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은 한 편의 詩가 된다

자두나무 정류장 / 박성우

by 마루


시에는 화자가 있다. 화자가 보이지 않을 때는 숨은 화자가 지켜보는 대상이 있다. 화자는 그 대상을 연민하거나, 예찬하거나, 분노하거나, 체념하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자신과 닮았다. 시를 읽는 우리는 그 화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본다.

어느 대시인은 ‘요즘 시들이 가슴에서 나오지 않고 머리에서 나온다’라고 읊었다. 맞는 말이지만, 틀린 말이기도 하다. 요즘도 가슴으로 시를 쓰는 이가 있다.

며칠 동안 박성우 시인의 시집 <자두나무 정류장>을 들었다 놓았다 했다. 시집을 앉은자리에서 한 번에 읽는 것은 시인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시집을 읽을 때는 공을 들인다. 좋은 소설은 앉은자리에서 폭풍처럼 읽기도 하지만, 시의 행간은 그렇게 폭포처럼 내게 쏟아져 내리지 않는다. 특히 박성우 시인의 시는 가랑비에 옷깃이 젖듯, 조용히 나직나직 내게로 왔다.

문학에서 일가를 이룬 사람들에게 우리는 ‘가(家)’를 붙인다. 소설가, 수필가 등이다. 그런데 유독 시인(詩人)만이 ‘人’이라 부른다. 여러 감상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나는 평론가도 뭣도 아니니 그저 내 식으로 생각해 본다.


시인은 빼도 박도 못하는 시의 정서를 가진 사람이다. 사람 자체가 ‘시’인 사람이다. 삶이 곧 ‘시’인 사람이다. 그러니 ‘집’처럼 꾸미지 못하는 사람이다.

유독 『자두나무 정류장』의 박성우 시인은, 시와 그의 삶이 동일시된다. 모르긴 몰라도 이 시인은 자신의 지은 시와 똑같은 사람일 것이다. 느리고, 연하고, 눈물 많고, 무엇보다 선하다. 큰 것이 아니라 작은 것을 본다.


매실주 우려낸 매실을 겨울 마당에 붓는다
삼십도 소주에 점벙점벙 담겨
쪼글쪼글 팅팅 불어터진 매실,
(...)
팽나무 가지에 몰려 사는 물까치가 몰려온다
두어 마리도 아니고 예닐곱 마리씩 와서
두리번두리번 쪼다가는 매실 하나씩 물고 간다
싸락눈이 싸락싸락 치는 밤이 오도록
물까치는 제집 드나들듯 우리집을 드나든다
(...)
눈발 치는 겨울밤 나기엔 한잔 술이 제일이지
시큼하고 단 매실주 한잔 생각나는 밤,
취기로 추위 견딜 물까치를 생각하니 맘 든든하다.
물까치떼에게 술상 봐준 마음이 야릇하다
(...)
P. 26 <물까치>

술에서 건진 매실을 거름으로 내놓았는데, 까치들이 한잔 두잔 마신다. 인류가 처음 술을 어떻게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땅에 떨어져 발효된 포도 한 알 한 알을 먹다가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넌 것이 아니었나 상상해 본다. 가족에게 비좁은 둥지를 내어주고 애먼 곳에서 밤을 보내기도 할 까치 아비들을 위해서라도 화자가 다음 해에도 같은 실수를 범하길 바라는 것은, 비단 나뿐이랴. 우리 아버지들 한잔 술의 오락이 없다면 무슨 재미로 견딜 것인가. 실수로 인해 생긴 까치들의 일탈에 오히려 미소가 지어지는 이유다. 세상에서 제일 센 권법이 취권이라던가? 황조롱이도 물릴 수 있으리라.


