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물녘 맹수들의 싸움 / 앙리프레데리크 블랑
엘리베이터라는 공간은 참 어색하다. 타인들과 좁은 공간에서 공기를 나누다 보면 숨소리도 작아지기 마련이다. 문이 닫힘과 동시에 세상과 격리되는 한 평 남짓한 공간, 거기엔 숨겨진 욕망과 경건한 이성이 국경의 보초병처럼 서로를 노려보고 있다. 이 문명의 장치 엘리베이터는 현대인들의 소통 공간이지만, 서로에게 관심을 거두고 손바닥 위의 세상과 오르내리는 숫자에만 몰두한다. 앙리프레데리크 블랑의 소설 『저물녘 맹수들의 싸움』을 보면 엘리베이터라는 상징적 공간에서 인간이 어떻게 맹수가 되어가는지 고찰할 수 있다.
서른세 살의 광고 기획자 샤를 퀴블리에는 인간의 마음을 능숙하게 조종하며 소통할 수 있다고 자신한다. 그가 살아온 경력과 자신이 만든 광고가 그것을 증명한다고 생각해서다. 그러나 집을 구하기 위해 갔던 한 건물의 엘리베이터를 탄 순간부터 그의 인생은 비극으로 한 발씩 걷기 시작한다. 그 시작은 미미했다. 엘리베이터가 4층과 5층에서 멈춰버린 것뿐이었다. 엘리베이터 속에서 잠시 기다리면 누군가가 꺼내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바람과는 달리 건물 주인을 비롯한 그 누구도 그를 엘리베이터에서 꺼내줄 생각이 없다. 건물주인 발메르 부인은 맛있는 식사를 제공하며, 그가 엘리베이터 속에서 살아가는 데 부족함 없도록 배려 아닌 배려를 한다.
엘리베이터에 갇힌 지 며칠 후, 그는 ‘자신은 아무 짓도 안 했는데 왜 꺼내주지 않느냐’라고 울부짖는다. 건물 주인은 ‘남을 위해 아무 일도 해 본 적 없으면서 남이 자기를 위해 뭘 해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은 염치없다는 논리를 내 세운다. 그 후로도 샤를은 그가 기획했던 광고들의 언어처럼 포장과 가식으로 사람들을 대하고, 자기에게 온정을 베풀려고 했던 사람에게조차 진심을 숨긴 채 빠져나갈 궁리만 한다.
그를 엘리베이터에서 꺼내주지 않는 건물 주인도 매우 불합리하지만, 그 건물에 살거나 방문하는 이들도 각자 저마다의 이유를 대며 샤를의 고통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샤를의 처지에 공감하지 않는 그들도 또 한 무리의 맹수들이다. 샤를은 최후의 수단으로 건물 주인이 과부인 점을 이용해 청혼하고 이 고립의 장소에서 벗어나려고 기획하지만, 그것마저 조롱거리가 된다. 그는 서서히 미쳐가고 급기야 이성적 판단을 할 수 없는 처지에 이른다. 아니 처음부터 이성적 판단 대신 임기응변과 기만으로 일관했던 행동과 말들이 스스로 고립을 자초했다.
이 남자가 엘리베이터 안에 갇혀 미쳐가는 이야기 속으로 몰입될 무렵 그의 엘리베이터 속에서의 생활이, 우리의 삶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눈치채기란 어렵지 않다. 그가 3주 만에 엘리베이터에서 해방된 날 “형제님, 계산하면서 사는 것은 잘못된 삶입니다. 자기만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의 적입니다. 주머니는 가득 찼는데 가슴은 텅 빈다면 애써서 무엇합니까?”라는 신부님의 설교는 매우 순진해서 웃음이 난다. 현대인의 소통이 얼마나 허무한지, 그리고 진심을 숨긴 채 얼마나 가식적인 말들을 주고받는지, 한 남자의 불행을 보면서 인간 고립에 대한 성찰로 이어진다.
현대는 사람과 사람이 만나도 서로의 눈을 오래 들여다보지 않는다. 서로의 손바닥 속 세상에만 관심을 둔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섬처럼 고독하다. 그 외로움을 자초한 우리들은 저마다의 고립을 이겨내기 위해 지혜를 짜낸다. 가상의 공간에 자신의 하루를 낱낱이 고해바치고, 다른 섬들의 하루에 엄지를 세워 들며 다리를 연결해 둔다. 이 공간에서 샤를 퀴블리에처럼 진심을 나누지 않는다. 적당히 거리를 둔 관계들 속에서 적당히 받아들이고, 적당히 부유하고, 적당히 거부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진심으로 사람을 대하는 순간 책임이 주어지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은 다들 고독하지만 그럭저럭 살아간다.
“층과 층 사이에 멎는 엘리베이터에서 외부의 도움 없이는 절대로 나가려고 하지 말 것.”
『저물녘 맹수들의 싸움』은 소설 초반에 해법이 제시되어 있었다. 샤를이 갇힌 엘리베이터에 붙어있는 사용 수칙이다. 다른 이와의 소통 없이는 우리의 인생은 결국 비극에 이른다는 암시다. 샤를 퀴블리에는 소통의 부재와 오해로 인해 크리스마스이브에 창문으로 추락해 죽음을 맞지만, 그의 사인은 추락사가 아니라 나무를 장식한 화려한 크리스마스 장식 전구로 인한 감전사였다. 크리스마스에 나무를 아름답게 포장하는 전구는 사람과 사람 사이 관계의 허영과 가식을 보여주는 극적 장면이다. 파티가 끝나면 무정하게 전원 스위치를 꺼버리는 장식 전구 존재의 허무함이 샤를의 인생과 묘하게 대응한다.
페루 티티카카 호수 위에는 물결 따라 흔들리는 섬들이 있다. 우루족이라 불리는 사람들은 갈대를 엮어 호수 위에 부유하는 섬을 만들어 마을과 집을 짓는다. 섬은 홀로 떠 있는 듯 보이지만 밧줄과 갈대 다리로 이웃 섬과 이어진다. 폭풍이 오면 그들은 줄을 더 단단히 묶고 잔잔한 날이면 서로를 찾아 배를 젓는다.
현대인들은 도시의 인파 속에서도 결국 자기 섬에 홀로 서 있다. 지금 세상은 혼자서도 행복할 수 있도록 진화 중이지만, 우리의 본능은 다른 사람과 건강한 관계를 맺고 함께 행복하도록 설계된 원형 그대로다. 망망대해에 떠 있는 불안함과 외로움을 달래줄 수 있는 것은 등대가 되어 줄 다른 섬들뿐이다. 각자 떠 있는 바다 위에 작은 불빛 하나 켜야 한다. 그 불빛이 누군가의 파도 높은 밤을 건너게 해 줄 테니까, 그 등대가 없다면 우리는 어둠 속에서 영영 표류할지도 모르니까.
사람과 사람의 진실한 소통, 진정한 관계 맺기만이 우리를 엘리베이터 밖으로 꺼내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