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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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락 좀 줘"
해인에게 받은 메신저가 벌써 12개가 쌓여있다. 이번에도 역시 무응답으로 대답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니 연일 끝도 없이 수도권을 향해 퍼붓는 거센 빗줄기는 조금 그치는가 싶으면 다시 무섭게 내리며 전국에 극심한 손해를 끼치고 있었다.
"수도권 호우경보로 인해 금일 A박물관 운영을 부득이하게 중단합니다. 방문에 착오 없으시길 바랍니다."
관람객 없는 텅 빈 박물관에 갓 입사한 유리 씨의 낭랑한 목소리가 전시장에 전시된 유물들에 공지를 전하고 있다. 관람객 안전과 유물 보호에 전력을 다하라는 상부의 한 장 짜리 지시가 내려왔다. 출력해서 꼼꼼히 읽어봐도 박물관 직원에 대한 안전 유의와 조기퇴근은 적혀있지 않았다.
벌써 이 주째 이어진 긴 장마에 박물관은 온습도를 제어하는 항온항습기 기계를 가동해 유물 보호에 만전을 다하고 있는 상태다. 건조한 항온항습기 기계 소리와 부드러운 음성의 유리 씨의 안내 멘트가 겹쳤지만 두 개의 소리는 전혀 융합되지 못한 채 비어버린 박물관에 공허히 울릴 뿐이다.
"윤아쌤 직원 주차장 배수구에 물이 안 빠져서 고여 있대요."
멍하니 유리 씨의 멘트에 집중하다 전시 학예 팀장님의 단호한 목소리에 벌떡 일어났다.
"네 가보겠습니다."
나만 알 수 있는 작은 항의 어조를 담은 무뚝뚝한 목소리는 두 발보다 빠르게 반응해 마르지도 않은 우산을 챙겨 재빨리 야외 주차장으로 나간다. 오늘 같은 기상악화 상황에서는 시설 운영팀이 더 중대한 업무에 투입되기 마련이라 자질구레한 업무는 짬이 낮은 나에게 자연스럽게 넘어온다.
"학예사님 밖에 비 엄청 내리는데 어디 가세요?"
막 안내 멘트가 끝난 유리 씨가 로비를 빠져나가는 나를 보며 걱정의 말을 건넨다.
"직원 주차장에 물이 고여서요."
"물이 제법 고여서 혼자서 처리 못해요. 저도 같이 가요."
거세게 부는 바람으로 한층 더 난폭해진 굵은 장대비에 고개를 푹 숙여 걸으며 속으로 팀장을 향한 온갖 욕지거리를 퍼부으며 간신히 주차장에 도착했다. 발목까지 차오른 물웅덩이를 보자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을 욱여넣고 물아래를 향해 고개를 내리니, 담배 꽁초와 나뭇잎으로 배수구가 막혀 빗물이 빠지지 않고 있었다. 일회용 장갑을 가져올 생각을 못 한 자신을 나무라며 머뭇거리고 있는데 순간 얇은 손목에 쭉 뻗은 유리 씨의 간 손가락이 더러운 물웅덩이에 쑥 들어가더니 이물질을 거침없이 건져 올린다.
복숭아색 네일아트를 곱게 칠한 유리 씨의 손에 누런 이물질을 들려 있는 걸 보자 나도 급하게 손을 넣어 부유물을 걷어 올리기 시작했다. 무아지경으로 건져내고 있자 아침에 류해인에게 받았던 메신저가 떠오르며 문득 10년 전 그 여름이 생각났다.
그날도 오늘처럼 미친 듯이 비가 내렸다. 일찍이 수업을 마치고 기숙사로 들어와 젖은 양말과 바지만 대충 벗어 의자에 던지고 침대에 누워 기절해 버렸다. 그렇게 한참 단잠을 즐기는데 갑자기 얼굴에 뚝 뚝 떨어지는 물의 감각에 눈이 파르르 떨렸다. 억지로 눈을 떠 굳게 닫힌 창문 문틈으로 흘러 들어오는 바깥소리를 듣자 루벤스의 <바우키스와 펠레몬> 작품에는 나오지 않은 뒷이야기인 불친절한 마을 사람들에게 분개한 제우스신이 벌을 내리기 위해 내던진 번개소리와 침수한 마을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공포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 순간 갑자기 낯선 음성이 들렸다.
"불도 안 켜고 뭐 해?"
굳게 닫힌 나만의 요새에 누군가 침입했다. 천연덕스럽게 말을 건네며 다가오는 검은 형체의 손에는 커다란 여행 캐리어로 보이는 짐이 들려있었다. 낯선 이의 베이지 리넨 셔츠에는 담배 냄새와 달콤한 향수가 뒤섞인 오묘한 향이 풍겼다. 향에 취해 잠시 누그러진 경계 태세를 다잡고 보란 듯이 인상을 팍 찌푸려 노려보았지만 그 사람은 전혀 개의치 않는지 젖은 옷차림 그대로 옆자리 빈 침대에 털썩 앉는 만행을 저질렀다. 기싸움에 지기 싫어 더욱 매서운 눈초리를 흘겨댔지만 침입자는 흰 이를 드러내며 환히 웃을 뿐이다.
"반가워. 오늘부터 룸메이트로 지낼 류해인이라고 해."
그날 류해인과의 불콰한 첫 만남을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