 물론 합가를 해서 살고 있으므로 더 그럴 수도 있지만 난 나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을 때는 그냥 철면피 깔고 애를 거실에 두고 내 방에서 나가지 않는다. 방문을 닫고 무언가 거창한 걸 하는 건 아니지만 그냥 누워서 아무것도 안 하기도 때론 핸드폰을 하기도 아님 글을 쓰거나 과외 준비를 하곤 한다. 하지만 그 마저도 30분의 한 번씩은 기웃거려줘야 할 거 같아 한 번씩 나가보곤 한다.


나의 이런 감정이 솔직하게 표현되는 것도 한두 번이지 이 경험들이 쌓이면 남편이 불편해하기 시작한다. 남편만 불편한 게 아니겠지만 직접적인 표현은 남편만 하니 남편만 느끼는 걸로 생각하기로 했다. 어차피 처해진 상황, 그저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이 상황을 그저 하루빨리 받아들이기 원하는 남편과 나만 조금 생각을 달리하면 모든 것이 편할 거라고 나도 생각하지만 그게 애쓴다고 되는 게 아니라서 한없이 답답한 사이에서 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중이다. 단순한 짜증도 아닌 그렇다고 화도 우울도 아닌 이 요상한 감정들이 그날그날의 나의 컨디션을 좌지우지한다.




11개월이 가까이 오던 어느 금요일

남편이 아이가 모닝 낮잠을 자기 전 즉 10시 이전에 후다닥 여주 아웃렛이나 놀러 가자 한다.

오래간만에 아웃렛에 갈 생각에 무척 설레어 흔쾌히 가겠다고 했으나 아침형 인간이 아닌 나는 11시쯤 출발하면 좋겠다는 소망이 있었다. 그 정도는 남편도 괜찮다 했다. 아마 도깽이 이전의 삶이었다면 그저 씻고 옷만 입고 가볍게 핸드백 하나만 들고 나서면 되니 내가 아침형 인간이 아니어도 금방 준비하고 10시 즈음 떠났을 것 같다. 그렇지만 이젠 내가 씻는 게 문제가 아니라 장거리 이동을 해야 하니 도깽이 짐을 꼼꼼히 싸야 했다. 몇 시까지 밖에 있을지 모르니 11개월에 먹던 이유식 및 간식거리를 꼼꼼히 많이 챙겨야 했고 손수건도 넉넉히 챙겨야 하며, 기저귀와 물티슈는 당연하고 쪽쪽이와 아이 물통도 빼먹으면 안 된다. 그리고 당시에는 분유를 간간히 먹고 있기 때문에 여분의 우유병 2개와 보온병에 분유 타기 적정 온도의 물도 챙겨야 했다. 이유식 먹일 숟가락도 당연히 빼먹으면 안 되고 장거리 나들이라 혹시 모르니 여벌 옷도 챙겨가야 했다. 매번 싸는 짐이고 기본적인 짐들은 항상 가방 안에 들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매번 짐을 챙길 때마다 빼먹는 것들이 생겨 당시만 해도 남편한테 한 소리씩 듣곤 했다..


이러다 보니 비몽사몽은 절대 안 되고 나의 세포들이 어느 정도 깨어 있을 때 싸야 했다. 그래서 잠이 깨고 열심히 짐을 챙기고 있는데 도깽이가 잠이 들어 버렸다. 결국 남편은 도깽이 일어나서 가면 너무 늦고 특히나 금요일 퇴근 시간과 맞물리면 고생이라 하여 그날 아웃렛 나들이는 보기 좋게 무산되었다. 그때부터 난 급격하게 기분이 안 좋았었다.


이유 없이 안 좋았다. 아니다 이유가 없진 않았다. 난 그날 아웃렛을 가고 싶었으나 갈 수 없었다. 그래서 기분이 나빴다. 물론 내가 몽롱한 정신에 짐을 후다닥 싸고 애가 잠들기 전에 애를 카시트에 앉혀 놓았다면 가는 동안 애는 자고 덩달아 나도 자다 도착해 즐거운 하루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비몽사몽에 짐을 싸고 싶지 않았고 그래서 결과는 그날 내가 원하는 걸 하지 못했다. 애가 태어났으니 당연히 포기하는 게 있어야 한다. 내가 진짜로 가고 싶었다면 비몽사몽이던 비몽사몽의 할아버지이던 후다닥 준비를 하고 갔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내가 편할 때, 내가 가고 싶은 시간에 준비해서 가고 싶은 마음이 더 큰 것이다. 내가 서둘러서 애한테 맞추어 비몽사몽을 가느니 그냥 집에 있는 게 나을 것 같다고 판단했지만 그러고 나니 또 가지 않은 것에 대한 속상함이 밀려오는 것이다.




