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워서 좋았을까?

판탈롱 나팔바지 이야기 / 안도현

by 마루

옷을 좋아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것저것 많이도 샀더랬다. 어느 정도 나이가 들어서는 옷의 개수보다 옷장을 갖추어야 한다는 말에 공감했다. 지금은 적재적소에 입을 수 있고 유행을 타지 않는 질 좋은 옷을 사려고 노력한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버릴 옷이 거의 없고, 환경에 기여하고 있다는 쥐꼬리만 한 자부심도 가지게 된다. 내가 버린 옷이 동남아나 아프리카 어딘가에서 헤매고 있을 생각을 하면 마음이 불편해지기도 한다.


몸은 옷을 원하지만
옷에게 칭얼대지 않는다.
옷이 와서 몸을 감싸줄 때까지
몸은,
기다린다.
- P. 43


평생 똑같은 옷을 몸에 걸치고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은 없다. 계속 옷을 바꿔 입으려고 애쓰다가 결국은 늙는다. 몸에 맞는 옷을 찾다가 옷에 맞는 몸으로 변해간다. 입던 옷이 더러워지면 옷을 세탁하고 말리고 개고 다리고 옷걸이에 거는 일로 일생을 소비한다.

몸은 옷의 표정,
결핍처럼 쭈글쭈글해진다.
-P. 66


나는 최신작을 잘 읽지 않지만, 안도현 시인의 신작 『판탈롱 나팔바지 이야기』는 앉은자리에서 읽고 말았다. 안도현 시인이 내놓은 소설인가 싶다가 군데군데 서정시가 포진해 있고, 산문인가 싶지만 안도현이 시인이라는 것을 감출 수 없게 곳곳에 서정적인 시어들이 정렬해 있다.


안도현 시인은 '작가의 말'에서 "특정 장르의 형식을 염두에 두지 않고 쓴 책이다. 소설인 듯하면서도 소설이 아니고, 동화인 듯하면서도 동화가 아니고, 에세이인 듯하면서도 에세이가 아니고, 시인 듯하면서도 시가 아닌 형식."이라고 썼다. 안도현 시인은 이런 스타일의 글을 내놓으면서 독자들이 어떻게 받아들일까 꽤 신경이 쓰인 듯하다. 작가는 문학의 형식에 얽매일 수밖에 없고, 굳이 잘 나가는 시인 스스로가 아직 무르익지 않은 어떤 장르의 선구자가 되어 비평의 한가운데 서고 싶지 않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용기가 필요했음이다.


작가는 장르의 모호성을 고백했지만 나는 『판탈롱 나팔바지 이야기』 를 읽으며 '대서사시'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규보의 <동명왕 편>이나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 신동엽의 <금강>처럼. 고난과 역경을 넘어서 과업을 달성하는 그런 이야기, 끝끝내 영웅이 되는 그런 이야기 말이다.


『판탈롱 나팔바지 이야기』는 우리나라 1세대 패션디자이너 조경희(조세핀 조)의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조경희는 헌법학자 안경환 교수의 모친이며 우리나라 패션을 이끌었던 여성이다. 안도현 시인은 이 이야기를 안경환 교수에게 듣고 그녀의 이야기를 써 보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에 사로잡혔다. 소설과 서정시의 시점을 오가고, 안도현 시인의 상상력이 더해져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되었다.


조방아의 손녀인 주인공은 의상학과 대학원생이다. 할머니의 패션에 대한 리포트를 써오라는 과제를 받고, 아버지에게 집안의 금기였던 할머니에 대해 묻는다. 알고 보니 할머니는 의상학과 교과서에서 보던 우리나라 1세대 패션디자이너 조세핀 조였다. 아들이 다섯 살이던 해에 집을 나간 조방아의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된다.


여고 시절 재봉에 소실이 있던 조방아는 졸업 후 스무 살이 되자 밀양 유지의 아들 안오석과 결혼을 한다. 그는 아나키스트였고, 생활감각은 없는 사내였다. 둘이 있을 땐 사랑했지만, 밖에서는 아내에게 무심하기 그지없는 남편이었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남편은 인민군에 지원한다. 남편의 생사를 알 길 없던 조방아는 거제 포로수용소에 잡혀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시어머니의 노력으로 남편은 집으로 돌아오고, 조방아는 밀양 읍내에 의상실을 개업한다. 그녀의 옷은 여성들의 선망이 된다.


조방아의 생각은 달랐다.
옷은 옷감으로 몸을 가리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옷을 만드는 일이 단순한 기술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옷감 속에 숨어 있는 사람의 몸을 꺼내는 일,
옷으로 몸을 덮음으로써
더 아름다운 몸을 드러나게 하는 일.
-P.41


조방아는 남편이 '동지'라 부르던 남자에게 매료당한다. 그 남자에게 라기보다 그의 몸을 감싸고 있는 옷에 유혹당한다. 그 사람이 입은 옷이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려왔다. 그리고 안오석과 이혼을 한다. 서울로 온 조방아는 일본 유학과 파리에서 피에르 가르뎅에게 가르침을 받고 돌아와 나팔바지를 유행시키며 패션디자이너로 승승장구한다. 그러던 어느 날 돌연히 미국으로 떠나 버린다. 왜 떠났는지는 밝히지 않지만 당시 유신의 정권아래서, 그녀는 자유를 찾아 떠난 게 아닌가 한다. 패션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규제되던 당시의 사회에 대한 일갈이면서, 여성 앞에 놓인 벽을 거부하며 자유를 향해 나아간 것이다. 마흔여덟에 떠난 그녀는 여든여덟에 치매에 걸린 채, 돌아온다. 세상이 변했음을 말해도 조방아는 알 수 없었다. 영원히 자유 안에서 머무르고 있는 것이다.


조방아는 살아서 문장의 주어가 된 적이 없다.
평생을 조용히, 그러나 깊이 있는 서술어로 살다 갔다.
세상의 모든 주어는 자기가 문장을 이끌어간다고 믿고
서술어를 지배하고 길들이고 다듬으려고 한다.
조방아는 서술어의 마음으로 옷을 만들었다.
주어를 더욱 빛나게 하는 서술어였다.
조방아는 서술어가 되어
주어의 본질을 바꾸고자 했다.
- P. 160


그녀의 손녀는 판탈롱 나팔바지를 입고 있는 할머니의 사진 뒤에 이렇게 쓴다. "그 누구를 사랑한 적이 한 번도 없었지만 수많은 사람을 사랑하고 간 나의 할머니, 외로워서 더욱 빛이 났던."


조방아는 옷을 사랑했다. 몸에 맞춘 옷이 아니라, 좋은 옷은 몸에게 스스로 다가간다고 생각한다. 그녀의 생은 옷에게 생명을 부여한 신적인 존재다. 그래서 안도현 시인은 이런 대서사시로 응답한 게 아닐까 짐작해 본다. 이 이야기에서는 '몸'과 '옷'에 대한 안도현 시인의 철학이 특유의 서정적 문체로 그려진다. 이런 형태의 글이 '안도현체'가 되어도 좋겠다.


'보라색 꽃을 물결처럼 피워 올리는 자카란다 나무 아래서' 조방아 그녀는 자유로워서 좋았을까? 모든 추억들은 옷장 속에 조용히 걸어 둔 채.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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