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싶은 사람

by 빛나는

결혼한 지 10주년이 되어 선물로 선글라스를 받았다. 실은 몇 달 전부터 내 멋대로 골라두고 남편에게 통보했다. 겨울의 끝자락인 2월이 기념일인데 따가운 태양을 가리는 선글라스를 사달라니. 남편은 얼마냐고 묻기 전에 먼저 이유를 물었다. 나는 더 잘 보기 위해서라고 답했고, 남편은 그게 무슨 소리냐며 반문했다.


작가가 무엇인지 잘 몰랐을 때는 골방에 죽치고 앉아 자판을 두드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조금 역동적인 걸 떠올리자면, 빨간 펜을 들고 밑줄을 좍좍 긋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종이를 찢는 그 정도의 장면을 상상했다. 실제로 접한 작가들은 산으로 바다로 여행을 떠났다. 색다른 것을 보고 남다른 생각을 떠올리기 위해서. 똑같이 흘러가는 일상에서 자신만의 고유한 시선을 찾아내기 위해 무언가를 지긋하게 살펴보기도 했다. 주로 자연 만물에서 영감을 얻었다. 꽃이나 나무 그리고 구름과 노을에서, 심지어 돌멩이 하나로도 수많은 문장을 만들어냈다.


나도 그들을 따라서 주변 사물을 집중해서 바라봤다. 옷걸이는 무슨 이야기를 할까, 그릇은 무슨 말을 속삭이는지 떠올려 보기를 시도했다. 말 그대로 어떤 글감이 떠오를 때까지 그 물건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런데 감이 쏟아지지는 않고, 눈만 아팠다. 나에게 맞는 소재를 찾으러 다녀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글을 쓰기 전에는 홀로 카페에 있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누군가를 기다리거나 잠깐 시간을 때우러 가는 게 전부였다. 요즘은 카페가 나의 글감 놀이터가 되었다. 노트북을 켜고 앉아 옆에서 나누는 대화에 귀를 기울이며 무슨 상황일지 예상해 보곤 했다. 약간 은밀하고 이상한 취미 같긴 하지만, 어차피 카페에서 떠드는 내용은 다 공공재가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생각으로 내 행동을 합리화했다.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을 보고, 그 사람의 사연을 그려본 적도 있었다. 커다란 테이블에 노트북을 세워두고 경영학책을 쌓아둔 아저씨. 대학교 전공 서적 같은데 직업이 교수일까. 지금은 방학이니까 학생은 아니겠지. 아, 혹시 고학생인가. 늦은 나이에 공부를 하려니 뒤처질 것 같은 거야. 집에서 공부를 할 수가 없겠지. 왜냐하면 아이들이 놀아달라고 할 테니까. 이런저런 장면을 떠올리면서 나 혼자만의 줄거리 만들었다. 역시나 사람을 관찰하는 일이 가장 흥미로웠다.


어느 날은 아이와 함께 걷고 있는데, 동네 할머니가 ‘아이고, 예쁘다.’ 하면서 우리를 불렀다. 안면이 있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사탕 하나를 아이 손에 쥐여주고는 사랑이 가득한 눈빛을 함께 보냈다. 그 시선에 섞인 묘한 그리움과 아련함이 내 눈에 들어왔다. 오래도록 보지 못한 자신의 손주를 떠올리는 걸까. 아니면 시들어가는 생에 대한 미련일까. 그 할머니의 눈동자를 깊게 마주하고 싶었다. 그뿐만 아니라 주름이 깊게 파인 손과 쏟아질 듯 굽은 등에는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을지. 내 아이를 바라보는 할머니를 오래도록 쳐다봤다. 헤어지는 발걸음이 아쉬웠던 사람은 달콤한 간식을 받은 아이도 아니고, 앙증맞은 아기를 본 할머니도 아닌, 바로 나였다.


점차 주변 사람들에게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그러다 시선을 느낀 사람이 내 쪽을 휙 쳐다볼 때면 나는 황급히 다른 곳을 보거나 그 사람 뒤를 보는 체했다. 어설플 수도 있지만 살짝만 시선을 비틀어도 괜한 시비 붙을 일은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보다 더 자연스럽게 사람들을 관찰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마음이 조마조마한 건 매한가지다. 더 들여다보고 싶은데 못내 아쉽기도 했다. 상상의 끈이 툭 끊어져 버리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잘 보려면 선글라스가 필요했다.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려도, 눈길이 오래 머물러도 괜찮으니까. 촌스럽게 새까만 색을 골랐다고 타박하는 남편에게 ‘뭘 알겠느냐.’라고 속으로 외쳤다. 사실 구구절절하게 말로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언젠가 내 글을 읽는다면 그땐 이해하게 되지 않을까, 내가 무엇을 보고 싶어 하는 작가인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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