15개월의 어느 날

아주 오랜만에 아는 동생과 호캉스를 가기로 했다. 그 친구는 기혼자이지만 아직 아이가 없다. 그러나 흔쾌히 도깽이를 데려와도 좋다고 했다. 나의 솔직한 마음은 애초부터 도깽이를 데려가고 싶지 않았지만 나 혼자 친구랑 호캉스를 가겠다고 남편과 시부모님께 달랑 애를 맡기고 가기가 왠지 그냥 괜히 나답지 않게 눈치를 딱히 주는 사람 없지만 눈치가 보였다. 그래도 아버님이 말썽 피우면 전화 한 통에 금방 오실 수 있는 거리다 하셔서 마음을 좀 편하게 가지기로 했다.


요즘은 이런 일이 종종 생긴다. 밖에 나돌아 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나와 남편이지만, 잠시의 외출을 위해 저리 바리바리 애 짐을 챙겨야 하는 게 너무 싫어서 집콕하는 일이 많아졌다.


그렇게 친구의 배려로 시작된 호캉스의 시작은 좋았으나 17만 원어치 스테이크들 앞에서 여기저기 레스토랑 안을 돌아다니는 아들과 난 결국 2조각을 간신히 구겨 넣은 채 쫓겨났고 친구 역시 혼자 먹으려니 이 맛도 저 맛도 아니라 반도 못 먹고 나와 버렸다.


그날도 난 화가 났다.

맛있는 고기

아까운 고기

분위기도 좋았고 좋아하는 유튜브 영상도 틀어 줬는데

꼭 그렇게 찡찡거리며 사방팔방 돌아다니다 쫓겨나야 했던 것이 맛있고 아까운 고기보다 창피했다.

아들을 안고 방으로 내려오는데 나도 모르게 너무 속상해서 눈물을 주르륵 흘리고 말았다.

그리고 방에 와서 바로 가족들을 호출, 결국 아버님이 금방 데리러 오셨다.

그날 밤 난 너무 오랜만에 친구랑 단꿈에 젖은 시간을 보냈다. 몸이 천근만근이라 자고 싶은 마음 동시에 자는 시간이 너무 아까워져서 새벽까지 같이 또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다 감기는 눈꺼풀에 마지못해 잠이 들었다.




아이가 돌이 좀 지나서부터 내가 읽게 된 책이 있다. “엄마 됨을 후회함”이라는 책인데 오나 도나스라는 이스라엘 사회학자가 연구한 실험 결과를 정리해 놓은 것이다. 제목부터 내가 좋아할 수밖에 없는 책 제목이었고 내 마음을 아주 잘 표현해 주는 제목이라 생각했다,


이 책은 단순하게 엄마 된 걸 후회해요 라는 단순한 외침보다는 엄마도 때로는 혹은 종종 엄마 된 것을 후회한다는 그러니 그 감정으로 인해 괜한 죄책감을 느끼지 말라는 뜻이기도 하다. 서로 말을 안 할 뿐이지 누구나 한 번쯤은 느껴봤을 감정이라는 거다. 그러니 더 이상은 모성애 프레임에 나 자신을 가두어 나의 슬픈, 화난 그리고 그 외에 육아를 하며 생기는 부정적인 감정들을 긍정적인 최면으로 포장하지 말라는 이야기다. 엄마 됨을 후회하는 것과 내가 아이를 사랑하는 현재의 감정은 별개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앞 챕터에서 말했듯 “사회적 모성애” 그리고 “좋은 엄마”라는 이 프레임들이 엄마들로 하여금 이따금씩 드는 매우 자연스럽고 인간적인 이 감정들을 “나쁜 감정” “옳지 않은 감정”으로 치부하고 있었다. 이 책 제목을 보던 우리 남편은 “제발 이 딴 책 좀 읽지 마!”라고 했지만 읽는 내내 속이 시원하고 내 생각이 맞았다. 엄마 됨을 후회하는 건 지극히 정상적인 감정일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후회한다고 해서 그 분풀이를 아이한테 하고 있다면 그것이야 말로 아동 학대이자 나쁜 엄마의 표상이겠지만 나는 누구보다 주어진 내 임무에 충실하고 최선을 다 하고자 한다.




지금 이 글을 이어 쓰고 있는 시점에서 아이는 훌쩍 자란 만 39개월이 지났다. 대략 만 28개월 때부터 어린이 집에 입소해 다니고 있으며 그 어떤 아이보다 밝고 행복하고 건강하게 개월 수에 맞게 잘 크고 있다. 말이 빠른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기본 의사소통은 어눌하지만 다 할 수 있고 요즘은 배변 훈련에 한창이다. 그동안 다시 일을 시작해 이래저래 바쁜 나날들을 보내기도 했고 무엇보다 이번 챕터는 현실육아에 좀 더 적응해 더 많은 경험들이 쌓은 후에 마무리 짓고 싶었기에 오랜 시간이 걸렸다.


