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라노 게이치로의 <한 남자>를 읽고
따지고 보면 전부 내가 구체적으로 맞붙어야 하는 문제들이야. 하지만 생각하기 시작하면 그때마다 몸이 몹시 힘들어져. 나 자신의 존재가 전혀 보장되지 않는 듯한 고통이 느껴지고. 그런데... 아까 얘기한 인물에 대해 조사하는 동안만은 왜 그런지 마음이 풀렸어. 아무튼 타인의 삶을 통해 간접적으로는 내 인생을 마주할 수 있었어.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될 것들도 생각해 볼 수 있고. 하지만 직접 생각하는 것은 아무래도 힘든 것 같아. 몸이 거부하는 통에. 그래서 아까 소설이라도 읽는 것 같다고 말했던 거야. 다들 자신의 고뇌를 단지 자신만으로 처리할 수 없잖아?
누군가 심정을 의탁할 타인을 원하고 있지.
작년에 개봉했던 영화 <한 남자>의 원작, 히라노 게이치로의 <한 남자>를 소설로 읽었다. 대략의 줄거리는, 바에서 만난 한 남자 (기도 아키라) 와의 만남으로 시작된다. <이방인>의 뫼르소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이 남자가 처음에는 자신의 직업과 신분을 속였다가 작가인 '나'와 다소 친해지자 자신이 사실 변호임을 밝히며, 찾고 있는 어떤 남자에 대한 얘기를 꺼낸다.
리에는 뇌종양에 걸린 두 살 된 아들 료를 떠나보내고 장례식 후 남편과 아이 문제로 대립하다 11개월 만에 이혼하고 얼마뒤 아버지가 급사로 돌아가신다. 한 해에 가족을 두 명이나 떠난 보낸 리에는 미야자키현의 자그마한 소도시 S시로 돌아와 아버지의 문구점을 운영하며 슬픔 속에서 살아가던 중, 스케치북에 풍경화를 그리기 위해 문구점을 찾던 31살의 다니구치 다이스케를 만나 용기를 내어 다시 행복한 가정을 꾸리게 된다. 그러나 임업을 하던 그는 불행히도 39세의 나이에 자신이 벌목한 삼나무에 깔려 죽게 된다. 리에는 장례식을 치르기 위해 그가 말했던 여관을 운영하고 있는 형에게 연락을 취하고 나서야 그가 다니구치 다이스케가 아니라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다. 그녀가 유일하게 믿을 만한 사람, 전남편과의 이혼상담을 해주었던 변호사 기도 아키라에게 이 기묘한 사건을 의뢰하면서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기도는 정체성을 알 수 없는 그를 'X'라 칭하고 나서 X의 형을 만나고, 옛 애인을 만나면서 그의 뒷모습을 따라가듯 행적을 하나하나 밟아 나간다. 재일교포 3세인 기도는 본인이 재일교포라는 것을 느낄 수 없을 만큼 유복한 환경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동일본 대지진 이후, 간토 대지진 때의 일본인 대학살 같은 일이 본인의 가정에도 일어날 수도 있다는 불안한 마음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부인과는 오랫동안 잠자리를 하지 않고 있었다. 쇼윈도 부부 같은 생활이지만 그는 자식을 생각해서라도 이혼은 원치 않았다. 아내는 일본 대지진 이후 많이 변한 것 같았다. 가족보다 타인을 위해 챙기기 위해 시간을 내서 봉사하고 일을 지나치게 열심히 하는 그를 이해하지 못했고 그로 인해 둘 사이의 문제는 점점 더 불거져 갔다. 그녀는 무려 2년 동안 'X'를 찾아 헤매는 남편이 바람을 피우고 있다고 의심을 하기도 했다.
고인이 된 하라 마코토 씨는 리에씨와 함께 보낸 3년 9개월 동안 처음으로 행복을 알았다고 생각해요. 그는 그 시간이 정말로 행복했을 거예요.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것이 그의 인생의 전부였겠지요.
2년 동안 찾아 헤맨 끝에 베일에 가려졌던 'X'의 정체가 밝혀지는데, 그는 동일본 대지진 때의 혼란기에 두 번의 신분세탁을 거친 하라 마코토라는 인물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도박빚에 돈을 빌리러 찾아간 아들의 친구 부모님과 아들의 친구까지 일가족을 살해한 희대의 살인마였다. 그 멍에로 아들 하라는 고등학교 내내 시달림을 받으며 평생을 고통 속에 살아야 했다. 그는 프로 복싱선수로서 유망주의 길을 걸을 수도 있었지만 신분이 알려지는 게 두려워 중개인을 통해 거리의 소매치기로 한 번, 집안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아버지께 간이식을 강요받았던 다니구치 다이스케로 두 번의 신분세탁을 했다. 리에를 만났을 때 그는 30대 중반의 나이에도 마을의 풍경 그림을 스케치북에 묵묵히 그려 넣는 맑고 고운 심성을 지니고 있었다.
남편의 진짜 이름과 그가 살아왔던 완전히 낯설고 불행한 인생을 알게 된 리에는 그와 함께했던 시간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그녀의 큰아들 유토와 그의 아픔과 숨기고 싶었던 인생과 같이 살았을 동안의 추억을 기리며 장례식을 치른다. 그리고 'X'를 그토록 오랫동안 힘들게 찾아 헤맸던 이유가 타인을 통해 자신의 삶을 마주하기 위해서였음을 깨닫게 된 변호사 기도는 아내와 대화를 나누면서 오랫동안 엉켜있던 서로에 대한 응어리를 풀게 된다.
"자기가 좋아하는 이야기를 생각하고 그것을 마음에 담는다는 것은 일종의 재능이죠. 웬만해서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게다가 역시 타인을 통해 자신과 마주한다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닐까요?
타인의 상처받은 이야기에 그게 바로 나다, 라고 감동하는 것 밖에는
위로받지 못하는 고독이 있거든요."
누구나 한 번쯤 인생의 어딘가에서 완전히 다른 삶을 살기를 꿈꾸어 본 적이 있지 않을까?
동일본 대지진과 같은 일을 경험한 후에 겪게 되는 극도의 불안감이 현실의 삶을 의탁할 타인을 찾게 만든 것일까. 작가는 'X'라 불릴 수밖에 없었던 인물의 행적을 따라 작품에 대한 몰입도를 높이고 갑작스러운 그의 죽음, 누군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게 하는 미스터리한 요소들을 가미해 흥미를 불러일으키면서 조금도 방심하지 않도록 처음부터 끝까지 긴장감을 더한다. 한 남자의 인생이 어떻게 이토록 불행할 수 있는 것인지. 그리고 행복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어 보이는 등장인물들...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 속 액자를 들여다보듯 한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그의 인생을 뒤쫓으며 앞이 보이지 않는 우울한 거리를 걷고 있는 듯하다가 마지막에 리에의 아들 유토가 지은 일본 특유의 단시인 하이쿠를 보는 순간 가슴이 멍해졌다. 삼나무에 올라간 매미 울음소리가 거기에 오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매미 껍질에서 울리고 있다는 짧은 시. 나도 하이쿠와 비슷한 느낌으로 시 한 편을 지어본다.
타인의 삶을 바라보면서 지금의 내 모습을 투영해 보고, 지금 혹시 그들보다 못하거나 힘들거나 고통스러운 인생을 살고 있을지라도, 비관하기보다는 지금의 내게 주어진 삶의 단편들을 소중히 여기고 아끼고 보듬어 나가기를 바라면서 이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