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개츠비 / F. 스콧 피츠제럴드
"한동안 그(스콧 피츠제럴드)만이 나의 스승이요, 대학이요, 문학하는 동료였다." -무라카미 하루키-
"오늘날 피츠제럴드를 읽는 것은 무라카미 하루키를 읽는 것이다."
- 다쓰미 다나유키 -
아무 페이지나 펼치고는, 그 부분을 한 차례 읽는 것을 습관으로 삼고 있었지만, 단 한 번도 실망한 적이 없었다. 한 페이지도 시시한 곳이 없었다. 정말로 훌륭한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남들에게 그 출중함을 알려주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 상실의 시대 -
이 책을 내게 권해준 사람은 '상실의 시대'의 와타나베였었고, 읽고 나서 나도 와타나베처럼 F. 스콧 피츠제럴드에게 경의를 표하게 되었었다. 오래전에 만난 소설이지만 아직도 가끔 와타나베처럼 아무 페이지나 펼쳐보곤 한다.
하루키의 소설을 이야기할 때 기법은 챈들러(하루키를 읽기 시작할 무렵쯤 나도 챈들러의 추리를 같이 읽었다)적이고, 상실이라는 테마에서 보면 피츠제럴드 쪽에 가깝다고 했다. 하루키는 『상실의 시대』 에서 『위대한 개츠비』를 세 번 읽은 이라면 친구가 될 수 있다고 한 만큼 하루키에게 많은 영향을 준 작가가 스콧 피츠제럴드이다. 로스트 제너레이션의 대표적 작가인 피츠제럴드를 읽으면 초중기 하루키의 테제인 상실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고, 피츠제럴드의 작품에서 보이는 센티멘털함과 시니컬함, 도시적 세련됨과 소박함 이런 대조가 이루는 조화가 어떻게 하루키에게 영향을 주었는지 알 수 있다.
우선 『위대한 개츠비』를 읽기 전 내가 갖고 있었던 정보는 '한 사나이의 지고지순한 사랑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 책을 읽기 전의 정보는 책을 읽는데 방해가 된다는 것을 여실히 깨달은 작품이었다. 표면적으로 『위대한 개츠비』는 사랑 이야기임에 틀림없지만, 그 이면은 정신적 가치를 무시하는 시대의 비판과 풍자가 담겨있다.
가난 때문에 사랑하는 여자 '데이지'를 떠나보낸 개츠비는 그녀를 되찾는 일은 부자가 되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금주법이 내려진 상황에서 밀주를 만들어 부자가 된다. 그는 웨스트에그의 큰 저택에서 매일밤 파티를 열고 그 속에 혹여 데이지가 있을까 찾아보는 것이 유일한 일이다. 데이지의 먼 친척이자 우연히 개츠비 저택의 옆집에 살게 된 화자 닉 캐러웨이. 제삼자인 닉을 통해서 우린 개츠비란 인물의 됨됨이와 그간의 속사정을 알게 된다. 하지만 닉이 제공하는 정보도 개츠비라는 인물을 완전히 알기엔 턱없이 부족한 정보이다. 대체로 닉이 던져주는 몇몇의 조각들을 통해서 우리는 개츠비라는 인물을 짐작할 수밖에 없다.
개츠비는 고난 속에서도 사랑을, 위대한 사랑을 이루려는 일념으로 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 데이지를 찾아서 그 꿈을 이루려고 한다. 데이지가 그만큼 가치가 있는 여자인가는 적어도 개츠비에게는 중요치 않다. 데이지는 바로 개츠비의 꿈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꿈을 이루고자 할 때 그 꿈의 사회적 가치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다만 그것은 말 그대로 자신의 꿈이자 이상이니까.
닉을 통해 데이지와 만남을 갖던 개츠비는 데이지의 남편 톰에게 데이지가 사랑하고 있는 사람은 자신이라고 당당히 이야기한다. 그리고 데이지와 차를 타고 나가게 되고, 흥분한 데이지는 개츠비의 차를 대신 몰고 가다 집 근처에서 우연히 남편 톰의 정부를 치고 그대로 달아난다. 개츠비는 데이지를 지켜 주기 위해 자신이 한 일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차에 치여 죽은 여자의 남편은 그 차의 주인인 개츠비를 뺑소니 범으로 오인하고 개츠비를 살해한다.