현실육아를 좀 더 해 보니 이러했다. 아이가 어린이 집을 가니 오후에 수업들을 나가더라도 오전 시간에 자유로움이 생겨 오전 사교 모임과 일할 시간이 확보되어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침에 9시면 칼 같이 등원 준비를 시작해야 하므로 가정보육을 할 때처럼 늦잠이 허락되지는 않지만 그래도 등원시키고 다시 잠을 잘 수도 있으니 괜찮다. 다만 이걸 시작으로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매일 아침 이렇게 등원을 시켜야 할 거라 생각하면 지금도 숨이 턱 막힐 때가 있다.




의사소통이 되면 좀 더 편해지는 부분이 확실히 많다. 말을 하기 시작하면 신기하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하고 또 어디서 이런 말은 배워왔나 싶기도 해서 너무 사랑스럽지만 그만큼 고집과 자기주장이 생기고 떼를 부릴 때도 당연히 있다. 늘 친절하려 노력하는 엄마지만 단호하고 안 되는 게 많아서 아이는 나를 가족들 사이에서 3~4위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다. 내가 3위면 남편이 4위 반대로 남편이 3위면 내가 4위다. 1,2위는 당연히 같이 살고 있는 할머니 할아버지다. 사람들은 내게 묻는다, 서운하지 않냐고. 당연히 난 서운하지 않다. 아이가 할머니랑 같이 자고 할머니 할아버지랑 어쩌면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그들이 1,2위 인건 너무나도 당연하지 않은가? 그리고 아이는 아마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 엄마는 나에게 딱 이 정도의 이만큼의 감정이니 무한의 사랑만 주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아이 역시 제일 좋을 것이다. 한 만큼 돌아온다고 나도 내 감정을 정확히 알기에 전혀 서운하지 않다. 아이에게는 나를 좋아할 권리만큼 덜 좋아할 권리도 있다.


이렇다 보니 나의 현실 육아 적응기는 좀 더 수월 해졌다. 아이가 엄마 껌딱지가 아닌 할머니 껌딱지다 보니 나는 자연스레 숨 쉴 시간들이 생긴다. 일 하러 갔다 와서도 지치고 피곤하면 아이가 할아버지 방에서 할아버지랑 노는 동안 잠시 쉴 수도 있고 또 아침에 등원 준비는 할머니랑만 하려는 아이라 할머니가 계실 때는 내가 여유롭게 준비할 수 있다. 아이와 생겨버린 이 적당한 거리감이 난 너무 좋다. 이 거리감으로 아이를 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고 아이를 나의 소유물처럼 여기지 않으니 당연히 집착도 하지 않는다. 내가 원하던 딱 그만큼의 안전거리가 확보되었다.




이 안전거리 확보로 난 벌써 아이에게 너의 인생은 너의 인생 나의 인생은 나의 인생이라는 모토를 세울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인생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독립심을 길러주려 한다. 39개월 시점에서의 독립심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스스로 해 보고 또래 집단에서 경험하는 불편한 감정들도 엄마에게 해결해 달라 오지 않고 스스로 해결해 보는 정도가 되겠다. 나는 아이가 최대한 독립적으로 클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주고 있다. 정말 아이러니하게 들릴 수도 있는데 조부모님들과 같이 살기에 독립심이 길러지기 매우 힘든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나의 의지와 노력 그리고 적당한 귀차니즘과 무관심이 아이의 독립심을 길러 주었고 어린이 집 첫 상담 때도 선생님께서 독립적인 아이라고 칭찬해 주셨다.


도깽이는 요즘 들어 특히 예쁘고 사랑스러워 하루에도 몇 번씩 물고 빨고 하지만 예쁘고 사랑스러운 감정 딱 거기까지 인 거지 “아 역시 참 아니 낳기를 잘했다” “그래도 애가 주는 행복감이 훨씬 더 크다” 까지는 아닌 것 같다. 물론 아이를 통해 하는 자아성찰도 있고 인간으로서 내가 성숙해지고 있는 부분도 조금은 있다. 다만 좀 더 더딘 자아성찰과 덜 성숙하한 나 자신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종종 든다. 나름의 “풋내미”도 나에겐 잘 어울렸을 것 같고 내가 아는 몇몇의 지인들에도 그 “풋내미”가 더 어울렸지만 우리는 어쩌다 보니 육아 동지들이 되어 있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자의가 아닌 타의 즉 나는 방심 그들은 와인으로 인해 “풋내미”를 잃었다고 기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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