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적 이윤아 시점 2
전지적 이윤아 시점 2
전날 마셨던 술에 숙취가 아직 가시지 않은 채로 끙끙거리다 오후 느지막이 침대에서 일어나 방바닥에 나뒹구는 핸드폰 잠금화면을 열어보니 류해인에게 메시자가 한 통 더 와있었다.
-난 이번 여름휴가 호주로 결정했어. 가서 서핑하고 올 예정이야 너는 어떻게 보낼지 궁금하다.-
메신저를 읽고 핸드폰은 침대에 던졌다. 이번에도 답장은 않았다. 어제 꽤 마셨는지 희미한 두통과 함께 자꾸만 속이 울렁거린다.
"이번에도 호주로 가는구나.."
숙취를 달래기 위해 큰 마음먹고 장만한 커피 기계에 전원을 누르고 캡슐을 넣고 잠시 기다리자 쭈욱 내려오는 커피 향에 차차 울렁거림이 가라앉는다. 냉동고에 미리 얼려둔 얼음을 꺼내 넣으니 금세 시원한 아이스아메리카노 한 잔이 만들어졌다. 누구처럼 짧은 여름휴가에 해외를 갈 수는 없지만 나름 진지하게 공부한 코인과 주식 덕에 최근 이사한 이 신축 원룸 방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사진 갤러리에 저장한 근사한 호텔 객실 사진을 넘겨본다.
한 달 전까지 반지하방을 전전하던 나와 달리 류해인은 학부생 전공을 마치고 전혀 연관성 없는 일에 몰두하더니 현재는 몇 년 전에 타계(他界)한 유명 건축가 사무실과 대학원을 오가는 삶을 살고 있다. 물론 그녀의 집은 방이 2개에 화장실도 2개인 신축 오피스텔이다. 안수연의 부(父)는 국내 굵직한 대학의 문화인류학과 교수고, 모(母)는 성악을 전공한 뒤 국내 오페라단에서 활동한 성악가이다. 견고한 부모님의 재력과 명성 덕에 어린 시절부터 세계 곳곳을 여행한 복으로 호주 정도는 무더운 여름에 짧게 다녀올 만한 휴가지일 뿐이다.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막노동하던 나의 부(父)와 세 식구 살림살이를 쪼개 마련한 작은 방에 공부방을 운영하던 모(母) 사이에 태어난 나. 애써 힘들게 마련한 나만의 안락한 요새에 이사 후 잊었던 자격지심이 오랜만에 고개를 들어 인사하자 이를 꽉 물고 모르는 척할 뿐이다.
동년배 90년대 생으로 태어나 대한민국 흙을 밟고 자랐지만 전혀 다른 가정환경 속에서 자란 두 사람이 환경적으로 친해질 수 있는 기회는 극히 낮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쩌다 폭우 내리던 밤 기숙사에서 마주한 그 뒤로 관계를 단절하려 시도해도 빈번히 실패로 돌아만 갔다. 약아빠진 류해인은 가난한 대학생인 나의 상황을 금세 파악한 뒤 조금이라도 멀어지려는 낌새를 발견하면, 내 상황에서는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달달한 먹이를 내 발 앞에 던져 놓고 기다렸다. 돌이켜보면 내가 스스로 제자리로 돌아오는 상황을 즐겼던 것 같기도 하다.
류해인식으로 말하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바람직한 도덕심을 지닌 올바른 사회 지도층이지만 이윤아식으로 표현하면 넘쳐 나는 재원을 불쌍한 친구에게 나눔 하는 재수 없는 인간이다. 뱀 새끼 마냥 능글거리는 말투는 듣기 싫었지만 건네는 온갖 것들은 좋았다. 나는 구호물품 받는 주제에 편히 누리기만 하면 될 것을 열등감이라는 감정이 가슴 한 편에서 뇌 구석구석에 번지는 날을 막지 못하면 혼자 기숙사 방 안에서 끅끅 울음을 삼켰다. 졸업하고 취업해 돈을 벌면 나도 류해인 앞에서 당당해질 수 있으니깐. 그때는 동등해질 수 있어. 이 마음만 자꾸 되풀이하고 억지로 관계를 이어가던 어느 날 정확히 말하면 오 개월 전 그 사건만 없었다면 이렇게 류해인을 멀리 내치지는 않았을 텐데.