강변을 걷다가 본다
살점이 죄 발린 고라니뼈,
(...)
고라니가 물 한 모금 마시러 온 시간
어떤 산짐승이 끼닛거리를 노리는 시간
물 한 모금과 목숨이 아무렇게나 뒤엉킨 시간
끝내 고라니 편이 되어주지 않은 시간,

턱뼈에 붙은 송곳니가
이미 잘못 지나간 끔찍한 시간을 물고 있다
P. 96 <고라니뼈>

시간의 반복이 영원이다. 대대로 그리 살아온 자연의 삶에 괜한 측은지심을 갖지 말자고 생각하면서도, 이 시 앞에서 많은 생각을 한다. 어디 고라니뿐일까. 제한된 생을 부여받고 살아가는 존재들인 우리는 잘못 세워진 질서 속에서 잔혹한 시간을 보내는 것쯤은 허다한 일이다. 내게만 삶이 조금 더 친절했으면 좋겠다고 바랄 뿐.


(...)
지팡이 앞세우고 물어물어,
우리집을 알아내는 데 족히 일년이 넘게 걸렸단다
대체 우리는 몇가마니나 되는 참깨를 들쳐메고
누군가의 집을 찾아나서야 하나?
받은 참깨 한 봉지 들고 파출소로 간다
P. 66 <참깨 차비>

화자는 병원에 가는 할머니를 한 번 태워드리고 까맣게 잊는다. 어느 날 그 할머니가 집을 물어물어 참깨 한 봉지를 들고 나타난다. 차비로 참깨 한 봉지를 들고 나타난 것이다. 화자는 그 참깨 한 봉지를 들고, 할머니를 집까지 태워다 드리라고 부탁했던 파출소를 찾아간다. 굳이 그 할머니가 낸 참깨 차비를 들고. 그깟 참깨 한 봉지 그냥 혼자 먹으면 어때서, 호박 나물 볶을 때 한 꼬집씩 넣으며 할머니 마음 떠올리는 미소 한 번 지으면 될 것을 굳이 파출소는 왜 가는 건지. 후일담이 궁금하다. 참깨 한 봉지를 반반 나눴는지, 아니면 순경 아저씨에게 몽땅 주고 왔을지. 서로 손사래를 치며 네가 받아라, 아니다 네가 받아라 이러고 있을 두 양반을 생각하니, 웃음 반 눈물 반이다. 뜨듯하다.

외딴 강마을
자두나무 정류장에

비가 와서 내린다
눈이 와서 내린다
달이 와서 내린다
별이 와서 내린다

나는 자주자주
자두나무 정류장에 간다

비가 와도 가고
눈이 와도 가고
달이 와도 가고
별이 와도 간다

덜커덩덜커덩 왔는데
두근두근 바짝 왔는데
암도 없으면 서운하니까

비가 오면 비마중
눈이 오면 눈마중
달이 오면 달마중
별이 오면 별마중 간다

온다는 기별도 없이

비가와서 후다닥 내린다
눈이 와서 휘이잉 내린다
달이 와서 찰바당찰바당 내린다
뭇별이 우르르 몰려와서 와르르 내린다

북적북적한 자두나무 정류장에는
왕왕, 장에 갔던 할매도 허청허청 섞여 내린다

P. 22 <자두나무 정류장> 전문

표제작 <자두나무 정류장>은 현실의 공간일 텐데 가장의 공간인 것 같기도 하다. 어차피 자두나무가 있는 정류장은 가본 일도 없으니, 시를 읽는 사람들에겐 가장의 공간이나 다름없다. ‘비도 내리고 눈도 내리고 달도 내리고 별도 내리는’ 자두나무 정류장은 있지만 없다. ‘북적북적’하지만 한적하다. 화자는 한량처럼 이 자두나무 정류장에서 내리는 모든 자연물에 대해 애정 어린 시선을 보낸다. 이 비현실적 공간이 시인의 눈을 통해 현실적 공간으로 우리 삶에도 내린다. 왠지 슬프지만 따뜻하게 읽히는 이유다.

박성우 시인의 일상은 시가 된다. 가식 없다. 그러니 투명하다. 박성우 시인은 詩 자체가 삶이고, 삶 자체가 詩인 천생 시인이다. 삶을 향해 뛰는 가슴이 느려지지 않길, 멈추지 않기를 빌어 본다.


어떤 금기처럼

내 방에 들이지 않는 것이 하나 있으니

그것은 바로 거울이다.


나를 온전히 비춰줄 수 있는 것은

오직 내가 쓴 시뿐이므로.

- 시인의 말 -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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