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지기 지인들이 있다. 최근 바빠서 잘 못 만나다가 2-3년 만에 모였다.
각자 자기들의 근황을 이야기한다. 아이가 곱셉을 못하고, 애들 병원 다니느라 연가를 다 써버리고, 남편이랑 티격태격하고 미주알 고주알... 재미나게 이야기를 듣는다.
나에게도 갑자기 질문이 들어왔다.
“언니네 딸 졸업하지 않았어?”
“어 했어. 어제.”
“근데 인스타보니까 어디 가는 것 같더라. 어디가? 무슨 일 있어?”
“어 캐나다에 가고 싶대서 유학 준비 해”
“뭐하고 싶어서 외국간대?”
“패션마케터”
“아... 패션마케터. 언니 내가 의류학과 나왔잖아. 그쪽 세계 잘 알지. 취직도 잘 안되고 거기 박봉에 야근을 밥 먹듯이 해. 그래도 괜찮대? 호호호”
“........아 그래?”
다시 질문이 들어왔다.
“언니 아들은 어때? 이제 좀 잠잠해? 학교 잘 지내? 앞으로 뭐 할거래? 진로는 결정했어?”
“...... ...... 너 참 무례하구나!”
뭔지 모르겠지만 매우 불편하고 거북하던 감정이 속에서 부글부글 했었는데 마음 속에 가득하던 덩어리를 입 밖으로 뱉어내고 말았다. 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져 버렸지만, 이미 뱉은 말은 어쩔 수가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의 방어는 저것 뿐이었다.
네 앞길도 모르는데, 나도 내 앞길도 모르는데, 남의 아들 앞길까지 왜 신경쓰니? 게다가 괜히 진지하게 걱정해주는 척, 잘 아는 척 들이대면서 왜 선을 확 넘는건데?
이전의 나는 이런 말을 들을 때 그냥 헤실헤실 웃었다. 재미있어서? 절대 아니다. 그냥 멋쩍고 무슨 말로 받아쳐야 할지를 몰라서 그러고 있었다. 나 때문에 분위기가 싸해질까 봐서. 보통 내가 하는 말은 ‘아... 그래? 그런거야?’ 하면서 상대방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수용한다고 스스로 착각하며, 나에게 해오는 공격과 무례들을 그대로 받았었다.
생각해보니 3년 전 그 친구가 내 고민을 듣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때 아들이 가출을 했었다. 그리고는 며칠 뒤 집에 돌아왔는데 이후 새벽에 들어오기 일쑤였다.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 같다고,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고,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고민을 털어놓았다.
“언니, 가출을 했거나, 새벽 마실 다니면 미행을 해서 멱살이라도 붙들어 와야지. 애가 나가서 뭐 하는지 엄마가 알아야 할 거 아니야. 그걸 어쩌지 못하고 있는 건 엄마로서 너무 비겁한 거야.”
엄마로서 너무 비겁한 거야....라는 말이 귀에 몇 년간 박혀있었다. 난 비겁한 엄마야. 그런데 차마 나가서 아들이 뭘 하는지 볼 자신이 없었고, 멱살 잡고 끌고 올 용기도 없었다.
집에서 기도하는 심정으로 기다리면서 이제나 들어올까 저제나 들어올까 기다리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제발 무사히 돌아만 와다오’ 하는 마음과 ‘괘씸한 자식 가만 안 둬’라는 마음이 번갈아 내 속을 뒤집었지만 사실 나는 아이 앞에서는 한없이 약자였다. 그리고 비겁하게 내내 기다렸다.
다른 집 아이들처럼 모범적이고 안정적인 일상은 아니지만, 그 시기보다는 훨씬 나에게 불안감을 덜 주고 있다. 서서히 나아질 거라고 생각하며 ‘이 정도면 괜찮다, 많이 좋아졌다’ 하는 마음인데 그들이 나서서 내 자식의 중량을 재려고 한다.
전에는 그렇게 거침없이 난도질을 해도 꼼짝하지 못했다. ‘내가 가진 것이 보잘 것 없고, 내 자식이 부족하니 이런 말 듣는 건 어쩔 수 없지.’ 하는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못나고 부족해도 내가 당신들한테 들을 이야기는 아니지. 무시와 언어폭력을 그대로 당해서는 안된다는 그동안 수없이 읽어온 자존감에 대한 자기계발서들을 읽은 내공이 쌓여 발휘되나 보다.
내 모멸감을 영양분으로 유지되어 왔던 관계, 오래 만났고 유지해 온 관계가 아까워서 그들이 나를 위해서 해주는 말일거라고 합리화하며 지탱해 왔는데. 만일 솔직한 내 한마디로 무너질 관계라면 사실 아무것도 아닌 거겠지. 공든 탑을 아쉬워하지 말자. 그리고 당당히 말하자.
“너 나한테 무례하구나!”