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돌 / 한강
십년 전 꿈에 본
파란 돌
아직 그 냇물 아래 있을까
난 죽어 있었는데
죽어서 봄날의 냇가를 걷고 있었는데
아, 죽어서 좋았는데
환했는데 솜털처럼
가벼웠는데
투명한 물결 아래
희고 둥근
조약돌들 보았지
해맑아라
하나, 둘, 셋
거기 있었네
파르스름해 더 고요하던
그 돌
나도 모르게 팔 뻗어 줍고 싶었지
그때 알았네
그러려면 다시 살아야 한다는 것
(...)
십년 전 꿈에 본
파란 돌
그 빛나는 내(川)로
돌아가 들여다보면
아직 거기
눈동자처럼 고요할까
한강 詩 <파란 돌> 중에서
인간은 꿈을 꾼다. 그 꿈은 중의적이다. 잠을 자야만 꿀 수 있는 꿈과, 앞으로 이루고 싶은 어떤 소망도 꿈이라 부른다. 한강의 시 <파란 돌>에서 화자는 꿈에 파란 돌을 본다. 팔을 뻗어 그 돌을 줍고 싶은데 그럴 수 없다. 그는 죽어있기 때문이다. ‘죽어서 좋았는데’ 그 파란 돌을 줍기 위해서는 다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자고 일어난 어느 아침엔 유독 꿈이 생생한 날이 있다. 또 어떤 날의 꿈은 바로 잊혀져서 아무리 애써서 떠 올리려 해도 기억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시의 화자는 죽어 있어서 '환'하고 '가벼'워 무게감이 없지만, 꿈속에서 유독 환하게 빛나는 그 파란 돌을 주우면 다시 살 수 있을 것만 같다. 그 파란 돌은 무엇일까. 한강은 오래 그 꿈을 기억한다. 그리고 변주한다.
그런 생각을 하던 어느 날 밤 꿈을 꿨어. 꿈에 보니 난 이미 죽어 있더라구. 얼마나 홀가분했는지 몰라. 햇볕을 받으면서 겅중겅중 개울가를 걸어갔지. 개울을 들여다봤더니 바닥이 투명하게 보일 만큼 물이 맑은데, 돌들이 보이더라구. 눈동자처럼 말갛게 씻긴, 동그란 조약돌들이었어. 정말 예뻤지. 그중에서도 파란빛 도는 돌이 가장 마음에 들어서 주우려고 손을 뻗었어. (...) 그때 갑자기 안 거야. 그걸 주우려면 살아야 한다는 걸.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걸.
- 소설 「파란 돌」中
시 <파란 돌>의 화자이자 시인인 작가 한강은 꿈에 본 그 파란 돌을 잊을 수 없다. 그 묵묵한 詩는 단편 소설 「파란 돌」로 다시 태어난다. 이 단편은 소설집 『노랑무늬영원』에 수록되어 있다. 이 짧은 소설에서 '파란 돌'을 보는 사람은 피가 멈추지 않는 병을 앓는 친구의 삼촌이고 그는 죽었다. '나'는 그에게 '그곳은 지낼 만 한지' 안부를 묻는다.
거긴 지낼 만한가요. 나는 여전히 여기서 잘 지내고 있어요. 서른일곱 살이 되었고, 웃을 때면 눈가에 잔주름이 파이기 시작하고, 가르마 오른쪽으로 흰머리가 꽤 났습니다. 아마 머리가 빨리 희어지려나 봐요.
- 소설 「파란 돌」中
주인공이 사랑하는 사람은 친구의 삼촌. 그에게서 그림을 배웠고, 햇빛과 나무의 그늘을 가르쳐 준 이다. '나'는 그를 열일곱 살에 만났고, 그는 서른일곱에 죽었다. 시간이 지나 편지를 쓰는 '나'는 그가 죽은 나이인 서른일곱이다. 소설 「파란 돌」은 죽은 이를 애도하는 한 편의 산문시와도 같다.
애도는 상실의 시작이다. 상실 속에서 일어나는 감정적이고 심리적인 과정이 '애도'라는 행위다. 죽은 이에 대한 애도는 단순히 슬픔에서 벗어나려는 것이 아니라, 그 상실을 통해 '나'를 다시 들여다보는 것이다. 그래서 애도는 슬픔 그 이상의 것, 존재와 관계와 삶과 죽음의 의미를 탐색하는 것이다. 한강의 소설은 다소 어둡지만, 거기에는 깊은 사랑이 있다. 아픈 사람들이 있다. 부서질 것 같은 사람들이 서로를 사랑한다. 소설 「파란 돌」의 주인공이 떠나간 사랑을 위해 나직나직 읊조리는 이 애도의 행위는, 이별이란 단순히 잘 보내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자를 기억하고 나와의 관계를 재구성하는 과정이 된다.
한강은 단편을 끝내고 한참 후 다시 '파란 돌'을 꺼낸다. 장편소설 『바람이 분다, 가라』에서 친구 인주와 역시 혈우병을 앓고 먹그림을 그리는 인주의 삼촌이야기로 재탄생되는 것이다. 특히 9장 '파란 돌'은 단편 「파란 돌」을 에필로그처럼 사용하고 있다.
이렇게 시와 단편과 장편으로 세 번이나 변주해서 쓴 ‘파란 돌’이 무엇인지 생각해 본다. 그것은 삶과 죽음 사이에 놓여 있는 어떤 것일 테다. 아니면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 어디쯤 인지도 모르겠다. 꿈이 모티프가 되어서인지 설명적 언어가 아니라 떠오르는 순간을 언어로 옮긴 시와 같다. 파란 돌은 여전히 잘 잡히지 않지만 내가 죽어도 영원히 어딘가에서 머물 '영혼'이 아닐까.
어쩌면 시간이란 흐르는 게 아니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그때 함께 찾아옵니다. 그러니까, 그 시간으로 돌아가면 그 시간의 당신과 내가 빗소리를 듣고 있다구요. 당신은 어디로도 간 게 아니라구요. 사라지지도, 떠나지도 않았다구요. 언젠가부터, 당신과 동갑인 남자를 만날 때마다 세월이 변화시켰을 당신의 얼굴을 막막하게 그려보던 버릇을 버린 것은 그 때문입니다.
그러니 당신에게 물어도 되겠지요.
거긴 지낼 만한가요. 빗소리는 여전히 들을 만한가요. - 소설 「파란 돌」中
시와 소설의 '파란 돌'을 읽다 보면 어떤 메시지가 기억되기보다 비 오던 날의 습도, 먹 냄새, 하얀 손의 푸른 멍, 서늘한 목덜미, 돌의 차가움, 물결이 나직이 흘러가는 모양 등등이 머리가 아니라 가슴에 남는다. 며칠 동안 밤마다 '파란 돌'을 붙잡고 있었더니, 내 꿈에도 파란 돌이 나올 것만 같다.
한강이 빚어내는 사람들은 '밤의 나무처럼 묵묵하'고 '고요'하고 '환'하다. 죽어 있는 삶조차도 살고 싶게 만든다. 죽는다고 해서 끝이 아니다. 살아 있는 것 또한 다가 아니다. 내게 온다면 손을 뻗어 그 '파란 돌'을 줍고 싶다. '그러려면 다시 살아야'한다. 단순히 삶을 연장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새롭게 경신해야 한다. 나는 '살아' 있으니 어쩌면 조금 더 쉬울 지도 모른다.
한강의 세 번째 '파란 돌'의 변주 『바람이 분다, 가라』를 따라 흐르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