자신 때문에 죽음을 당한 개츠비의 부음에도 아랑곳없이 데이지는 남편과 여행을 떠나 버리고 끝내 장례식에도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우린 순진하게도 데이지의 모습이 먼발치에서나마 보이지 않을까 내심 기대를 하지만 끝내 데이지는 나타나지 않는다. 개츠비의 장례식은 그가 날마다 벌였던 화려한 파티와 대조를 이루어 더욱 쓸쓸해 보인다. 불을 보고 몰려드는 나방들처럼 개츠비의 파티에 모여들었던 수많은 사람들은 어디에 있는가. 화자인 닉은 자신 외에 단 한 사람만이 참석한 장례식에서 인간에 대한 환멸과 허무를 느끼고 뉴욕을 떠나 고향인 서부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개츠비가 있던 동부는 물질이 만능인 곳이었고, 닉이 돌아가기로 결심한 서부는 전통적 가치관의 가치를 아는 곳이다. 이 '돌아감'은 역행이 아니라 당시 미국 사회에 던진 피츠제럴드의 '경고'였다.
꿈을 이루려던 순간에 죽음을 당한 개츠비. '멍청한' 개츠비라고 외치고 싶지만 작가는 '위대한'이라고 표현했다. 개츠비가 집착이라 할 만큼 데이지에게 매달린 것은 데이지를 사랑한다기보다 '사랑' 그 자체에 대한 집착이 아니었을까. 눈을 감기 직전에 개츠비는 어떤 생각을 했는지 너무나 알고 싶었다. 소설에는 닉이 그의 주검을 수습하는 과정만 나와 있어서 우리로서는 알 길이 없지만, 데이지를 대신한 죽음이었기에 기꺼웠는지, 원망했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그래서 작가는 냉소적으로 '위대한'이라고 표현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생각해 보면 황폐한 현대 사회에서 좌절과 고난을 겪으면서도 이상(데이지)을 갖고 그것을 이루고자 열심히 노력을 기울이는 개츠비의 순수한 삶은 말 그대로 '위대한 삶'이었을 수 있다. 더군다나 그 당시 미국 사회에 팽배해 있던 허위의식과 물질주의, 개인주의를 고발하고자 했다면 제목 『위대한 개츠비』는 반어적 명명으로 가장 적확한 제목이었다. 개도 달러를 물고 다녔다는 미국 대공황 직전의 거품과 향락에 취해있는 졸부 개츠비. 그는 신흥부자촌 웨스트에그의 푸른 불빛 아래서 매일 밤 파티를 열지만 그의 눈은 늘 데이지가 있는 이스트에그의 초록 불빛을 바라본다. 그러나 개츠비의 순수한 '사랑'은 현실감 없는 '패기'에 그치고, 화려했던 만큼 그의 끝은 한없이 초라하다.
소설 『위대한 개츠비』는 화자인 닉의 아버지가 그에게 하는 조언으로 시작하고 있다.
"남을 비판하고 싶은 생각이 들 때는 말이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너처럼 유리한 조건에서 자라지 않는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한단다." 이 말처럼 개츠비를 또 한 번 버린 데이지나 그녀의 남편 톰, 그리고 꿈을 위해 부자가 되고 그 꿈이 현실로 이루어질 찰나에 죽음을 맞는 개츠비도 어떤 잣대로든 비판할 수 없겠다. 단지, 개츠비의 삶에서 보듯 우리가 무엇을 간절히 바란다는 것 자체가 허무한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책을 읽을 때마다 드는 것은 내가 하루키를 먼저 읽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개츠비가 부두 끝에 있는 데이지의 집에서 처음으로 초록색 불빛을 발견했을 때 느꼈을 그 신기함과 경이로움을 생각해 보았다. 그는 먼 길을 돌아 이 푸른 잔디에 이르렀다.
이제 그 꿈은 너무 가까이 있어 정말로 손만 뻗으면 닿는 곳에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꿈이 어느새 그의 뒤쪽으로 지나쳐버린 것을 느끼지 못했다. 대륙의 어두운 들판이 밤하늘 아래 끝없이 펼쳐진 도시 너머 광대하고 아득한 어둠 속으로 영원히 사려져 버렸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 본문 중
피츠제럴드는 개츠비를 통해 이렇게 말하고 싶었을까? '개츠비처럼 사랑하라!' '물질이 아니라 사랑을 숭배하라!'라고. 모르긴 몰라도 그는 사랑이 사라진 사회를 두려워했음에는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