"너 알고 있었어..?"
"나한테 중요한 것들 아니야"
"그럼 너한테는 뭐가 중요한 건데?"
"... 어쨌든 그런 건 다시 사면 그만이야. 들어가자 날 추워. 너 귀 빨개졌어."
가난한 사람들은 다 이런 인간이라는 스테레오 타입에 내가 일조했을까 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며칠째 이어진 한파의 겨울밤. 반지하방을 탈출하기 위해 온갖 코인과 주식도 모자라 투잡을 뛰고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를 대신해 집으로 향하는 계단 난간에 지탱한 채 겨우 방으로 들어왔었다. 불이 꺼져 있어야 할 방에는 형광등으로 밝아져 있고 방금 전까지 근무했던 식당 음식들로 접이식 테이블이 채워져 있었다. 연기가 모락 나는 두툼한 스테이크와 먹물 오징어 파스타, 해물 리소토. 일회용 포크와 나이프를 세팅하는 류해인에게 고맙다는 말 대신 냉장고를 열어 엊그제 마시다 남은 와인 한 병을 꺼냈다. 반 남은 와인으로는 부족해 집 근처 편의점에서 급하게 사온 맥주와 소주로 2차를 달리다 보니 어느새 시커먼 밤은 새벽 3시를 가리켰다. 주고받는 대화는 이미 새벽 1시에 끝났다. 슬며시 옆을 보니 류해인은 취기와 반지하방 한기에 몸을 말아 깊은 잠에 들었다. 상대방이 확실히 잠이 들었다는 걸 확인하기 위해 이십 분 정도 거 기다렸다가 조용히 옆으로 갔다. 류해인과 같은 자세로 누운 채 천천히 손을 뻗어 긴 스웨터를 걷어 올리자 드러난 청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어 뒤적였지. 한참을 뒤지고 있는데 들려서는 안 될 목소리가 들렸다.
"바지에 없어.. 코트 안주머니에 있어"
첫 관계 맺는 연인처럼 조급한 손길에 깬 류해인의 목소리였다. 깜짝 놀라 급히 손을 빼고 얼굴을 바라봤다. 전부터 알고 있었네. 내가 물건을 훔친다는 걸. 처음 알았다면 왜 바지 주머니를 뒤적이는 것인지 물었을 텐데 오히려 물건이 있는 위치를 알려주었다. 도둑 새끼가 성낸다고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쾅 받고 빠르게 계단을 올라 나갔다. 추위에 달아오른 열기가 가라앉길 바라며 몸을 떨어댔다. 류해인이 있는 집으로 갈 수는 없었다. 내가 물건을 훔친 이유는 단순하고 명료하다. 류해인을 질투해서다. 대학생 시절 류해인의 부의 소개로 경기도 모 국립박물관 주말 도슨트 자리를 얻어 꽤 높은 보수를 받았고 무엇보다 전공과 딱 맞는 자리로서 좋은 경험을 쌓아 훗날 취업에 있어 도움이 되었고. 그 밖에도 각종 정보 수집가 류해인 덕분에 여러 공공기관과 문화재단에서 진행하는 대학생 문화 축제 공모전에 참여해 좋은 성적과 스펙을 쌓을 수 있었다. 류해인 가족이 베푼 은혜에 이렇게 뒤통수를 치는 나를 두고 하는 말이 떠오른다. 배은망덕. 이러니깐 가난한 사람들이 욕을 먹는 거야. 이윤아.
류해인의 잘 관리된 긴 머리카락과 자주 메는 깔끔한 디자인의 가방들, 매일 착용하는 값비싼 주얼리 브랜드의 목걸이와 반지. 빛나는 물건보다 더 빛나는 부모님의 재력으로 무장한 가정환경이 미치게 부러웠다. 차마 비싼 액세서리와 가방에는 손을 댈 수는 없어 식당에서 받은 라이터, 실 핀, 핸드크림, 이어폰, 샤넬 립밤 등 잃어버려도 다시 사면 그만인 나를 닮은 그저 그런 물건들 위주로 훔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